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생활-- >
그로부터 삼일 후, 즉 2월 21일 이었다. 아침부터 내게 전화가 왔다. 한국일보 비서실로부터였다. 내가 전화를 받자 장 사장이 넘겨받아 나랑 통화를 했다. 통화의 주된 내용은 여권도 나왔으니 찾아가고, 오늘 저녁 7시에 술 한 잔 하자는 전화였다.
나는 즉각 술 한 잔 하자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나는 오전에는 회사의 업무를 보고 오후에 서울로 출발하기로 했다. 사무실의 명희에게도 사실 이야기를 하고, 2층에 올라가 미정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미정이 또 같이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날 그녀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 즉각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미정은 새로 산 집에 미리 청소라도 해놓는다고 계속 조르는지라, 유독 미정에게만 약한 나는 눈물을 머금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번 서울행에도 나는 미정과 함께 고속버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나는 아예 이번 기회에 잔금을 지불해 등기이전까지 마칠 속셈으로 미정에게 물으니, 자신의 서류는 벌써 준비해놨단다. 잘됐다고 생각한 나는 서울에 내리자마자 복덕방에 전화를 걸어 주인아주머니를 시간에 맞추어 나오도록 했다. 통화를 마친 나는 제일은행 한남동 지점으로 택시를 달려, 필요한 만큼의 돈을 인출했다. 그리고 곧장 복덕방으로 향했다. 복덕방에서 전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잔금을 건네고, 복덕방 사장에게도 구전을 건넨 우리는 곧장 또 법원으로 달려가, 아예 이전등기까지 마무리 지었다. 비로소 좀 홀가분한 마음이 들어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어 나는 미정을 데리고 한남동의 이제 내 집이 된, 아니 미정의 집이 된 곳으로 찾아들었다. 자신의 집이 생겼다는 행복감에 미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안 청소에 열을 올렸다. 허리 다친다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것도 번쩍 번쩍 들어 옮기는 등, 괴력을 발휘하는 그녀였다.
나는 반은 방관자가 되어 그녀가 주가 되어 행하는 청소를 도와주었다. 이제 주변이 어둑어둑 해지자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나는 청소를 하다 벽에 붙었던 것을 떼어둔 중식 집 전화번호를 들고 나와, 미정이를 위해 공중전화에서 볶음밥을 시켜주었다.
거리에 나와 택시를 잡아탄 나는 곧장 중학동 한국일보 사옥으로 향했다. 이윽고 택시에서 내려 얼핏 시계를 보니 6시 40분이었다. 일반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지만 옥상
에는 여전히 사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층마다 불이 환했다. 신문사 특성 상 밤샘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은 탓이었다. 곧 사장실에 도착한 내가 노크를 하자 장 사장 특유의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비서가 아닌, 처음 보는 앳돼 보이는 아가씨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장 사장이었다.
"어서 오시게!"
양팔을 벌려 나를 포옹하는 자세로 맞는 장 사장이었다. 나 또한 스스럼없이 그에게 다가가 잠시 서로를 안고 있었다. 나를 떼어낸 그가 말했다.
"둘이 처음 보지?"
"네!"
어쩌다 보니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한마디로 예뻤다. 특히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볼우물이 매우 예뻤다.
"내 소개하지. 이 사람은 신문 계통에 매우 뛰어나 내가 기자로 특채한 인재고, 이쪽은 내 부친이 경제부총리를 지내던 시절, 동 내각에서 부친께서 외무부 장관을 지내셨거든. 그 인연으로 두 집안이 각별해졌는데, 하여튼 이 박사의 영애인 줄만 알면 되네. 그것도 집안의 막내로 아직 어리광쟁이야."
"사장님, 저 이제 철 많이 들었거든요."
"내가 볼 때는 아직 아니야. 자신의 이름 정도는 각자 소개하도록."
"네, 강 대정입니다."
"이 미연입니다."
우리는 서로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각자의 소개를 했다.
"미연이는 올해 연대 2학년이야. 무슨 과지?"
"불어불문과 요."
"그래, 그래. 어려서부터 대사이셨던 부친을 따라 각국을 돌아다녀 외국어에 능통하지. 몇 개 국어는 할 걸. 내 일본어 잘 하는 것은 알고 있고."
"5개 국어 정도?"
쌩긋 웃으며 오히려 반문하는 재치를 보이는 이미연(李美姸)이었다.
