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80화 (80/322)

< --이중생활-- >

"명희 예요?"

"응."

태연하게 대답했으나, 우리의 통화내용을 미정이 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괜히 뒤가 캥겼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

"방금 나왔어요. 왜 또 무슨 장난 전화 했어요?"

"아니야. 업무상 전화야."

내가 보기로는 분명히 미정이 들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재치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를 떠올리니, 새시 건에 대한 신용장 개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큰데 해봐야 대행료만 비싸게 달랠 것 같아서 중소업체로 하기로 했다. 전화번호를 뒤적이자니 귀찮았다. 나는 바로 114로 전화를 걸었다.

"네, 친절과 정성을 다해 모시는 114안내입니다."

"거기 무역업체 중에서 작은 규모로 아무데나 하나 불러주세요."

"네, 고객님의 문의하신 전화번호는 000국에 0000번입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바로 전화를 끊고 알려준 번호대로 다이얼을 돌렸다.

"네, 가나실업입니다."

"참, 내........."

내심 어이가 없었다. 아무거나 알려 달랬더니, 기역(ㄱ) 니은(ㄴ)의 자모 중에서 가장 빠른 번호를 알겨준 것 같았다. 가가실업이 있으면 아마 이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재촉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젊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 수입품 취급 합니까?"

"그럼은 요. 어디 신데요?"

"신용장 개설도 해주는 거죠?"

"당연합니다."

"찾아뵙겠습니다. 위치가 어디입니까?"

"광화문 아시죠? 광화문 맞은편 동방빌딩 5층 내에 있습니다."

"1시간 내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미정이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차에 올랐다. 40여 분만에 나는 동방빌딩을 찾아들 수 있었다. 걸어서 하늘 까지는 아니고, 5층까지 오르려니 힘이 들었다. 요사이 운동을 많이 빼먹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안정되는 대로 운동을 좀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상호를 찾았다. 복도 끝 제일 끝머리에 여러 개의 상호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었지만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또 안에 복도가 있고,세 개의 칸막이 중에 제일 끝 창가에 가나실업이라는 상호가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나는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 아까 전화주신 손님입니까?"

"그렇습니다."

"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나는 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내부를 살펴보았다. 달랑 책상 2개에 전화기 한 대, 그리고 이 젊은 사내가 권하는 소파 세트가 전부였다. 몇 점 더 있다면 철지나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화분 하나와 차를 타먹을 수 있는 도구들뿐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책상 하나와 전화기 한 대로 청운의 꿈을 품고 무역업에 뛰어드는 세태라지만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그제야 내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20대 후반의 준수한 청년이 물었다.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차 종류도 커피 하나 밖에 안보였다.

"죄송한데 프리마가 떨어졌습니다."

"그냥 그럼 설탕만 2스푼 넣어주세요. 아니 세 스푼으로 하세요."

"네."

크림 없이 커피만 먹으려니 아무래도 쓸 것 같아 1스푼을 더 청했다.

잠시 후 차를 타들고 온 청년이 나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드시죠. 나도 젊지만 굉장히 젊으십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뜨거운가 안 뜨거운 가, 간을 보는 의미로 입술만 데었다 떼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조금은 뜨거운 느낌이 드는 커피를 단숨에 무슨 숭늉 마시듯이 후루룩 비운 청년 실업가가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명함 하나를 집어 들고 와 말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조 동호(趙 東鎬)라 합니다."

명함을 건네고 손을 내미는 조동호라는 청년이었다. 같이 손을 맞잡고 나는 그의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가나실업 부장 조 동호(趙 東鎬)제반 수출 및 수입품 취급간단했다. 혹시나 하고 뒷면을 넘겨봤더니, 그의 학력이 적혀있었다.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상대 졸업. 참으로 무역업을 하면서 내세울 것 되게 없는 친구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명함도 주지 않고 서로 악수를 나눌 때, 내 이름만 밝힌 상태였다. 그의 명함을 패스보드에 잘 챙긴 나는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았다.

"신용장 개설이 가능합니까?"

"당연하지요. 저희들의 주 임무입니다."

"수수료는 얼마입니까?"

"일정하게 정해진 것은 없으나, 수입금액의 10%에서 최소 5%입니다."

