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79화 (79/322)

< --이중생활-- >

광고국에서 너무 지체를 했는지 대우빌딩 신축 현장에 근접할 무렵에는 점심때가 다 되었다. 나는 조금 더 속도를 내어 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전면을 바라보니 벌써 12층이 올라가고 있었다. 기존 한국의 빌딩들을 제치고 가장 높이 매머드 급으로 지어지는 웅장한 건물을 보노라니, 웬만한 사람은 건물의 외형에 압도당할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떼었다. 대충 현장을 둘러보니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내부는 한산했다.

나는 현장 사무실을 찾았다. 여직원 하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홍성부 이사를 찾으니 함바로 식사를 하러 갔다했다. 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함바로 찾아갔다. 한국 최대의 빌딩을 짓는 현장답게 함바 또한 규모가 커서, 초면의 홍 이사가 어디서 식사를 하고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전면으로 뚜벅 뚜벅 걸어가 양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소리를 질렀다.

"홍성부 이사를 찾습니다. 홍성부 이사를 찾습니다. 여기는 현장 사무실입니다."

나의 행동에 밥을 먹던 근로자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개중에는 간부들과 식사를 하고 있던 홍 이사도 있었다.

"거 걸물이네!"

"처음 보는 인물인데 요?"

"그렇지? 이곳으로 오라고 하게."

"네, 이사님!"

같이 대화를 하던 간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짓과 함께 나를 불렀다.

"이리 오시오. 이쪽으로."

"알겠습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그들 앞에 섰다.

"사무실에서 홍 이사를 찾는 데요?"

"왜?"

내가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대뜸 반말이었다. 꼭 소도둑놈 같이 생긴 자가.

"사람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누구지.........?"

약속을 한 사람은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홍 이사였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누구인가?"

"제가 홍 이사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농담하나?"

"하하하.........!"

목둘레가 웬만한 사람의 장딴지 정도는 될 것 같은 붉은 혈색의 홍 이사가 화를 벌컥 냈다. 반면에 함께 식사 중이던 간부는 무의식중에 대소를 터트리고는 홍 이사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동양강철에서 견적 건 때문에 찾아뵈었습니다."

"동양강철에는 사람이 그렇게 없는 거야? 이런 애송이를 다 보내고."

"저야 단지 도면이나 얻어가는 심부름꾼이니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말은 통하는 대화상대를 보내야지."

"나이가 어려 죄송합니다."

"누구 놀리나?"

"놀릴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제 나이 어리다고 탓을 하니, 회사를 대표해서 온 사람으로서 사죄를 드려야 올바른 행동 아닙니까?"

"끙.........! 밥맛 다 떨어졌네. 다 먹었으면 자네도 일어나지."

"네, 이사님!"

추호석 소장이 잽싸게 일어났다.

"따라와."

일방적으로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홍 이사였다.

"아, 이거 더러워서! 이제 수염이라도 기르고 선글라스라도 하나 끼고 다녀야 하나?'내심 나는 나이 들어 보이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현장 이사 실.

도면을 툭 던져준 홍 이사가 말했다.

"이틀 내로 견적 제출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일단 대답을 한 나는 그 자리에서 대충 도면을 훑어보았다. 별 것 없었다. 특수한 공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량만 많았지 일반적인 창호공사였다. 쭈그리고 앉아 도면을 뒤적거리고 있는 나를 힐끔 한 번 본 홍 이사는, 관심도 없다는 듯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창가로 갔다. 나는 주머니에서 늘 휴대하고 다니는 반으로 접힌 8절 크기의 견적서를 탁자 위에 제대로 펼쳐놓았다. 그리고 나는 신속하게 물량을 산출하기 시작했다. 이어 나는 규격이 틀린 창호 개당 단가를 암산으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개당 단가에 물량만 곱하면 견적이 나올 판이다. 그 시간이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전자계산기 좀 빌려주십시오."

"뭐?"

담배를 피우다 힐끔 뒤돌아보며 홍 이사가 벌 먹은 소리를 했다.

"계산기가 필요하다고요."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는 거야?"

"견적내고 있지 않습니까?"

"참, 내........ 그래가지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중얼거리던 그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벌써 견적이 다 나온 거야?"

