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과 와이프-- >
내가 다시 깨어난 것은 고향 촌 동네의 저수지 제방 둑이었다. 내가 결정적으로 죽음에 이른 것은 교통사고 때문인데 문득 내가 정신이 들어 나의 처지를 인식했을 때는, 나는 동네 저수지 제방 둑에 엎어져 있었다.
나중에 제대로 인식을 하고 보니 초등학교 2학년의 몸이었다. 이 때 사실 전생에서도 죽음 직전까지 간적이 있었다. 우리 동네의 이 저수지는 제법 커서, 제방 가까운 곳은 수심이 굉장히 깊었다.
어른들의 키로 두 길이 넘었으니, 아이들 몸으로야 말할 게재가 못 되었다. 그러나 물이 유입되는 제일 윗부분은 물이 발목에 찰랑거릴 정도로 수심이 낮았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이곳에서 모두 수영을 배웠다.
한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이곳에서 살다시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말 그대로 수심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이 배도 들어주고 하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헤엄을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계는 한동안 수심이 낮은 곳에서만 논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진짜 수심
이 깊은 이 물을 횡단해 건너편 제방에 안착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수영을 할 줄 안다고 모두가 인정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전생에서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된 과정도 이 인증 샷을 받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긴장으로 온 몸이 경직된 가운데에서 저수지 물을 횡단하는데, 거의 제방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온 몸이 마비가 되며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물을 꼬르락거리며 물을 마시는 등 가라앉았다 떳다를 몇 번 반복하니, 동네 아이들도 변고가 발생한 것을 알았다. 이 때 나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는데, 선배 아이들 둘이 달려들어 나를 물가로 이끌어 낸 모양이었다. 안도하며 그나마 희미하던 내가 정신 줄을 놓았다가, 다시 찾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 생사지경의 순간으로 다시 회귀한 것이다. 그렇게 이생의 내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다시 전생으로 돌아가 이 사건 이후 나는 이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6학년 때 청주로 전학을 갔다.
이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러 들어갔는데, 마침 내가 청주로 전학을 가던 그 해에 전국 도청소재지 급 이상의 도시에서만은, 무시험 진학의 길이 열렸다. 소위 뺑뺑이라는 것인데 물레 같은 것을 돌려, 거기에 나온 숫자로 자신의 중학교를 배정받는 시스템이었다.
이후 나는 공부를 제법 잘해 충북에서는 명문인 청주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모충동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느라고 공부를 등한히 했다. 그래도 기본 머리는 있어 예비고사에 무난히 합격하고, 이 지방의 모 대학을 들어갔다. 오일 쇼크 시대를 맞아 자원의 소중함을 전 국민이 각성할 때라, 나는 이 대학의 자원공학과라는 곳을 비전이 있을 것 같아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전공을 들어가니, 석유니 뭐니 다른 자원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는 것이 없고, 오로지 석탄 캐는 채광학이 주요과목으로 대두 되었다. 염증을 느낀 나는 2학년 1학기만 마치고 휴학계를 내었다. 그러자마자 얼마 안 있어, 바로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77년 9월 달에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4주 뺑뺑이를 치고 나니, 서울 부근의 한 부대에 배치가 되었다. 여기서 전생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생에 있어서 어머니는 막내로 또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 번 생에서는 어떻게 일찍 공장 문을 닫았는지, 여동생 셋 밑으로는 남동생이 안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부모님의 속사정이니 자세히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아무튼 보병 병과로 이때부터 장장 31개월을 근무했다. 이때의 복무기간이 34개월이었다. 전만해도 꼭 년을 근무하던 것이 그래도 줄어서 이 모양이었다. 그런데 자대에는 나랑 비슷한 군번의 동기가 7명이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교련혜택으로 3개월을 먼저 제대하니, 부러운 정도가 아니라 배가 아파 모두 죽을 라고 했다. 이때는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어서 이를 고등학교 때부터 배웠다. 