"금번에 제가 일본에서 알루미늄 바를 수입하려고 합니다. 이미 일본 종합상사에 의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쪽에서 신용장을 열라고 하더군요."

"너무 성급하게 업체를 결정하셨습니다. 제가 제시한 금액이 수입을 했을 때의 대행료까지 포함된 금액입니다. 그렇다고 저희들이 신용장 개설만 도와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별로 메리트가 없으니 그렀네요."

"그래서 거절하겠다는 것입니까?"

"꼭 그렇다는 것만은 아니고........"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던 청년이 말했다.

"점심 값만 주세요.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품을 뒤져 당시의 거래내역서를 보았다. 당시 내가 뽑아준 리스트에 대한 품목별 가격이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었다. 최종 집계를 보니 373,000엔으로 나와 있었다. 나는 조 부장이라는 사람에게 거래내역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를 받아든 그가 중얼거리며 주판을 가지러갔다.

"가만히 있어보자.........!"

"지금 1달러에 484원, 100엔에 173.91원입니다."

"이를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648,750원 돈이고, 이를 다시 달러로 환산하면, 약 1,340달러입니다."

"요는 우리나라 돈 약 650,000원 정도만 있으면 달러가 되었든 엔화가 되었든 결재가 가능하다는 소리 아닙니까?"

"액면금액으로는 맞지만 부대 경비를 감안하면 68만 원은 가져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같이 가야 됩니까? 아니면 혼자 진행을 하시겠습니까?"

"돈만 주시면 저 혼자도 가능합니다."

"돈도 찾아야 하니 일단 은행으로 갑시다."

"네. 기왕이면 환전 업무가 손쉬운 외환은행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럽시다. 나가실까요?"

"차가 한 대 있긴 한데 친구가 타고 나가서 말이죠."

"동업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네."

"제 차가 있으니 같이 갑시다."

"아! 그러시군요. 젊은 양반이 대단하십니다."

나는 그냥 말없이 희미하게 웃어주고는 앞장서서 사무실을 나갔다. 외부로 나온 나는 바로 그를 태우고 을지로 명동 입구에 있는 외환은행 본점으로 차를 몰았다. 그와 함께 외환은행으로 들어온 나는 현금 68만 원을 인출해 그에게 주었다. 그때부터 그가 쫓아다니며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근 1시간이 걸려 그가 일을 마쳤을 때는 그의 이마에 땀이 내비치고 있었다.

"다 마쳤습니다. 여기 오픈 내역서고요, 만 원 남았습니다."

1만 원까지 다시 정중하게 돌려주는 조 부장이었다. 비로소 나는 그가 조금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명함과 함께 1만 원을 돌려주며 말했다.

"식사나 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원, 천만의 말씀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 사무실을 찾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다음 건은 직접 이곳에다 수입 의뢰를 하죠."

"네, 대단히 고맙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금액이 얼마 안 되니 과잉 기대는 금물입니다."

"하하하........! 저희에게는 다 소중한 고객입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 그곳을 떠났다. 그가 걸어가든 버스를 타고 가든 알 바 아니었다. 남의 사정 다 봐주다가는 사업이 아니라 자선사업이나 하면 딱 맞았다. 5일 후면 입학식이었다. 그 때는 일본에 있거나 귀국했더라도 입학식에는 참가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몇 시간씩 서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촌의 부모님에게도 통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또 명희네 집을 거처야 했다. 명희네는 처제 입학식에 간다고 안 온다고 했으니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또 그네들을 번거롭게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니 공연히 짜증이 났다.

돈이 없을 때는 모르지만 이렇게 지지리 궁상 떨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차를 집으로 운행하면서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침 슈퍼 옆에 공중전화 한 대가 놓여있었다. 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차를 도로변에 주차시키고 공중전화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바로 명희가 근무하는 단종 사무실이었다. 마침 명의가 받았다.

"나다."

"네, 오빠!"

"지금 바로 가서 오빠네 집에 전화 한 대 신청해 드려라. 갑갑해 못살겠다. 그리고 너네 집에도 연락해서 입학식에 오지 마라 해라. 나 그때 일본에 가 있을 거니까, 와도 헛일이라 하고."

"네, 오빠!"

"별일 없지?"

"오빠를 보고 싶은 외에는 잘 돌아가네요."

