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81화 (81/322)

< --이중생활-- >

다음 날 아침.

나는 압구정동 내가 사놓은 땅으로 가보았다. 한전의 약속대로 많은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어 전기가 가설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수고한다고 치하하고 미리 준비한 황색 봉투에 작은 성의 표시를 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그들은 진실로 감사해 하며, 더욱 성의를 다해 자신들의 일이자 내게 도움이 되는 일에 전념했다. 나는 한동안 현장을 지키다가 대우 홍성부 이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물어 물어 한국유리 용산 대리점을 찾았다. 몇 종류의 정확한 유리 가격을 알아본 나는 곧장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직 서울에 내가 마땅한 사무실이 없으니 자꾸 집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길거리에 펴놓고 견적을 낼 수도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오늘 따라 자꾸 내게 달라붙는 다정이를 미정에게 아예 없고 밖에 나갔다 오라고 집에서 쫓아내고 견적을 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 시간이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최종 집계를 뽑아보니 나의 예상과 틀림없었다.

천오백오십만 원 돈이 나왔는데, 100만 원이 추가되어도 좋다는 홍 이사의 말에 따라, 1천6백5십만 원으로 계수 조정을 하려다, 나는 아예 거기에 1백만 원을 추가시켰다. 홍 이사도 1백만 원 정도는 네고를 하게끔 하여, 본인도 흡족하게 하고, 윗사람에게도 생색을 내야할 것을 감안한 견적이었다. 이것이 초보와 오랜 경험의 노숙한 경영자와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나의 전생에서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충 제시한 견적이 맞아떨어졌다는 만족감과 홍 이사에게도 생색을 낼 수 있게끔 작성된 견적에 만족감을 표시하며, 최종 날인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대 봉투에 넣어 단단히 밀봉하였다. 나는 다시 집을 나섰다. 밖에 서있던 미정이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다시 가설 공사가 한창인 내 땅의 현장을 찾았다. 여전히 인부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만족감을 표시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다정이와 놀다가 오후 4시 30분이 넘어서야 집을 떠났다. 현장에 도착하니 차가 조금 밀려 5시 20분이 되었다. 현장의 모든 일부들이 하루 일을 마감하고 각자 연장과 도구들을 정리하는 등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일부는 벌써 작업복을 자신들이 입고 왔던 일반 옷으로 갈아입고 현장을 떠나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일부러 이 시간을 택한 것이다. 견적이 통과되면 바로 홍 이사와 한 잔 하기 위해서였다. 현장을 대충 눈으로 한 바퀴 둘러본 나는 망설임 없이 이사실을 찾아들었다. 홍 이사가 도면을 보며 무엇이 안 풀리는지 심각한 안색을 짓고 있다가 나를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나는 과장되게 큰 제스처와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음........! 어서 오시게."

건성으로 나를 맞던 그가 도면을 한 번 더 주시하더니, 아예 도면을 탁 소리가 나게 덮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게로 다가오며 그가 물었다.

"견적은 내왔는가?"

"네, 이사님!"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대 봉투를 그에게 정중히 건넸다. 밀봉된 봉투를 대충 쭉 찢은 그가 내용물을 꺼내 제일 상단에 기록된 견적 최종가만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말했다.

"자네 말보다는 좀 오버 되지 않았나?"

"이사님도 생색을 낼 건덕지가 있어야지요?"

"하하하........! 역시 자네다운 처세야! 하하하........!"

다시 한 번 크게 웃은 홍 이사가 웃음의 여운이 남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야, 오십 넘은 사장들보다 더 노련하니, 자네의 나이를 의심하게 되네. 하하하........! 좋았어! 여기에서 백만 원 정도 네고하면 내가 예상한 견적가와 비슷해지겠군."

나는 말없이 빙그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제출한 견적서를 봉투 째 자신의 책상 위에 던져 놓은 홍 이사가 말했다.

"가자고. 대포 한 잔 해야지."

"방석집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만........?"

"나는 그런데 필요 없네. 말술이다 보니 여간해서는 취하지 않아. 그런데 몇 번 들렸다가는 집안이 남아나질 않아. 나는 술은 즐기되 값싼 술이지. 싼 술에 흠씬 취해서 들어가면 대 만족이야."

"때로 젊은 계집들의 엉덩이라도 두드려주고 싶지 않습니까?"

