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102화 (102/322)

< --트로이카 체제-- >

그로부터 열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정말 바빴다. 사업도 사업이지만 일주일 동안 중간고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최현우와 김진태가 착실하게 기록해 놓은 노트를 빌려다가, 필요한 부분만 밤을 새워 달달 외웠다. 어느 교수는 아예 시험예상문제를 찍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딱 몇 가지만 찍어주는 게 아니라 다섯 문제가 출제되면 열 문제 정도를 가르쳐주어서, 그 안에서 시험문제가 출제되는 식이었다.

아무튼 그럭저럭 무난히 중간고사를 마친 나는 그간 미뤄진 일 처리를 위해서 분주하게 뛰어야 했다. 우선 사업상 그간의 변화를 살펴보면, 럭키 측과 실리콘 공장문제는 세부 계약을 체결했고, 장강재 사장에게 부탁한 세 업체의 대리점 계약도 이미 체결되었다.

즉 포항제철의 철판과 각재 등 방화문 제작에 필요한 자재를 싸게 구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부산 파이프로부터는 스텐 봉재, 또한 삼미금속으로부터는 스텐 판

재를 싸게 구매할 수 있는 토대를 대리점 계약으로 구축했다. 스텐 제품은 철물 일에 필요한 제품이자, 그들이 사가는 주요 구매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특기 사항은 조립식 한 동이 마저 완공되어 전자와 무역의 사원들이 입주했다는 사실이었다. 건물 전체의 2/3를 전자의 연구원들이 사용하게 했고, 단출한 무역 파트는 1/3을 사용하게 했다. 또 텔렉스도 들여와 남의 사무실을 기웃거리게 하는 창피를 면하게 했다.

또 무역부분에서는 시멘트건에 한해 대만의 한 업체와 계약을 체결해 그들의 우리가 요구하는 수량만큼 대납하기로 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항은 대우현장의 새시 조립을 끝낸 청주 팀이 서울로 올라와 이제는 현장 시공에 착수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숙식은 기 언급한대로 미리 지어놓은 기숙사 동에서 해결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점심은 오가는 시간의 로스를 줄이기 위해서 현장의 함바 식당에서 먹도록 조처했다.5/1 토요일. 오전 8시 5분.

나는 각 공장 간부들의 조회를 끝내고 무역의 두 사람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두 분도 느끼셨죠?"

"네!"

"이렇게 단가가 박하니 지금까지 찬밥대우를 받고, 이곳저곳을 굴러다닌 것 아닙니까?"

"저희들도 미처 그 부분까지는 헤아리질 못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많은 부분에서 대리점을 가지고 있어, 그래도 꽤 이윤 추구가 가능하지만, 대리점이 없는 물량은 하여튼 현찰을 주어 최대한 싸게 구매하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 분도 제 말을 명심하시고, 가능한 최고의 품질에 최저가 매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주세요."

"네, 사장님!"

"그런데 사장님 문제가 좀 있지 않습니까?"

조동호 부장의 말에 나는 눈썹을 찡긋하며 계속 말하라는 뜻을 전했다.

"이젠 상호도 가나실업에서 바꾸어야 할 것이고, 또 제가 보는 견지에서는 경리 부분 특히 세무 부분에서는 제대로 된 관리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회사의 체계도 그렇습니다. 모두 사장님 개인 명의로 되어 있는 것 같던데, 이러면 종합소득세에서 엄청 두르려 맞을 공산이 큽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불리한 점은 개인 명의는 사업 상 거의 무한책임이라는 것이죠."

"법인의 대표 이사와는 책임이 현저하게 다르죠. 하고 주식회사는 엄연히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부도가 나거나 하면 사라지면 되지만, 개인기업체는 계속 쫓아다니며 사장님을 괴롭힐 것입니다. 이 외에도 기업이 커지면 주식회사로 전환 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 많을 것입니다. 한 번 고려해 보심이.........."

"흐흠........! 상당부분에서 조 부장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혹시 경리는 물론이고 세무 행정에도 능한 관리자로 누구 추천할만한 사람 없어요?"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지금부터 한 번 알아봐야죠, 뭐."

"두 분 다 신경 써서 한 번 알아봐 주세요."

"네, 사장님!"

