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94화 (94/322)

< --성공의 셋째 계단-- >

"내 어느 신문사인지는 몰라도 전면 광고를 일 년에 걸쳐 내겠소이다."

"성의가 없습니다. 어느 신문사인지도 모르고 광고를 내겠단 말이오? 비서 아가씨에게 듣지 못했소?"

"아, 한국일보라 했지! 실례했소이다."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얘기네요."

"내 처음부터 얘기하지 않았소. 원하면 돈을 주겠다고."

나는 비로소 돌아서서 조명재 전무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한국일보에 전면 광고가 내겐 무슨 도움이 되죠?"

"그야,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게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게 투자를 하고 도움을 좀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죠."

"제가 알기로는 럭키에서도 하이새시에 이어 실리콘 공장도 세우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건........! 사내의 기밀인데,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지만 맞긴 맞습니다."

"제가 그 실리콘 공장을 세우려하는데 도움을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입니까?"

"럭키도 단독으로는 실리콘 공장을 설립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세계적 화학회사인 다우케미컬과 합작회사를 꾸려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제 지분율을 50% 확보해주십시오."

"정말 어려운 문제로군요. 사실 내부적으로 양사와 어느 정도 협상이 진척되어 50:50 비율로 회사를 설립하려는 단계까지 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손을 떼라는 이야기인데........."

"다우케미컬이 아니라 더 정확히는 다우(Dow)와 코닝(Corning)의 합작사인 다우코닝(Dow Corning Co.)이겠지만, 그곳이 40%, 럭키가 10%, 제가 50% 지분을 소유하는 형태로, 협상력을 강화시켜 주십시오."

"그것은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군요. 결국 윗선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 일이므로, 시일이 좀 걸리겠습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가타부타 언급을 않고 내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했다.

"그리고 이것은 청이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만, 청주에 하이새시 충북 대리점과 서울 강남 대리점을 제게 내주십시오."

"말씀을 너무 쉽게 하십니다만, 그 문제만 해도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로군요."

"제 능력을 의심하시는 모양인데, 실사를 하셔도 좋습니다. 공장을 설립할 충분한 자본력을 확보하고 있고요, 이미 저는 청주와 서울 강남에 동양강철 대리점은 물론 한국유리 대리점도 확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습니까?"

비로소 어두운 안색에서 밝은 안색으로 전환되며 한 무릎 다가앉는 조명재 전무였다.

"전무님이 직접 오셔서 확인해 보셔도 좋고요, 아니면 밑의 부하들을 보내 실사를 하셔도 좋습니다."

"좋습니다. 하이새시 대리점 문제는 실례지만 제가 실사를 통해 여건이 된다면 인가를 내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실리콘 공장 지분 문제만은 제 판단의 선을 넘는 문제이므로 본사와 협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보는 실리콘 공장문제는 이렇습니다. 제가 단독으로 협상을 해서 세울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솔직히 아직은 대정이라는 상호가 럭키라는 상호에 비하면 태양과 빈딧불 만큼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그 상호를 이용하려는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혀 지분 참여도 않고 남에게 자신의 상표를 빌려주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찌 되었든 전국적으로 불매 운동이 일어나 금성의 전자제품이나 럭키의 소비재 전체가 일대 티격을 받는 것보다는 나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알겠습니다. 본사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결과를 알려드리죠."

"이게 모두 벌써 가판까지 떠놓은 상태라 저도 하루 이상은 막기 어렵고요. 또 회사에도 기사를 취소할 명분정도는 줘야 되니, 한 달 정도의 전면 광고 정도는 게재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본사에 보고한 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제 명함입니다. 만약 익일 18시까지 좋은 결과가 없다면 바로 가판 떠놓은 것이, 전국 제1의 매체에 기사화 되는 것으로, 알고만 계시면 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조 전무가 내가 내민 명함을 허리까지 굽혀가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럼, 이만!"

나는 더 이상 지체치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다음 날 17시 55분 이었다. 즉 5시 55분에 청주 사무실 사장 직통 전화로 전화가 왔다.

"네, 강 대정입니다."

"저 조명재입니다. 이제야 결론이 났습니다. 뵐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제가 회사로 찾아뵙지요."

"감사합니다!"

