< --(주)대정(大正)-- >
월요일 아침 8시였다.
본부장 송 진명의 호출이 떨어졌다.
송 건 사장의 명도 있고 하니 당당하게 나를 호출해, 잠실주공 아파트 단지에 대한 견적을 내도록 했던 것이다. 분야는 새시, 유리, 철물 세 가지였다.
그 결과, 견적 가는 근 2만 가구에 육박하는 세대 수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았다. 서민용 아파트가 주종을 이루어 평형이 작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새시가 6억5천, 유리가 4억, 방화문, 계단난간, 발코니난간, 주 출입 통로의 현관 및 각종 놀이시설을 포함한 철물공사가 5억 등 총계 15억5천만 원에 최종 네고가 되었다. 이렇게 나온 배경설명 겸 당시 잠실주공 아파트의 이해를 돕기 위한 부차적인 설명을 하면 아래와 같았다. 잠실주공 아파트는 1971년부터 서울시가 잠실 인근 한강변에 308만평을 매립해 용지를 조성했고, 대한주택공사가 그 중 41만평을 965억 원에 매입해, 1976년 3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5개 단지를 건립했다.
삭막한 강변 매립지가 총 364동, 1만9180가구, 인구 10만 명의 거대한 주택 단지로 변신한 것이다. 당시 이 정도 규모의 단지는 세계적으로 일본과 서독, 영국에 있는 8~9개에 불과했다. 주택공사는 처음부터 아파트 뿐 아니라 행정기관과 병원, 학교, 체육관과 오락시설, 새마을회관 등 모든 것을 갖춘, 뉴타운을 염두에 두고 잠실지구를 조성했다. 이를 위해 잠실단지 건설 본부를 만들어 90명이 넘는 기술과 관리 인력을 배정하기도 했다. 이는 일반 공사 현장의 4배 이상 되는 인력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잠실 아파트 단지는 현재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는 뉴타운의 원조라고 할 수 있었다.
잠실 단지는 아파트를 공급받을 서울 시민의 소득 수준에 따라 면적을 결정할 수 있도록 10개가 넘는 주택 형으로 설계가 됐다. 가구당 월 소득이 4만4000원인 가구에는 전용면적 7.1~7.4평, 5만8000원이면 9.4~9.8평, 7만300원이면 13~13.5평이 적당하다는 결론에 따라 지어졌다. 잠실1~4단지는 건물을 남향으로 길게 평행 배치됐던 이전 단지와 달리 건물들이 중앙을 향해 모여 있는 ㅁ자형 클러스터(cluster) 방식을 채택했다. 이른바 중정형 공간구성으로 설계됐던 것이다. 단지 중앙은 놀이터나 작은 공원을 조성해 완결성을 높이려고 했다. 또 많은 나무와 꽃을 심어 쾌적한 환경을 연출했다. 아파트 단지의 이런 설계는 당시 매우 신선한 시도였다. 하지만 길게 이어진 상가에 비해 중앙에 위치한 상업시설은 이용이 불편하고, 수익성이 떨어져 주민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나중에는 단지 내 차량이 늘면서 공원으로 활용하려던 중앙공간은 주차장으로 변해 처음의 설계 의도를 무색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날 저녁 공사를 준 감사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요정에 가서 술 한 잔을 멋지게 샀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억 소리가 나올 만큼의 돈을 반 강제로 집어주었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수지가 남는 장사가 아니라 대박을 터트린 것 아닌가. 잠실주공의 공사도 공사지만, 전국 모든 주공아파트는 모두 우리가 제작한 방화문을 쓰게 되었으니, 그 수요가 어마어마할 것은 불 보듯 훤한 사실이었다. 또한 이것이 전국적으로 자연스럽게 광고가 되어, 민간업자들까지 떼로 몰려들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수요를 감당할 생각으로,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한마디로 즐거운 비명이었다. 게다가 이를 실용신안특허까지 내놓았으니, 함부로 우리가 생산한 방화문을 카피하다가는 본보기로 몇 군데가 아작이 날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무역파트의 조동호 부장에게, 샤링기 및 절곡기 3대를 추가 주문하도록 했다. 공장이야 이 정도를 내다보고 처음부터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지어놨으니, 확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 외에도 금형이야 새로 입사한 금형 계장 아니, 이제 과장이 된 김춘택과 정원섭에게 맡기면 될 것이다.
