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수정 이라는 이름-- >
나는 아무 말 없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때 만해도 차가 귀한 시절이라 교수들도 마이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가물에콩 나듯 하나씩 있는 학생들의 차도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었다. 훗날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내가 화가 나서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하자, 황수정이 뒤에서 소리쳤다.
"야, 같이 가야지. 강 대정!"
"빨리 따라오기나 해."
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정말 화가 난 것이다. 이런 개망신이 어디 있나? 아무리 유명한 계집아이라도 학교까지 쫓아오고 말이야. 내가 정말 화가 난 것을 안 황수정도 아무 말 없이 나를 쫓아왔다. 이윽고 주차장에 도착한 내가 소리쳤다.
"타!"
조수석 문을 열러주고 타라하니 군말 없이 타는 황수정이었다.
나는 거칠게 차를 몰아 교내를 빠져나왔다.
"어디로 갈 건데?"
"내 마음이야."
"그러지 말고 화 풀어. 그런데 이것 네 차니?"
"하나 샀다."
"나보다 낫네. 거랭뱅이가 용 된 거야, 뭐야?"
"너, 말조심 안 해!"
"너나 말조심해. 누나보고 꼬박꼬박 반말에 소리까지 질러."
어이가 없었지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고 해서 나는 말대꾸를 않고 그냥 차만 몰았다.
"어디로 가는데?"
"너 납치해서 자빠뜨리러 간다."
"그것도 좋지. 탈출구가 필요한데."
"뭐? 뭔 말이야?"
"요즈음 우리 꼰대가 돌았는지, 글쎄 서른 살도 넘은 아저씨와 데이트를 하란다."
"너를 팔아먹겠다는 거야, 뭐야?"
"그런 셈이지. 사업은 어렵고, 고놈의 자식 애비 일을 하청 받아서 하는데, 그나마도 끊길까봐 전전긍긍 하나봐."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는데?"
"내가 미쳤냐? 그런 놈 씨하고 놀게. 그런데 한마디로 잘났기는 잘 났더라. 인물도 인물이지만 노는 물이 달라."
"만나봤나 보네."
"몇 번."
"그런데 나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
"네가 약속을 어겼잖아?"
"비켜가지 말고."
"네가 하던 신문사에 전화 걸어봤다. 너에 대해서는 훤히 꿰고 있더라. 공대에 합격한 거며, 뭐 또 몇 가지 사업을 한다고 하드만, 무슨 사업인지는 관심이 없어서 잊었다."
"그래서 학교로 몇 번 찾아왔다는 이야기고?"
"그래. 화, 수 연짱에다가 토요일까지 세 번을 찾아왔다가 다 허탕쳤다."
"내가 안 나온 날만 골라 왔네."
"나는 네가 일부러 나오고서도 나를 피하는 줄 알았지?"
"내가 너를 뭐가 두려워서 피해?"
"내 생각이 그랬다는 말이지. 이젠 화 좀 풀렸냐?"
"풀리나마나 나 쪽팔려서 학교 어떻게 다니냐?"
"나 같은 유명인이 쫓아다니면 영광인 줄 알아야지. 쪽팔리긴?"
"그건 네 잣대로 재단한 거고. 에이 정말.........!"
"그럼? 너는 내가 싫으냐?"
"싫고 좋고 가 이제 없다."
"무슨 말이야?"
"나 얘가 하나에다 마누라가 둘이다."
"정말이야? 너!"
".........!"
"푸 하하하.......!"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자, 남자처럼 웃는데, 그 웃음이 분노인지, 허탈함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웃음이었다. 그녀의 웃음이 가라앉자 차분한 음성으로 내가 말했다.
"한때는 네가 좋아 쫓아다니던 놈인데......... 숨기고 싶은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제 부적격자가 되었으니, 고백을 해야지."
"나쁜 놈! 차 세워!"
"기분도 꿀꿀한데, 술이나 한 잔 빨자."
"술? 좋다!"
"교외로 쏜다?"
"좋다! 나도 정말 요새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
여기서
'우리 어디로 갈까?'