나는 즉시 차를 몰고 청주공단 내 향정동에 위치한 럭키화학 청주공장 전무실로 향했다. 만나자는 것을 보니 나쁜 소식은 아닌 것 같아서, 내심 기분이 흐뭇한 상태였다. 나는 곧 조 전무의 방으로 비서에 의해 안내되었다.

"이쪽으로........"

얼른 일어나 내게 자리를 권하는 조명재 전무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금속 테 안경을 쓰고 있는 이 사람은, 내가 보기에 상당히 강단이 있는 인물로 비춰졌다. 내가 소파의 방석에 소리가 나도록 힘주어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결론이 났습니까?"

"우선 강 기자님이 제시한 건에 대해서는 일단은 다 들어 드리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럭키를 위해서는 천만다행인 결론이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래도 설명 드리려 했습니다. 우선 실리콘 공장 건은 당 회사가 지분을 전혀 안 가져도 당 회사의 상표를 쓰게 함은 물론 50%의 지분을 내부적으로 양도하겠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그리고 대리점 건은 서울 본사 팀의 실사 결과 자본이나 모든 면에서 충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광고 건은 회장님의 특별지시로 6개월 간 전면광고를 싣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첨삭할 것 없는 대만족이나 럭키가 이번에 많은 손해를 입을 것 같습니다. 해서 제가 다우코닝쪽과 지분 문제를 한 번 거론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 기회를 한 번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다 된 밥에 코 빠뜨리자는 게 아니고요. 단 1%라도 럭키 쪽에 지분을 챙겨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결코 럭키로서는 손해 볼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문제 또한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니니, 상부에 거론해서 한 번 가능한 방향으로 결론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젠 제가 보은을 할 차례로군요. 혹시 하이새시를 담당하는 최고위직을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조 전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 스스로 방문을 열고 여비서에게 직접 지시를 했다.

"오현장 부장 있으면 들어오라고 해."

"네, 전무님!"

이렇게 해서 둘이 차를 마시고 있는데 한 인물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이 역시 금속 테 안경을 쓴 아주 핸섬하게 생긴 40대 중반의 인물이었다.

'럭키는 인물을 보고 승진을 시키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조 전무나 방금 들어온 부장 역시 잘생겼다.

"부르셨습니까? 전무님!"

"네, 거기 좀 앉아요. 앞에 계신 강 기자님이, 오 부장에게 할 말이 계시다고 해서."

"알겠습니다."

즉시 주변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나를 향해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오 부장이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지금의 하이새시는 백색으로만 발매가 되고 있죠?"

"그렇습니다."

"하고 제가 아는 견지에서는 하이새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열에 약하다고 해서 외부창틀로는 부적격이고, 내부의 목문을 일부 대체해서 팔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지금은 PVC이중창도 많고 PVC창호가 외부로도 많이 시공되고 있으나, 당시 일반인들의 인식은 날씨 변화에 취약해 외부 창으로는 절대 PVC창호를 시공하지 않을 때였다.

"그렇다면 알루미늄 새시와의 싸움이 아니라 목문과의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굳이 백색만 고집하십니까? 목 무늬 새시를 개발해 판매해 보십시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불티나게 팔릴 것입니다."

실제 내가 권한 제품은 90년대는 물론 2,000년대 중반까지도, 한때 대세를 이룬 제품이기도 했다.

"아, 그렇군요. 우리는 왜 진즉에 그 생각을 못했지?"

"하하하.........! 모든 것은 사소한 변화에 의해 시장의 판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오 부장은 얼른 강 기자님에게 감사의 인사드리고, 알려주신 목 무늬 제품을 하루라도 빨리 시장에 출시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무님!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저는........."

꽁무니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마음이 급해서 엉거주춤 일어나 내 눈치만 보고 있는 오 부장이었다.

"제 볼일은 다 끝났습니다. 거기에 밤색이나 청색 창 등 다양한 색상도 고려해 보십시오. 큰 재미는 보지 못할 것이나. 목재를 대체하는 데는 아마 일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기자님! 그럼 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조 전무에게 목례를 해보이고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가는 오 부장이었다.