"그래, 그래."

그러고 막상 전화를 끊으려하니 미정이네 집에서 또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난 김에 아예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명희야!"

"네, 오빠!"

"김 주임 보고 물어보면 미정이네 집 주소 있을 게다. 그 집도 하나 신청해 드려라. 부자인 너 네 집은 있으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알아요. 바로 시행할게요."

"오늘은 좀 늦었으니, 내일 처리하고."

"네, 네!"

"그래, 몸 건강히 잘 있고. 오빠 조만간에 한 번 내려간다."

"네, 오빠! 꽃단장 하고 기다릴게요."

"푸 하하하.........!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다 나오다니, 별일이다."

"쳇, 나도 이젠 순수한 숙녀가 아니라고요. 어엿한 강 대정 씨의 와이프랍니다."

"너 그딴 소리 하는 것 보니, 사무실에 아무도 없지?"

"당연하죠. 있으면 부끄러워서 이런 소릴 어떻게 해요."

"그럴 줄 알았다. 끊는다."

"사랑해요~!"

"엥~?"

찰깍! 내가 아닌 저쪽에서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통화를 끝내고, 차에 올라 바로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히 이곳에서 할 일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다. 장엄한 붉은 노을이 일품이었다. 나는 곧 차를 주차시키고 초인종을 눌렀다.

미정이가 쫓아 나왔다.

"수고하셨어요. 여보!"

"어서 들어갑시다."

나는 미정을 가볍게 끌어안고 현관으로 향했다.

"집 정리는 다 돼가?"

"네, 다 끝났어요. 그런데 여보, 우리도 침대 하나 사면 안 될까요?"

"나중에 조금만 참자. 요새 지출이 너무 많다. 앞으로도 지출할 돈이 많고."

"알았어요. 그냥 해본 소리예요. 지금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은데 청주 있을 때 생각이 나서."

"알았소. 오늘도 또 거금을 쓰고 오는 길이오. 어디에 썼는지 알아 맞춰 보겠소?"

"그야, 사업차 썼겠지요."

어느덧 우리는 거실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양쪽 집에 전화 한 대씩을 놔드리라고 했으니, 그것도 줄잡아 45만 원 돈이요."

"정말 큰돈 쓰셨네요. 우리 집에도 놔주셨다니 정말 감사, 감사해요. 어머니 아버지가 엄청 기뻐하시겠다. 그치, 여 봉~?"

콧소리로 애교를 떨며 까치발로 내 볼에 입을 맞추려드는 미정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잠시 안고 이마에 뽀뽀를 해준 후 말했다.

"큰돈은 큰돈이지. 내가 알기로 전년도 기준이지만, 4급 지방행정직 공무원 봉급이 세금 떼고 나면 약 4만4천 원 정도 받아요. 물론 올해는 몇 푼 더 인상 됐겠지."

"그러고 보면 우리 아빠는 조금 많이 받는 편이네요."

"그야, 별정직이니 특수 수당이 붙었겠지."

"아무튼 우리 집을 위해 그렇게 큰돈을 쓰다니, 여보야! 그러고 보면 내가 시집은 끝내주게 잘 왔다 이~?"

"알면 됐어? 그러고 보니 먹을 걸 아무 것도 안 사왔네."

지금 먹을 게 중요해요. 제게 그렇게 큰 선물을 주셨는데, 감사해요. 며칠은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아요.

""그래, 그래. 매일 감사하고, 저녁은 다 됐어?"

"국수 삶아 먹으려고 안 했는데.........."

그러면서 내 눈치를 보는 미정이었다.

"나, 오늘 점심에도 국수 먹었는데?"

"정말? 이를 어째!"

발을 동동 구르는 미정이었다.

"할 수 없지. 또 먹어야지 뭐."

"아니 예요. 지금이라도 밥 할게요. 잠시 다정이와 놀고 계세요. 금방 밥 앉힐게요."

"그래, 그래 기왕이면 밥을 먹는 게 낫겠지. 수고스럽지만 그렇게 하도록 해."

"네, 여보!"

바로 주방으로 달려가는 미정이었다. ============================ 작품 후기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만사형통하시기 바랍니다!

^^독자님들과, 님들의 가정에도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작년 한 해 베풀어주신 후의에 이 자릴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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