나는 이들과 대화를 끝내고 전자 파트의 연구동으로 향했다. 처음 입주할 때는 정리를 해서 깨끗한 것 같더니, 연구에 매진하자 또 사방이 산만해져 있었다. 이곳은 전자제품을 테스트 또는 종합 시연해 해볼 수 있는 공간이고, 각자는 자신의 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여진원'이라는 아크릴 이름표 앞에서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도 어정쩡하게 일어서서 연구하던 제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여 선배였다.

"수고 하십니다. 선배님!"

"아, 어서 오시게. 강 사장!"

나나 여 선배나 서로의 호칭이 어설펐다.

여진원도 분명 '수석연구원'이라는 타이틀이 있음에도 나는 선배라고 불렀고, 여 선배도 내게 하오체에 '님'자가 빠져있었다.

"연구는 잘 되고 있습니까?"

"이게 어디 하루 이틀에 성과가 나는 것이야 말이지. 거기 앉으십시다. 무슨 일로?"

"영상반주기의 연구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죠?"

"처음에 우리가 얘기한 대로 워크맨을 끝내고 나서, 아니면 골 아플 때 틈틈이 하는 것으로 하지. 아무튼 빠른 시일 내에 큰 진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큰 무리가 있지 않을까?"

"제가 볼 때 워크맨은 일단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의 특허출원과 함께 제품화를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슬림화라든가 이어폰은 계속 연구하는 것으로 하고, 동시에 영상반주기도 일부는 연구를 병행했으면 좋겠어요. 선배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사업적인 측면이야 나는 잘 모르지. 그런 것에 우리가 능했다면 과연 우리가 강 사장 밑에 있으려 했을까? 그런 부분은 강 사장이 알아서 판단해 줬으면 좋겠어."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선배님이 협조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뭔데?"

나의 말에 별 감흥 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간단하게 묻는 여 선배였다.

"선배님이야 연구에 전념하셨으니, 그렇다지만 선배님의 동기 중에는 일류 회사의 뛰어난 관리자로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정부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 삼성이나 금성사의 과장으로 근무하는 놈도 있고, 빠른 놈들은 차장이 된 놈도 있을 걸. 그리고 고등학교 동기 중에는 사시, 행시, 외시에 패스해서 사무관이상으로 근무하고 있는 놈들도 있지."

"그런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특허를 내거나 세무행정 또는 우리의 연구 성과를 제품화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만한 분이 있으면 포섭 좀 하시죠."

"며칠 말미를 주시게. 사회생활에는 열등생이라 그들을 포섭할 능력은 없고, 그럴만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내 모아서 강 사장에게 제공을 할 테니, 알아서 포섭을 하던지 스카우트를 하던지 하시게."

"그렇게만 해주셔도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용건 다 끝난 것인가?"

"하하하.........! 알겠습니다. 추방령보다 더 무섭습니다."

"밥값을 하자는 것뿐일세."

내가 있거나 말거나 의자를 돌려 고광도 전원 밑으로 고개를 묻는 여 선배였다. 확실히 연구원들이라 그런지 괴짜는 괴짜들이었다. 나는 이렇게 순수한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방화문 공장이었다. 나는 각 공정에 따라 칸막이로 나누어진 곳 중에서, 첫 번째 공정이 진행되는 곳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막 철판이 샤링기에 의해 규격에 맞게 절단이 되어 나오고 있었다. 4'x8' 크기의 철판을 일반 규격용(통상 외경 900x2,100)으로 제작하기 위한 사이즈로 계속해서 절단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인부가 이것을 가져다 놓으면, 또 두 사람이 기 제작된 지그로 마킹을 했다.

이것이 다음 공정을 위해 다음 칸으로 옮겨졌다. 내가 옮기는 인부들을 따라 들어가니, 그곳에는 대형 유압프레스가 설치되어 있어, 마킹된 열쇠구멍 부분을 정확히 펀칭하고 있었다. 발로 작동 버튼을 누르자 유압에 의해 자동되는 프레스가 내려와 순식간에 철판을