대학교 진학해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대학생들이 하도 교련반대 데모를 하자, 정부에서 낸 묘안이, 한 학기 당 1개월의 군 복무 단축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3학기를 마쳤으니, 당연히 3개월 일찍 제대할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5.18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80년 3월 달에 제대를 한 나는, 다시 복학을 기다리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이때 즉 9월 달 복학을 기다리며 놀 때 만난 사람이 전생의 와이프 최수빈이었다. 이제 제대도 했겠다 좋은 직장을 잡을 욕심으로 청주로 나와 토플 학원도 다니며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충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셨던 고모님이 하루는 내게 찾아와 선을 보라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제대는 했지만 아직 나이도 어리고 공부도 많이 남아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솔로로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외로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만나 마음에 들면 일단은 사귀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고모와 함께 모 다방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나는 장모 재목과 함께 긴 생머리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어른이 나가고 난 후, 둘은 대화를 하다가 끝 무렵에는 내가 애프터를 신청했다. 전생이나 이생이나, 짜장면과 짬봉 등 중화요리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애프터 장소 역시 본정의 모 중식 집이었다. 결국 최수빈이 응해 이때부터 그녀를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첫 식사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정말 짜장면을 좋아해, 짜장면을 시킨다고 물으니까, 거절한 것이 이채로웠다. 결국 볶음밥을 먹은 그녀였지만, 나중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초면에 짜장면을 시키는 경우는 상대 여자가 싫을 경우에 시키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짜장면을 먹다보면 입주위에 묻는 등 흉한 모습을 보고, 더는 만나지 않기 위한 구실이라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럴 듯했다. 어찌됐든 우리는 이후 만남을 지속해 나갔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라는 것은 항상 위태로워서, 자꾸 만나게 되니 정이 들고 친밀감이 더해져 어느 순간 손을 잡다는다던가, 키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단계에 이른다. 나는 거의 이과정도 건너뛰고 만난 지 채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녀를 적당한 구실로 꾀어, 자취를 하는 내방으로 불러들였다. 남녀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단둘이 만났으니,
사고치는 것은 당연한 귀결. 나의 위협과 반 읍소에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는 자동이었다. 다른 약속장소가 필요 없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내 방에서 만나 즐기며, 나는 어느새 복학을 해 학교에 다니는 학생신분이 되었다. 그때 그녀는 청주 공단의 모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위로 언니 하나와 밑으로 남동생 둘에 여동생 하나까지 5남매의 결코 작지 않은 가족이었던 그녀로서는, 재수1년 만에 대학의 꿈을 접고, 생활전선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우리의 만남은 지속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나는 그녀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나에게 고백하기를 임신 6개월이라는 것이었다. 기가 차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진즉에 얘기하면 낙태라도 시키지. 나는 매우 분개했지만, 아이는 내가 졸업 후에 갖자고 달래 산부인과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의사 왈, 산모가 위험하다고 그냥 낳으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양가에 알렸고, 서둘러 결혼 날짜를 잡았다. 이때가 3학년 학기 초로서 처녀가 시집도 안 가고 애를 낳을 수는 없어서, 3월말에 곧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의 소꿉장난 같은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첫 딸이 태어나고, 어느덧 나는 졸업반이 되었다. 당시 나는 이공대 학생장으로서 조금은 끝발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학과장의 추천으로 취업을 나갔다. 그곳이 청주에서도 멀지 않은 충주의 충주철산이라고 철광산이었다. 근무 환경이 석탄광에 비할 바 없이 좋았으나, 이곳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광량이 다 되었던 것이다. 공산품 같아야 어떻게 판로를 개척한다든가 아등바등 거려보지만, 캐 먹을 것이 없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폐광을 하기 전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내가 한 것이 신문사 지국이었다.