"나라고 왜 그런 욕망이 없겠나? 하지만 절제를 해야지. 이젠 누가 말하는 고개 숙인 남성이 돼놔서, 이젠 솔직히 줘도 못 먹어. 술만 취하면 그나마 요놈이 나 몰라라 하고, 태업을 벌인다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세월이 그런 걸 어쩌겠나. 내 말 충분히 알아들었지?"

"네, 네!"

나는 그의 말에서 인생의 비애가 느껴져 내심 침울해지는 심정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힘차게 대답을 했다.

"그런, 똥 씹은 얼굴 하지 말고, 가자고!"

"네, 네!"

입으로는 힘차게 대답한다고 했으나, 표정만은 마음이 반영되었는지, 좋지 않았나 보다.

"내 단골 주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세."

"선술집입니까?"

"그렀네. 왜?"

"그 보다는 하루종일 마신 먼지라도 벗겨내는 의미에서 시오야끼 집이 어떻겠습니까? 저도 요새 고기를 못 먹었더니 먹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 그 정도는 마다할 내가 아니지. 가세, 그럼! 요 앞에 아주 잘 하는 집이 있어. 맛이야 어떠하든, 고기가 푸짐하거든."

"알겠습니다. 이사님! 앞장을 서시죠."

"하하하........! 좋았어!"

"참, 차는?"

"현장에 놓고 가야지요."

"나 역시 동감일세."

우리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이면도로에 위치한 삼결살 집을 찾아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대우빌딩 현장으로 차를 찾으러 갔다. 주위는 어둠이 지배하고 있어, 인근의 가로등 불빛에 의해 희미하게나마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처지였다. 내가 내 차로 접근하는데 저 멀리서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나는 야간 경비이려니 하고 무심코 차 문을 따는데, 나를 소리쳐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이! 강 사장인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홍 이사였다.

"네, 이사님! 이 시간에 여길 웬 일이십니까?"

"자네야말로 이 시간에 여길 웬일인가? 나야 말로 매일 이 시간에 출근하네마는?"

"대단하십니다. 어제 그렇게 잡숫고도 이 시간에 매일 출근을 하신다니........"

"하하하........! 이젠 습관이 되어서 괜찮네. 그리고 대우라는 데가 여간 부지런 떨어서는 배겨낼 수가 있는 데가 아니야. 오너부터가 새벽부터 현장을 뒤지고 다니지. 밉상 받치지 않기 위해서는 별 수 있나, 내가 더 먼저 움직여야지. 꼭 그건 만은 아니지

만 말이야."

"이렇게 오밤중부터 움직이시면 잘릴 일은 없으시겠습니다 그려?"

"하하하.........! 이 사람이! 부지런함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관리하고 리드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 내가 모든 면에서 아주 적격인 사람이야. 하하하........!"

자화자찬을 하고는 멋쩍은지 대소로 얼버무리려 드는 홍 이사였다.

"정말, 내가 오너라도 홍 이사님 같은 분은 탐이 나겠습니다."

"나중에 사업 더욱 번창하거든 날 모시고 가. 하하하.........!"

"그 말 농담이 아니십니다?"

"이 사람이, 자네가 이렇게 대 건설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보는가? 어림없는 일일세. 능력도 능력이지만 백그라운드와 로비도 잘 해야, 대한민국에서는 우뚝 설 수 있는 기업이 되는 거야. 재벌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야. 다 다지고 다진 인맥에 쩐질이 더 해져야 되는 거지."

"명심해서 듣겠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라도 꼭 홍 이사님 같은 분이라면 한 번 모시고 싶습니다."

"진실로 자네가 나를 모실 처지까지 크길 바라네. 이 보다 자네를 위한 축수는 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보다 말이야."

"말씀 하십시오."

"내 백만 원 하고 자투리까지 없애려다 그냥 살려놨네."

"그럼, 천육백오십 만 원이 최종 네고가 입니까?"

"그렀네. 그 정도면 며칠 술값은 되지 않겠나?"

"차고 넘칩니다."

"하하하.........! 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는 법이지. 하하하.........!"

다시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홍 이사였다.

나는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액셀을 밟았다. 나는 그 길로 내가 사놓은 땅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비로소 날이 새기 시작했다. 그런데 벌써 현장에는 인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노가다들이 새벽 6시면 일을 시작해 해가 떨어지면 일을 종료한다. 벌써 6시가 넘었나 하고 시계를 보니, 6시가 채 안 되었다. 이 사람들은 부지런해도 너무 부지런하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현장으로 접근을 하는데, 그곳에는 아는 얼굴이 있었다.