내려치고 올라간다. 그러면 기 설치된 금형에 의해 구멍이 뻥 뚫린 철판이 치워지고, 새로운 철판이 금형 위로 올려지는 식이었다. 또 격리된 다음 공정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대형 절곡기가 설치되어 있어, 비로소 방화문 형태를 띤 작업을 하고 있었다. 즉 기 마킹된 철판을 절곡기에 올려놓고 발로 버튼을 누르면, 철판이 마치 종이짝 접어지듯 꺾이며 90도 각도로 접혀졌다. 이 공정이 끝나자 힌지 구멍이 뚫린 상하의 마감철판을 접어진 방화문에 덧대어 최종 조립하는 용접공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고열이 발생하며 마치 번개가 치듯 치지직 거리는데 이를 오래 바라보면 큰일이 난다. 마치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 아프고 쓰라린 것은 물론 눈이 퉁퉁 붓고 하여튼 큰 고생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용접공은 항상 보호 장비를 착용내지는 사용해서 용접을 해야 하는 것이 철칙이다. 우리의 작업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손에는 석면 장갑을 끼고, 한손에는 용접바가지로 불꽃을 가리며 용접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용접을 지켜보던 내가 시선을 들어 다른 곳을 보니, 그곳에는 기 상기의 과정을 거친 방화문의 프레임 즉 외곽 틀이 또 용접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공정으로 아줌마들이 완성된 방화문을 닦아내고 있었고, 아저씨들은 그라인더로 녹이 있는 부위를 제거하고 있었다.

사실 철판에 묻어 있는 기름기를 제거하거나, 조금이라도 녹이 난 부분이 있으면 제거하는 공정은 원래는 도장집에서 해야 옳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 작업을 안 하고 방청페인트를 칠하면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 기름기가 있는 부위는 착색이 덜 되어 제일 먼저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슨 부위는 금방 손으로 만져 봐도 질감이 틀릴 정도로, 그 부분이 도드라지게 되어 있었다. 아무튼 이제 이것에 페인트칠 마감을 하면 제대로 된 방화문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작업 공정은 여기서 끝이었다. 나는 기존 철물 부원들이 진행하고 있는 작업공정의 시찰을 마치고 나오며 생각을 했다.

지금이야 펜스 설치를 마친 이들이 특별한 일거리가 없어서 최 차장의 지휘아래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나중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철물 일을 수주하면 이들은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화문만 전담해서 제작할 수 있는 인원도 곧 뽑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다시 다른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막 그곳을 떠나려는데 아까는 안 보이던 최재의 차장이 정면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세요?"

"누가 스텐 판을 사러 와서........."

"그런 것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겨야지요."

"평소에는 담당이 있었으나, 제가 다른 일을 시키는 바람에........"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텐판 얘기하셨죠."

"네!"

"잠깐 나 좀 봅시다."

"네!"

나는 급히 최 차장을 이끌고 내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다른 급한 일에 치여 잊고 있었던 것이 최 차장과의 대화에서 떠올라, 그를 데리고 사장실로 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 앉으세요."

나는 최 차장을 소파에 앉게 하고 급히 이면지와 볼펜을 가져와 몇 가지 그림을 쓱쓱 그려나갔다. 완성된 그림을 본 최 차장이 물었다.

"이게 뭡니까?"

"내 말 잘 들으세요. 한마디로 계단데스리(난간)의 각주(角柱)를 그린 것인데, 일반 봉재를 사용했을 때보다는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비로소 그려진 모양을 자세히 살피는 최 차장이었다. 내가 그린 그림은 별것 없었다. 조립했을 때 사면체의 중간 부분이 요(凹)자 형태로, 사면이 굴곡 되어 있는 그림이었다.

"아, 정말 멋있는데요!"

"그렇지요? 이 모양 역시 방화문 절곡하듯 하면 나옵니다. 가능하겠지요?"

"몇 번의 시행착오만 거친다면 금방 만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계단난간으로 대 유행을 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 고급스럽게 하려면 가로로 이 모양을 눕혀 용접하고, 상하의 홈에다 유리도 끼울 수 있겠죠? 그것도 칼라 유리로."

"그럼요, 그러면 더 멋진 그림이 되겠습니다."

"하하하........! 이것을 실용신안 특허를 내 우리만의 전유물로 삼아. 이 분야는 우리가 독보적인 업체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또 있습니다."

"뭔데요?"

"그것은 방화문에 대한 것인데, 나중에 내가 그 결과를 가지고 보여드릴 테니 , 그때 한 번 보십시오."

"사장님은 천재입니다. 천재! 기가 막힙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우리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됩니다."

말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최 차장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최 차장에게 그린 그림을 던져주며 그 모양 그대로 절곡을 해보라 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물러나자 나 스스로도 대견스러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90년대에 유행하던 것을 미리 카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의 경험과 관찰력이 없었다면 쉽게 떠오를 수 없는 아이디어였기에, 나 혼자 자족의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