"오늘 모처럼 놀러왔기에 내가 잡고 있었지. 참, 미연아!"
"네?"
"너 이번 기회에 일본에 한 번 놀러갔다 오지 않을래?"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 이예요?"
"이 사람이 이번에 일본을 가는데, 네가 통역 좀 해주면 안 되겠니?"
"음.......! 언제요? 방학 때만 가능해요."
"참, 내가 강 기자를 제대로 소개를 안 했군. 이번에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으니, 이 사람도 방학 때 외에는 일본에 갈 수가 없어."
"그래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자세히 살피는 이미연이었다.
"좋아요? 가겠어요?"
"언제, 몇 박 며칠?"
"당장 내일부터라도 가능합니다. 여정은 1박2일 정도면 됩니다."
"좋아요. 단 내일은 안 되고, 모레 출발하는 것으로 하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 대신 수고비는 주셔야 돼요."
"당연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좋았어요. 이제 저녁이나 사주세요? 네?"
"하하하.........! 이것 참, 그 어리광은 여전하구나."
"어리광이 아니라 애교라고요, 애교."
"그래, 애교라고 해두자. 그 대신 우리는 누구와 선약이 있으니 좀 빨리 자리를 떠야 된다."
"그런 눈치 정도는 저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시간이 없으니 바로 나가자."
"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웃한 단골 요정으로 또 가게 되었다.'향미각(香味閣)'이라고, 부근에서는 아주 유명한 요정이었다. 겨울임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은 사철수들이 빼곡한 공터에는 이미 많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손님을 맞은 마담에 의해 우리 일행은 바로 특실로 향했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자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마담이 물었다.
"음식 내올까요?"
"아직 아니야. 올 손님이 아직 한 사람 안 왔어."
장 사장의 제지에 마담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세분이시라기에 다 오신 줄 알고........"
"우선 입가심이나 하게 맥주 몇 병만 가져와봐."
장 사장의 주문에 이미연이 웃으며 말했다.
"술은 여전히 즐기시네요."
"인생 무슨 낙이 있나? 한 세상 취해 살다 가면 그 뿐이지."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이 시 나올 때 됐잖아요?"
"하하하........! 미연이 너! 별 걸 다 기억한다."
"그 좋은 시를 주당의 애주가로 바꾸어 놓았으니........"
이 미연의 푸념에 장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자꾸 이 오라비 놀리면 너 일찍 쫓겨난다."
"어차피 저녁만 먹고 일찍 갈건 데요. 뭐."
이미연이 새침하게 말하며 눈을 내리까는데, 이때 장지문이 스르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모두 마담인가 하여 신경도 안 쓰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습니다. 오늘따라 차가 왜 이렇게 막히는지, 원........"
"하하하.........! 어서 오세요. 안 오시길래 우리끼리라도 한 잔 하고 있으려다 들켰네요. 하하하........!"
이때 마담이 맥주를 들고 들어왔으므로 장 사장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음식 바로 내와요."
"네, 사장님!"
마담이 곱게 절을 하고 나가자, 맥주병을 집어 드는 장 사장이었다.
"우선 한 잔 받으세요."
"이거, 이거. 초장부터 취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 선배님이 주당인 건 다 알고 있으니, 너무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하하하........! 내 언론사 사장 앞이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군."
말을 하면서 맥주잔을 기울이는 송건(宋健) 대한주택공사 사장이었다.
"자네도 한 잔 받게."
"네!"
"아, 서로 소개부터 시켜드린 다는 것이 그만........! 자네가 먼저 인사 올리게. 대한주택공사 송 건 사장님이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강 대정이라 합니다."
나의 정중한 인사에 장 사장이 초를 쳤다.
"오늘 따라 되게 예의 바르네. 금번에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고요. 한국일보의 대 기자이기도 합니다. 선배님도 아시죠? 입도선매(立稻先賣)라고. 될 성 부르기에 제가 먼저 베어왔습니다."
"하하하........! 그 정도요? 장 사장의 눈에 그 정도의 인재라면 얼마 안 있어, 대한민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대 기자가 되겠군."
"선배님도 이 사람 앞에서는 조심하셔야 됩니다. 기존 정부의 최저입찰제를 예정시
행가로 바꾸어 놓은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하하하.......! 정말 장 사장보다도 더 조심해야 될 사람이로군."
"오라버니, 최저입찰제는 뭐고 예정시행가라는 말은 또 뭐예요?"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여자로서는 굳이 안 물어봐도 될 것을 물어보는 이미연이었다.