"곱하기만 하면 됩니다."

"허, 참.........! 기가 막힐 일이군. 잠시 기다려봐."

손수 경리에게 계산기를 가지러 가는 홍 이사였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요즘 노안이 와서 잘 안 보이는 노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크기 정도의 계산기를 들고 나타났다.

"자!"

나는 신들린 듯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지금까지 산출된 총계에 공과잡비 10%를 곱하고, 또 기업이윤 20%를 가미했다. 바로 최종 견적이 나왔다. 토털 23, 212,000원이 나왔다. 지금까지

내 옆에 바싹 붙어 토털금액이 나오는 것까지 지켜본 홍 이사가, 어이없는지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천삼백만 원이라?"

그렇게 몇 번을 되 뇌이던 그가 돌연 내 얼굴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소리치듯 물었다.

"더 네고 안 되나?"

"자투리 떼어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야 당연한 거고. 솔직히 기 견적들보다 3백만 원이 싸긴 싸다. 원인이 뭔가?"

"공장도 가격입니다."

"하긴..........!"

고개를 주억거리는 홍 이사였다. 동양강철 본사의 견적이니 공장출고가격으로만 따져도 벌써 동양은 이윤을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 업체와는 재료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개다가 이렇게 대규모 물량인 경우는 그 차이가 현격하게 벌어지게 마련이었다.

"사장 결재는 필요 없나?"

"제가 곧 사장입니다."

"뭐?"

"전적으로 위임을 받았단 말입니다."

"하긴 그 정도 배짱에 이 정도의 출중한 능력이라면 나 같았어도 위임했겠다."

미소 한 점 없이 중얼거리던 그가 또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인 해!"

"감사합니다."

"나는 공정하게 집행한 것 밖에 없어."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지니고 다니는 견적서가 대정창호라고 인쇄된 견적서였다. 나는 그 부분을 두 줄로 찍찍 긋고, 그 위에 주머니에서 인감도장을 꺼내 날인을 했다. 그리고 성명 란에는 동양강철주식회사 박 일용 이라 적고, 그 밑에 즉 바로 내 이름이 인쇄된 그 위에 代(대) 자를 한문으로 적고, 내 이름 옆에 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

"여기 있습니다."

견적서를 읽어 본 그가 대뜸 물었다.

"동양강철 직원이 아닌가?"

"단종업체이면서 동양강철의 2개 대리점을 하고 있는 점주 본인입니다. 동양강철 박 사장님으로부터 이번 공사 건 전체를 하청이 아닌 위임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사적으로 수양아들 쯤 됩니다."

"하하하.........! 이 친구, 재미있는 친구네!"

정색을 한 홍 이사가 물었다.

"전체적으로 문제는 없네만, 수행할 자신은 있는가?"

"반포주공 2,3단지를 맡아 시공하고 있기도 합니다."

"젊은 친구가 대단하긴 대단하네. 자네가 사장이지?"

"네!"

"지금까지 결례를 범했네. 나이 어리다고 함부로 대한 점 내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사과하겠네. 앞으로 사장으로서 예우를 하지. 그렇지만 말투만은 못 고쳐. 나보다 한참 어린 것은 사실이잖아?"

"상관없습니다. 공사만 많이 주십시오."

"이번 하는 것 봐서."

"알겠습니다. 그런데 새시 공사가 상당히 딜레이 된 것 같은데, 원인이 뭡니까?"

"업체 하나를 선정해 발주를 했더니, 글쎄......! 차일피일 시공을 미루더니, 부도라고 하지 않겠나? 이런 어이없는 경우를 당한 것은, 건축 경력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일세. 그러나저러나 이젠 유리가 문제군."

"그 사람이 유리까지 같이 수주를 했습니까?"

"욕심은 많아서 그랬네."

"유리도 저에게 같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유리도 취급하나?"

"네!"

"그럼, 일단 견적 한 번 내봐."

"유리 종류가 뭡니까?"

"5mm 브라운이야. 망임유리도 조금은 있고."

"그렇다면 견적내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 2/3 가격이니까, 대충 1천5백만 원 어림 정도 되겠네요."

"정말 그 정도 금액에 가능한가?"

"솔직히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한국유리의 대리점도 겸할 생각입니다. 바로 낼 예정이니 충분합니다."