묻는다면 연애 초보다. 여자는 리드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마치 깡패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여자의 심리처럼. 미정이와 명희도 그 짝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말없이 좀 더 속도를 내어 달렸다. 어느덧 경부선 서울 톨게이트도 지났다. 그제야 불안한 생각이 드는지 황수정이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데?"
"기분도 그런데 바람 좀 쏘였다가."
"먼 곳은 안 돼."
"그렇게 멀지는 않아."
이때 이미 나는 목적지를 마음속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곳인지 숙녀에게 행선지를 말해주는 게 예의 아닐까?"
"숙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볼 때 너는 계집이 아니라. 선머슴아 같아, 처음에는 외모에 혹하지만, 어지간한 남자는 네 옆에 어리대도 못해."
"호호호........! 그 말 맞긴 맞다."
"그래도 나 오늘 만은 숙녀 대접 받고 싶다."
상대의 말을 유난히 관찰하다 보면 '나'라든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유난히 많이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의 대부분은 자존심이 세고, 그만큼 고집도 센 사람임에 거의 틀림없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거, 되게 궁금하게 하네."
"유원지야. 주변에 식당도 많고 여관도 꽤 있어."
"거기에 여관이 왜 들어가는데?"
"그렇다는 말이지."
"아무튼 빨리 달리기나 해라."
"다 와 간다."
나는 수정이 물을 때마다 그 소리만 하며 결국 신갈 인터체인지에서 수원 방향으로 꺾어들었다.
"수원 가냐?"
"그래, 다 와 간다."
"오늘 그 소리만 수십 번째. 이젠 질린다, 질려."
"진짜 다 왔다."
나는 곧 원천유원지로 방향을 틀어 진입을 시작했다. 그리고 못 미쳐 원천가든 이라고 쓰인 자갈마당에 차를 주차시켰다.
"아이고, 허리야! 간만에 차를 탔더니, 허리가 다 뒤틀리네."
내리자마자 온 몸을 비틀며 몸을 푸는 황수정이었다.
"들어가자."
"오늘 네가 사는 거지?"
"그래."
"가난뱅이가 졸부가 되었나? 생색내기 딱 좋은 곳으로 선정했네."
"너는 말을 그 따위로 밖에 못 하냐?"
"사실이 그렇잖아. 몇 년 아니 저 작년만 해도 빵 값이 없어 빌빌거리던 게 너 아니었어?"
"밥 맛 없는 소리만 골라하고 있네. 모른척하고 그냥 얻어먹으면 어디가 덧 나냐?"
"히히히.........! 모처럼 아옹다옹 하는 것도 재미있네."
나를 따라 들어오며 주절거리는 황수정이었다.
"대학 들어가면 좀 변할 줄 알았더니 전혀 안 변했다. 너!"
"그러냐? 개 꼬리 삼 년 묻어 황모 된 다더냐?"
"어서 오세요. 이 방으로 들어가세요."
알아서 우리를 방안으로 들이는 안경을 낀 삼십대 후반의 주인아주머니였다. 우리는 말없이 주인이 안내하는 대로 방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등심 3인분 하고 소주 좀 주세요."
"네. 곧 갖다 드릴게요."
주인이 나가자 수정이 말했다.
"부자놀이 하는 길에 양주로 사라. 소주가 뭐냐?"
"취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뭐 하러 비싼 것 먹냐?"
"그럼 소고기는 왜 먹어?"
"육질이 틀리고 영양이 틀리잖아."
"마찬가지야. 우리 양주로 하자, 응?"
"너 데려가는 놈은 이래저래 피곤하겠다. 웬만치 벌어서는 네 기호 맞춰주기도 힘들겠어."
"아빠가 나를 어릴 때부터 너무 예뻐해서 버릇을 잘못 가르쳐서 그래."
"알긴 아네."
돌연 황수정이 밖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여기 양주 한 병 주세요."
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뭘로 드릴까요?"
"씨버스리갈로 한 병주세요."
"죄송하지만 그것은 없습니다. 손님!"