문제는 또 신규로 인력을 증원해야 되는데, 구인광고를 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참으로 성가신 일이었다. 이 또한 즐거운 비명 아닌가. 아무튼 나는 곧 방화문 제작 공장 인원을 충원해야 했지만, 일단 보류를 하도록 했다.
내 마음 속에는 이미 다른 계획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중순이 되었다. 이제 서 이사는 워크맨까지도 국내의 특허출원을 마치고, 이제 워크맨에 대한 국제 특허 출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선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특허준비를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 김수근 소장도 서울로 사무실을 옮겼다. 광화문 앞 요지로 제법 넓은 곳에 둥지를 튼 것이다. 이곳의 월세를 내가 반부담하기로 했지만,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공사 한 건만 제대로 하면 그 몇 배 이상의 수익을 남길 테니까.6월16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현대건설이 지금까지는 단일공사로서는 세계 최대라는, 역사적인 주베일 항만 공사를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나 국내 신문에서는 한 줄도 보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신시설이 열악했던 당시로서는 이 사실이 뒤늦게 국내에 알려졌고,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느낌이 있었기에, 단신으로 처리됐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좋은 건수를 잡았다 생각하고, 이를 취재하여 기획시리즈로 몇 회에 걸쳐 연재할 생각으로, 그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그 일환으로 70년 당시 통칭 건설5인방으로 칭하는 현대, 대림, 극동, 삼환, 삼부 중 삼환기업을 택해 먼저 연재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이 업체가 우리나라 건설업체로서는 최초로 중동에 진출한 업체였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최 사장을 만나기 위해, 삼환기업 본사가 위치한 종로 운니동 사옥을 찾아갔으나, 그곳에는 그가 없었다. 프라자 호텔을 짓고 있는 현장에 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물어물어 태평로2가에 위치한 호텔 신축 현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도 나는 한참을 수소문해 헬멧을 쓰고 현장에서 이것저것 작업지시를 하고 있는, 그를 만나 볼 수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고 취재 협조 요청을 했다.
그가 기꺼이 응해 우리는 다시 장소를 본사 사옥 사장실로 옮겼다. 내가 첫 질문을 던졌다.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첫 지사를 세우고, 카이바~알울라 구간의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며 국내 건설업체로는 최초로 중동 지역에 진출한 업체로 알고 있습니다. 금번 현대의 주베일 산업항 수주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나라전체로 보나 우리 건설업체의 입장에서 보아도 큰 쾌거이지요. 우리나라 건설업체의 지명도가 전 세계적으로 높아질 테니까."
"그것은 공식적인 입장이고 개인적으로는 혹시 배가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솔직히 우리 회사가 따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우리는 전혀 정보도 접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배 아파 할 일도 아니지."
"보도가 된다고 너무 교과서적인 말씀만 하시는데, 그럼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요즘 짓고 있는 프라자호텔에 대해 묻겠습니다. 혹시 지으면서 불만족스러운 점은 없었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최 종환 사장이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설계에서부터 모든 것이 천편일률적 이예요. 호텔 같은 경우는 좀 더 미적 감각을 살려 외관이나 내부의 설비를 고급화 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런 면이 좀 부족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예를 들면 방화문만 해도 그래요. 무슨 색깔이 하나 같이 칙칙하고 무늬도 없는 단색 이예요. 그리고 게단 난간도 또 너무 천편일률적 이예요. 둥근바 아니면 요즈음은 조금 개선되어, 나무 기둥도 나오기는 합디다만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예요."