"참으로 겁이 없고, 자신만만한 친구군. 정말 자네의 기개가 마음에 들었네! 그것은 좀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상세 견적 한 번 내봐. 거기서 백만 원이 추가되는 것은 내 용인하겠네."

"감사합니다. 이사님! 저도 이사님이 화끈해서 좋습니다. 이사님의 하는 행동을 보니, 저희들이 수주한 것으로 알고 있으면 되겠습니다."

"당연하지, 업체 하나 좌지우지 하지 못해서야. 무슨 현장 이사야. 때려치우고 말아

야지."

"언제 술집으로 한 번 모시고 싶습니다. 저도 한 술 하거든요."

"그래? 듣는 이 반가운 소리일세. 대작을 하다보면 전부 초저녁에 나가떨어져서 재미가 있어야지, 원!"

"하하하.........! 둘이 마시면 볼만 하겠습니다. 이사님!"

"나도 기대가 크네. 유리 견적까지 통과되고 나면 자네가 한 잔 사게."

"이거 현장 비리 아닙니까? 하하하.........!"

"그 정도도 못하고 다녀서야, 현장에서 쐐빠지게 고생하는 보람이 없지."

"맞습니다. 역시 화끈하십니다."

"그런데 왜 자네는 처음에 그렇게 건방을 떨었나?"

"이 수많은 하청업체 중에서 저라는 인물을 강렬하게 어필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고도의 계산된 작전이었네."

"민망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그런 자네가 처음부터 보기 좋았네. 앞으로 잘 해보세. 내 또 현장에 나가봐야 하니, 오늘은 이쯤 해두고."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러고 보니 제게 명함 한 장 안 주셨는데요?"

"그러는 자네는?"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얼른 패스보드에서 내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대정창호 라는 명함이었다.

"본사가 청주에 있나?"

"서울에도 곧 분소를 마련할 것입니다. 압구정동에요."

"그래? 자주 보게 생겼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하는 도중에 자신의 책상 앞으로 간 홍 이사는 명함 곽에서 한 장을 꺼내 나에게 주며 말했다.

"이거, 아무나 함부로 안 주는 비싼 명함이야!"

"알만 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하하.........! 곧 죽어도 안 지는군. 자, 다음에 또 봄 세!"

"고마웠습니다. 이사님! 다음에 꼭 모실 기회를 주십시오."

"이를 말인가? 내 고프면 먼저 전화를 넣지."

"그래도 되고요."

"이것 가지고 가게."

"네!"

나는 홍 이사가 챙겨준 도면을 옆구리에 끼었다. 도면치고는 4절 크기라 휴대하기 편해 좋았다.

"같이 나가세."

"네!"

둘은 2층에서 1층 바닥으로 내려오자 서로 굳게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곧 이면도로로 걸어 들어가 길거리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먹고 압구정동의 내가 사놓은 땅으로 액셀을 밟았다.

내 땅에 와보니, 공터는 공터였다. 아무도 없었다. 전기를 가설하러 오지도 않았고, 조립식 주택을 지으러 오지도 않았다. 일단 나는 그곳을 벗어나 공중전화를 찾아들었다. 그리고 한전에 독촉전화를 했다. 내일 아침부터 가설을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어 한성에도 전화를 걸어 독촉을 했다. 모레부터 작업을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가구를 들여 놓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도와주고 미정이 옷장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동양강철 사장님에게 결과 보고를 했다. 아주 좋아하셨다. 나는 청주로 전화를 걸었다. 명희를 바꾸어 달랬다.

"여보세요."

"나다."

"아, 오빠!"

반색을 하는 명희였다.

"잘 지냈고."

"네, 보고 싶어요. 언제 내려와요?"

"글쎄다. 여기 일이 워낙 바쁘다보니 시간을 잡을 수가 없네."

"오늘밤 제가 올라가면 안 될까요?"

"일은 어떻게 하고?"

"헤헤헤........! 그렀네."

"며칠 내로 한 번 들를 거니까 그때 보자. 그때는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부르면 2층으로 달려와야 한다."

"오라버니는 한다는 소리가......."

안 보아도 나는 그녀의 붉어진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안 보아도 나는 그녀의 붉어진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