나는 씨버스리갈에 대한 전생에서의 향수랄까 추억이 있다. 박 대통령이 궁정동 최후의 만찬에서 마신 술이 이 술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뭐가 있습니까?"
"이런 곳에서는 양주를 별로 안 찾아서, 딱 한 종류로 꼬냑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떠냐는 뜻으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수정이었다.
"그럼, 그거라도 한 병 주세요."
"네!"
잠시 둘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었다. 마침 이때 보이지 않던 아저씨가 숯불을 들고 들어왔다. 이어 주인아주머니가 등심과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물론 후속타로 스끼다시도 조금은 들어왔다.
아주머니가 1인 분인 한 덩어리를 불판에 올려놓았다.
"안 구어 주셔도 됩니다. 우리가 구어 먹겠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네."
나는 매너있게 그녀의 언더록 잔에다 얼음을 채워주웠다.
"치워!"
"뭐야? 스트레이트로 마시겠다는 거야?"
"취하고 싶어."
"누구 속을 썩이려고?"
"네 속 안 썩여."
거칠게 말하더니 스스로 양주병을 따서 조그만 잔에다 붓는 황수정이었다.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얼음 통에서 얼음을 꺼내 언더록 잔에다 반쯤 채우고, 술도 1/3쯤 채웠다.
"남자가 쩨쩨하게."
"나, 운전하고 가야되잖아."
"깨고 가면 되지?"
"됐다, 됐어. 하나라도 안 취해야지. 둘 다 취해서 비틀거리면 남 보기 엄청 좋겠다?"
"고기 탄다."
"알았어. 뒤집을 게."
나는 집게로 고기를 뒤집고는 잔을 들어올렸다.
"건배!"
"뭐로 할까?"
"그냥 마셔."
"강 대정의 서울대 입학을 축하하며!"
"고맙다!"
"건배!"
"건배!"
둘은 단숨에 한 잔을 비웠다. 아직 고기가 조금은 덜 익어 양배추를 잘게 썰어 마요네즈에 버무린 것으로 우리는 안주를 대신했다. 곧 고기가 다 익었다. 나는 가위로 고기를 먹기 좋게 잘게 썰었다. 그리고 그녀의 접시 위에도 몇 점 올려주었다.
"보기보다 되게 자상하네."
"나 가정에는 충실한 사람이야."
"엄청 그럴나?"
"못 믿어?"
"믿는다, 믿어!"
더 이상 말싸움하기 싫은지 얼른 꼬랑지를 내리는 황수정이었다.
"들자!"
먼저 또 잔을 치켜드는 황수정이었다.
"고기 좀 먹고 먹어. 그러다 금방 취한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알았다, 알았어."
수정이 언제 스스로 따랐는지 몰랐지만, 나는 비로소 잔에다 잔을 채워 술잔을 부딪쳤다.
"쨍! 황수정의 만남이 잘 되기를 바라며........!"
"나를 아주 등 떠밀어 그 자식한테 보내라."
"그런 심정도 없지 않아, 있지."
"너 많이 변했다."
"학교는 어디 들어갔어?"
"말 돌리지 말고."
"어쩌라고?"
"정말 너는 내가 그 놈 씨에게 가길 바라냐?"
"그럴 리가? 솔직히 네가 내 서드를 자처한다면, 그것만은 용인할 의향이 있다."
"너, 죽을 래! 정처를 하래도 마다할 나인데........"
"싫으면 말고."
"할 말 없네. 음.......! 너 아까 나한테 뭐 물어봤지?"
"벌써부터 오락가락 하냐? 학교는 어디 들어갔느냐고 물었다."
"그게 네가 나한테 물을 소리냐?"
"그럼?"
"저 봐, 저 봐! 나한테 도통 관심이 없었군."
"사업하랴, 공부하랴, 일 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애도 만들었고, 와이프도 둘씩이나 거느리게 되었고. 그렇지?"
"그래."
"쳇, 관심 없는 놈한테 가르쳐주기는 싫은데........"
"그럼, 말고."