내가 갑자기 녹음기를 끄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방금 녹음기를 껐습니다. 사담이지만 이런 것은 어떤가 한 번 봐주시죠?"
그리고 나는 들고 간 내 서류가방에서 예의 그 앨범을 꺼내 펼쳐 보여주었다.
"한 번 넘겨보시죠."
나의 말에
'무슨 짓이냐?'
는 눈빛으로 나를 한 번 흘깃 살핀 최 사장이 덤덤하게 앨범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의 손동작이 점점 느려지며 흥미를 갖고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중간쯤 본 그가 물었다.
"이게 어느 나라 수입품이오?"
"그런 물건이 있다면 쓰실 의향이 계십니까?"
"물론이오. 당장이라도! 기 설치된 방화문을 다 뜯어내고서라도 이 제품을 사용하고 싶소."
'허허, 참 내.........!'
나는 내심 터져 나오는 즐거운 비명을 간신히 억제하고 말했다.
"제가 그 업체를 소개해드리도록 하죠."
"고맙소!"
새삼 나의 손을 잡아오는 최 사장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멀리 갈 곳도 없습니다. 당자이라도 만나드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와 지금 농담하자는 것이오?"
"사실은 제가 기자이기 전에 그것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업체의 사장이기도 합니다."
"뭐라고? 이 또 듣는 이 금시초문일세. 그런 업체가 있다는 걸, 왜 나는 모르고 있었을까?"
"생긴 지 얼마 안 됐으니,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하고 좀 더 넘겨보시면 다양한 계단 난간이나 발코니 제품도 만나보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요?"
나의 말에 따라 다시 앨범을 뒤적이기 시작하는 최 사장이었다. 잠시 후 난간을 살피던 그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흠..........! 이 역시 참으로 미관이 수려한 게 보기가 좋군요. 이 역시도 당장이라도 교체하고 싶소."
"제가 볼 때 별관은 몰라도 본관은 거의 완공 단계이던 데요?"
"내 체면을 위해서라도 당장 교체하고 싶소. 내 외국에서 수입하고 싶었지만, 나라가 달러 기근에 시달리니 소비재에 대한 수입허가를 내주어야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제가 인터뷰를 마치고 자세한 사항을 브리핑하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야 이쯤 하고 맙시다. 기자 양반이 적당히 각색하면 되는 것이니........."
"이제 금방 시작했는데 도요?"
"그게 뭔 상관입니까? 기자 양반이 알아서 적당히 쓰시오."
"그럼, 딱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다시 녹음기를 튼 내가 물었다.
"현대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앞으로 삼환도 중동으로 진출해야 활로가 트인다고 보지 않으십니까?"
"국가의 부족한 달러를 위해서라도 우리 회사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중동 수주에 사활을 걸겠습니다. 그 일환으로 나는 벌써 사우디지사에 비상근무를 명 했어요."
"지금까지 말씀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장시간 고맙습니다."
나는 여기서 다시 녹음기를 껐다.
"허허허........! 잘 써주기나 하시오."
"네, 사장님!"
"이제 본격적인 상담을 해볼까요?"
"말씀하시죠."
"이 프라자호텔뿐만 아니오. 지금 우리가 짓고 있는 태평로의 삼성 본관 사옥도 전부 방화문뿐만 아니라 난간도 교체를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단가니 뭐니 소소한 것은 제가 실무자와 상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오. 이번 건을 잘만 처리해준다면 앞으로 가자 양반 회사로 전 물량을 맡길 참이니까."
"우리가 창호는 물론 유리 공사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얄미울 정도로 계산적으로 나왔다.
"이번 건 시공하는 것을 봐서, 그것도 결정합시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오늘은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본인 역시 동감이오. 앞으로 우리 잘 해봅시다."
"네, 사장님!"
새삼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더니, 비로소 내게 명함 한 장을 건네는 최종환 사장이었다. 다음날 한국일보 경제면에는 이런 기사가 타이틀로 게재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중동진출 기업 삼환, 분투를 다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