역시 한국일보를 했는데, 인수를 하고 보니 완전 개판이었다. 당시 돈으로 권리금 20만 원을 주고 산 것이, 막상 인수를 하고보니 장부상 부수는 거의 가짜고, 지대는 왜 이렇게 비싼지, 감해 달래도 해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한다고 해보았으나, 이것은 이 업종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소 14시간, 제대로 하려면 하루 16시간은 이 사업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럴 바에야 지랄했다고 남지도 않는 이 짓을 하는가 싶어, 나는 바로 이 신문업을 접어버렸다. 그리고 내가 취직을 한 곳은 금형을 만드는 공업사로서 직원이 채 이십 명이 안 되는 곳의 기술영업사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하나 둘 때어나 이년 터울로 벌써 3남매였다. 딸 둘에 아들 하나였다. 게다가 내가 집안의 장남이다 보니 동생들 건사도 해야 했고, 집안을 일으켜야 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곧 심경의 변화로 이어져 나는 새시대리점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월급쟁이로는 결코 내 야망을 만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내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어찌됐든 내가 신문사를 하면서 느꼈듯이, 뭐든지 사장 자신이 기술이 있어야 아이들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1년간의 기술을 배우고 마침내 창업을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 와이프만 데리고 하던 것이, 차츰 차츰 규모가 커져 IMF 직전에는, 일당으로 고용하는 인부까지 치면 직원이 근 30명 가까운 회사로 커졌다. 취급품목도 새시만 했던 것이 철물 단종까지 내어 취급하게 되었다. 호사다마라고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내게 IMF는 직격탄이자,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이때 내 일의 대부분이 아파트 공사였고, 또 어음으로 받아놓은 상태였다. 하루아침에 받아놓은 어음쪼가리는 휴지조각이 되었고, 건설업체는 줄도산을 시작했다. 청주의 건설업체 열 곳 중 하나 둘만 남기고 차례로 쓰러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저
희들이 자체적으로 서로 연대보증을 선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한 업체가 부도가 나면 그 업체에 연대보증을 선 업체에게 그 채무가 고스란히 돌아오고, 이것이 하나 둘이 아니고 몇 개씩 엎치고 덮쳐놓으니, 웬만한 업체는 다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내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쌀이 떨어져 라면으로 연명하는 것은 예사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 학비와 자잘하게 들어가는 돈은 또 어쩌란 말인가. 잘 나가다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극단적으로 몰리니 사람이 회피하려는 생각부터 들었다. 곧 자살충동이었다. 별의별 자살 방법을 다 떠올리다가 마침내 나는 어느 날 대청댐이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술은 잔뜩 취해 몸은 연신 휘청이고 있었고, 내 손에는 먹다만 소주 됫병이 들려있었다. 그러나 막상 뛰어내리려고 하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촌에서 아직도 땅을 파고 있는 늙은 부모와 자식새끼들이었다. 결국 이들 생각에 죽지를 못하고, 나는 앉은 자리에서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아무튼 나를 결정적으로 자살로 몰고 가게 된 데에는, 경제적 이유 외에도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마누라가 바람이 났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마누라도 생활전선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그것이 보험 업종이었다. 처음에는 괜찮더니 나중에는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몸에서는 생전 뿌리지 않던 향수 냄새와 함께 술 냄새까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나에게 여기저기서 결정적인 제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그래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혼을 결심하고, 그녀와 함께 이혼에 대한 논의를 했다. 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그랬더니 마누라는 두 말 않고 승낙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배신감이란, 처음으로 마누라가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만큼이나 나에게 데미지를 입혔다. 이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먼 먼 남쪽 지방으로 내려와 신문사 총무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착같이 아끼고 벌어, 아이들을 하나씩 대학까지 보내, 모두를 다 졸업을 시켜 직장을 잡게 했다. 그러고 나니 객지에는 덩그라니 나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신문사 일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부모님의 팔순 잔치를 맞아,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압류되어 팔아먹지도 못하는 고물 자동차를 몰고, 고향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에 의해 이 세상을 하직 하게 되었다. 이때 하나의 의문이 명희의 존재였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어, 이생에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는데, 이 생애에 갑자기 돌출된 사건이었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한마디로 세상은 요지경이고, 알 수 없다는 말만 되 뇌일 뿐.
어찌 됐든 결코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반추하는 내 눈은 눈물로 흥건했고, 베개는 젖다 못해 소금기에 절었다. 이때 잠에서 깨어난 미정이 내게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물었다.
"당신 울어요?"
"아니, 감기 기운이 있나봐.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데........."
"그러니까 여보, 찬물로 샤워하지 말아요."
"알았어, 알았어! 잠이나 자!"
"네!"
다시 돌아눕는 미정을 보고 나는 누구랄 것도 없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지금 내가 꾸고 있는 것이 꿈이라면, 제발 신이시여! 영원히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게 하소서!'
게 하소서!'
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