주공 건설 본부장의 추천으로 만나게 된 장 효성(張 曉星) 부장이었다.

"아니, 일러도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자 회사에서 본사로 픽업되려면 본부장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어서 말이오."

"하하하........! 말 되네요."

"그러나 저러나 기초라도 좀 다져놓고 콘크리트라도 쳐 놓았으면 일의 진척이 빠르지 않습니까?"

"서울에는 아는 업체가 없다보니, 일일이 끌어들이려니 너무 번거로워서요."

"일단 알았습니다. 해보는 데까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 짓도록 해봅시다. 그리고 지난번 이야기 된 대로, 사무실이나 공장 모두가 표준설계도 대로 지으면 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뭐, 특이한 게 없으니........."

"사무실 포함, 일곱 동이오?"

"일단은 그렇습니다. 거기에 바를 쌓아 놓을 수 있는 공간도 정지 작업 좀 해주시고요. 추후의 일은 나중에 변동이 생기면 그 때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대화는 마쳤다. 나는 현장을 쭉 지켜보다가 막걸리 값이나 집어주고 현장을 떠났다. 다음 날 오전.

나는 한국일보 총무과로 전화를 걸었다. 여권이 나왔나 해서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 여권이 발급되어 있었다. 나는 이를 찾고 바로 김포공항으로 가서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그 전에 동양강철 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출발이 가능하냐고 여쭙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행기 이륙 시간은 지난번과 같이 오전 11시로 했다. 왜냐하면 박 사장님이 대전에서 올라오는 시간을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미연 양에게 아예 전화도 걸지 않았다. 지난번에 보니 관광을 하는 외에는 그녀의 통역이 사실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오전 11시 나와 박일용 사장님은 대한항공 편에 몸을 싣고 현해탄을 넘었다. 공항에는 내가 사전에 전화한대로 문정용 특파원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시게!"

"잘 지내셨습니까? 형님!"

"그럼, 그럼. 그 보다도 내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아, 네! 아버님, 내가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한국일보 주일특파원 문 정용입니다."

"하하하........! 반갑소. 우리 아이가 형님으로 모시고 있다니, 내게도 아들이 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렀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이라 불러도 결례가 아니지요?"

역시 넉살하면 빠지지 않는 문 형님다운 인사였다.

"하하하.........! 늦으막하게 아들 하나 두었더니, 생각지도 않은 자식들이 생기니, 나야 좋지. 벌써 다 장성해 교육비 들일 필요도 없고."

"하하하.......!"

일동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 박 사장은 웃지도 않는 가운데, 문 특파원이 자신의 차로 우리를 안내했다. 곧 운전을 하며 문 특파원이 말했다.

"우선 아버님의 관심 사항부터 처리하기 위해 토스템 동경 대리점으로 일단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아우가 알고 싶어 하는 유리 제조업체 대리점을 들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대표로 인사를 하고 박 사장님은 다만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시하셨다. 이어 우리는 지난번 그 일식집에서 초밥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토스템 동경 대리점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박 사장님은 세밀하게 바를 살펴보셨고, 나는 신용장 개설을 마쳤으니, 리스트대로 한국으로 보내 달라 했다. 이어 우리가 향한 곳은 아사히유리(Asahi Glass, 朝日─) 동경 대리점이었다. 세계 3대 유리업체에 드는 막강한 아사히유리는 일명 아시히글라스라고도 부르며, 현재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용 유리 기판은,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이 80%를 넘는다. PDP필터의 시장 점유율도 50%에 이른다. 1999년에는 TV브라운관용 유리 생산기업인 한국전기초자 주식 50%를 인수하면서 한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또 경북 구미에 있는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용 유리 기판 업체인 아사히글라스 화인테크노코리아의 지분도 100%를 가지고 있다. 아무튼 이것은 훗날의 일이고 현재 유리 제조업으로는 세계 3대 메이커에 속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이 회사의 동경 대리점에서 나는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수입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었다. ,반사유리 수입 외에도 나는 한국에서는 훗날 출현하는 복층유리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이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어렵게 어렵게 반사유리 샘플과 함께 복층 유리 샘플도 얻어 갈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원하는 이상의 만족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문 특파원이 다음으로 선정해 놓은 대리점은 아예 가지를 않았다. 의료용이나 특수 유리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오카모토유리(Okamoto Glass, 岡本硝子(강본초자))가 그곳이었다. 그 대신 우리는 일찍 저녁을 먹고 남자들끼리니, 동경의 밤 문화를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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