"연대 영어영문과."
"공부는 제법 했나보네."
"이 자식이 아주 나를 졸로 보나?"
"제발 그 말투 좀 고쳐라. 그 예쁜 얼굴에서 입만 열면 상소리니?"
"너도 별반 다름없었잖아? 요즘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만은."
"그렇다고 치자. 술 초되겠다."
"오케이!"
둘은 다시 술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목구멍에 쏟아 부었다. 나는 고기를 입에 넣어 씹었다. 벌써 미리 불에서 꺼내놓은 놈이라 약간은 질겨져 있었다. 나는 상추를 불판에다 두 개를 올려놓고, 고기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탈까 보아서였다.
"내가 한 잔 따라주지."
"좋아!"
거침없이 잔을 내미는 수정이었다.
"너도 이제 그만 내숭떨고 스트레이트로 하지?"
"소원이라면."
하긴 나도 평소에는 주로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오늘 황수정이 조금 걱정되어 비록 지금까지는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네 아빠 사업은 어떻게 되는 거냐? 정말 어렵냐?"
나는 수정에게 받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충북에서는 수위 권 안에 드는 건설사인데, 그 정도는 아니다. 아
빠가 욕심이 좀 과해서 더 키우려고 아등바등 하는 중이지. 그렇지만 전만 못한 것도 사실이야."
"내 사업이 새시창호 단종인데, 일거리를 좀 달라면 주겠네?"
"남자의 일에 대해서는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빠, 명함 있냐?"
"그런 걸 왜 내가 갖고 다녀?"
"전화번호 불러줄게. 적어."
"그런 건, 네가 참하게 써서 건네주면 안 되겠냐?"
"그럴까?"
"여기 수첩하고 펜 있다."
"알았다."
수정은 내가 내민 수첩과 볼펜으로 자신의 아빠 이름과 회사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황 국태(黃 國泰) 씨 맞냐?"
"맞아."
"자, 이제 술 마시자."
"우리한테는 3인 분도 남겠다?"
"너나 나나 왜 이렇게 안 먹냐? 우선 고기부터 들자."
"그래."
비로소 몇 점을 연달이 집어먹는 황수정이었다. 나는 고기 1인분을 불판에 올려놓고 다시 굽기 시작했다.
"우선 한 잔 들고."
"그래."
우리는 다시 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비웠다.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수정이 꼬냑 병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자세히 보곤 말했다.
"병이 정말 아름답다. 이게 술값인지 병 값인지 모르겠다."
"카라프형으로 처음부터 그냥 그대로 전통을 이어오는 모양이더라. 양주치고는 부드럽지?"
"몰라. 사실은 나 오늘 처음 양주 먹어보는 거야. 여자가 술 마실 기회가 그렇게 많냐? 기껏 맥주 아니면 소주지."
"하긴 그럴 거다."
"그런데 너는 내가 애가 하나에 여자가 둘이라도 화 안 나냐?"
"모르겠다. 아빠가 자꾸 그 자식에게 등 떠미니, 너를 피난처로 삼으려고 아등바등 만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때로 네 생각이 난 것도 사실이고....... 아무튼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헤어지면 마음조차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처음에는 너와 사귀고 싶어 많이 매달렸는데, 지금 같이 사는 미정이라는 아이를 만나고부터는 그 마음이 많이 희석되었다. 개다가 아이까지 생겨, 또 하나 어릴 때부터의 정혼녀라고 나타나, 너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지. 거기다 우리의 약속과 거리가 또한 한몫했다."
"호호호.........! 그럴 때는 유식하게 0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하는 거다."
"영문과라 다르네."
"못지않잖아? 그런데 왜 내 눈에 눈물이 흐르냐? 프랑스와 사강의 말을 빌면, 지워진 여인보다 잊혀진 여인이 더 슬프다는데, 티가 들어갔나?"
"아니."
"그럼?"
"술이 취하기 시작하나 보다."
"짜식이........! 호호호.........! 그렇지?"
나는 보았다. 그녀의 눈에 덧없이 흐르는 눈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