"제가 조 전무님에게도 하나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앞으로 오폐수를 공장 내에 화공약품 처리는 물론 집수조를 설치하여 방류하시되, 최종 방류 과정에는 큰 독을 만들어 그 안에 물고기를 기르십시오. 혹시라도 물고기가 죽으면 절대 방류해서는 안 되는 물이니, 방류하면 안 되겠고, 그렇지 않으면 방류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아, 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오폐수 한 번 잘못 버렸다가 씹겁한 조 전무가 달려들 듯 반색을 하며 당장이라도 지시를 내릴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언제 자리 한 번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 전무와 정중히 악수를 나누고 당당하게 방문을 걸어 나갔다. 곧 후속조치가 이루어졌다. 나는 관리과장을 보내 럭키 측과의 각종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등한히 했던 학교 수업에 열심히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일찍 수업을 마치고 막 집으로 가려는데 청주동기 최현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너는 동아리도 하나 가입 안 하고 학교생활을 마칠 생각이냐?"

"너는?"

"나는 우리 과 학생들이 주로 주축이 된 '전초기지'라는 동아리에 나가고 있다."

"뭐 하는 모임인데?"

"기초전자 기술부터 고급 전자기술에 이르기까지 연구하고 시험해 보는 모임이지. 때로는 졸업한 선배들의 자문과 후원을 받기로 하지."

그의 말에 내 머리를 얼핏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일본에서 반사유리와 함께 수입되어 서울 내 방에 방치되다시피 있는 가라오케 반주기였다. 나는 이것을 좀 더 한국적으로 만들고, 지금의 노래방 기계 정도로 개량하고 싶은 욕심에 수입을 해오기는 했으나, 마땅히 이를 의뢰할 곳을 찾지 못해 아직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기계였다.

나는 마지못한 척 최현우의 손에 이끌려 이 동아리에 가입을 했다. 그리고 이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4학년 선배에게 내 애로사항을 토로하고, 자체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는 선배들을 소개 받을 수 있었다. 이 동아리의 회장 역시 욕심을 내어 자신들이 이 문제를 맡고 싶어 했으나, 솔직히 나는 이들이 신뢰가 가지 않아 그 사람들을 소개 받은 것이다. 내가 동아리 회장의 소개로 찾아간 곳은 청계천에 위치한 한 허름한 지하 셋방이었다.

전기세는 아깝지 않은지, 대낮같이 불을 밝힌 가운데, 온갖 전자부품과 회로기판이 난장판을 이룬 속에서, 머리는 얼마나 감지를 않았는지, 떡 지고 새집을 지은 사람들 세 명이 내가 들어와도 모르고, 무엇에 열심히 매달려 있었다. 내가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어? 누구시오?"

고개를 들어 묻긴 했으나 손에는 소형 전자제품을 여전히 들고 있는 상태로, 코끝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그대로 쓴 채의 물음이었다.

"전초기지 박 선배로부터 소개를 받은 일학년 생 강 대정이라 합니다."

"어, 그래요? 누추하지만 자리에 앉읍시다."

대표로 그 두터운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사람만이 곧 주저앉을 것 같은 앉은뱅이 의자로 나를 안내했고, 나머지는 또 고개를 숙여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어쩐 일로.........?"

후배라니 반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초면이라 어정쩡하게 묻는 선배였다.

"세 분만이 이 일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오. 총 7명인데, 다 이일에 매달린다면 연구자금은 누가 대고, 밥은 어떻게 먹고 삽니까? 나머지 네 명의 회원은 회사에 나가며 가끔 나타나, 이 일에 조언을 하는 정도지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선배님은 아주 이 업계에서는 유명하신 분인가 보군요."

"그건 무슨 말이오?"

"제가 이름을 밝혔는데도 너무 비싸게 구니까, 그렇지요."

"하하하........! 그랬소? 나는 바로 갈 줄 알고. 여 진원(呂 眞元)이오?"

"특이한 성씨네요."

"그렇소. 무슨 일로.........."

"제가 제시하는 아이디어 하나 연구해 주시겠습니까? 연구비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일단 그 내용이 뭔지 알아야지."

"제가 내일 들릴 때는 견본품도 있으니 , 그 제품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더욱 좋고."

"일단 오늘은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그 물건을 들고 와서 구체적으로 상의하는 것으로 하죠."

"그럼, 그럽시다. 멀리 안 나가오."

"네, 선배님!"

용건이 끝나자마자 바로 추방령을 내리는 여 선배였다. 나는 그 길로 바로 퇴근을 해 공장에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