"저 사람이 글쎄, 정부의 공사 수주 관행에 대한 비리를 특종으로 보도해, 관행 자체를 바꾸어 놓지 않았겠니? 그러니 그런 줄만 알고 정 궁금하거든 나중에 당사자에게 물어봐."
"쳇, 이젠 안 궁금하네요."
"하하하.........! 너도 공사 사장님께 인사드려라!"
"네, 이미연입니다."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손을 가슴에 모으고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이미연이었다.
"나, 송건이오. 이런 미인과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호호호......! 오늘 하시는 것 봐서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전 외무부 장관 이 박사의 따님이기도 합니다."
"누구? 한일협약을 체결했던 이동원(李東元) 장관?"
"그렇습니다."
"그 양반 좋은 일 하고도 두고두고 욕은 많이 먹었지?"
"알아주시니 다행이네요."
이미연의 말에 빙긋 웃고는, 더 이상의 말을 삼가는 송건 사장이었다.
"술 초 되겠다."
이렇게 말하며 잔을 드는데 이미연이 한 마디 했다.
"저는 왜 한 잔도 안 주세요? 지금 성 차별하는 거예요?"
"이래서, 이래서, 여자는 너무 가르칠 필요가 없어? 이렇게 되바라지잖아?"
지청구를 하면서도 술잔에 술은 따라주는 이율배반적인 장 사장의 태도였다.
"무슨 구닥다리 같은 소리예요? 사장님도 극악한 보수주의자세요?"
"하하하.........! 농담 한 마디 더 했다가는 오늘도 미연이 때문에 술도 제대로 못 먹겠다."
"쳇, 그러려니 하고 어서 드세요."
"그래, 그래. 건배!"
말끝에 잔을 치켜드는 장 사장이었다. 그의 잔에 서로의 술잔을 부딪치며 우리는 일제히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술자리가 2차까지 이어졌고, 나는 이 자리에서 바로 송건 사장에게 면담 약속 날짜를 받았다. 바로 내일 오전 10시 정각이었다. 물론 이미연은 1차가 끝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나에게 전화번호를 남기고.
집에 돌아오니 12시 가까이 되었다. 통행금지에 안 걸린 게 다행이었다. 미정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아휴, 술 냄새야! 술 좀 그만 드세요. 건강을 생각하셔야지요. 이틀이 멀다고 드시니........"
"나, 3일 동안 안 먹었거든."
"아이고, 자랑이네요. 우리 서방님!"
약을 올리기로 작정을 했는지 미정은 내 면전에 들이대고 베에~ 하며 혀까지 쏙 내밀었다, 들이밀었다.
"그만 자자."
"그러나 저러나, 여보!"
"왜?"
내가 귀찮다는 듯 말하자 미정은 내 옆에 착 달라붙으며 말했다.
"내일은 도배를 새로 해야 되겠어요. 하는 김에 아주 장판도 갈고."
미정의 말에 벽을 둘러보고 바닥을 보니, 정말 하기는 새로 해야 될 정도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래, 내일 전화 걸어, 참........! 그러고 보니 전화도 한 대 없네. 이전 쓰던 사람이 쓰던 전화라도 있었으면 덜 불편할 텐데."
"집이 두 채씩이나 되었다면서 구두쇠였나 봐요."
"장판과 벽지는 알아서 내일 당신이 진행을 하고, 나는 전화 한 대 놓을 게."
"참, 여보! 보일러 기름도 얼마 없어요."
"기름도 당신이 들여. 기름값 비싼데, 아끼고."
"매사에 당신보다는 제가 더 아깔 걸요?"
"알았어, 알았어. 피곤하니 이만 자자."
"오늘은 저 안 안아 주세요?"
"뭐?"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메롱~!"
혀를 쏙 내밀었다가는 안방으로 황급히 사라지는 미정이었다. 그런 미정을 내가 가만히 두고 볼 놈이 아니었다. 바로 뒤쫓아 들어가 뒤로 껴안고 속삭였다.
"오늘도 지난번과 같이 뜨거운 밤을 기대해도 될까? 우리 단 둘뿐인데?"
"뭐라고요?"
나를 밀치는 미정을 나는 힘으로 제압하고 강제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사랑해!"
"저도요. 영원히, 영원히!"
"고마워!"
쪽!
"나 요즘 너무 너무 행복해요."
"그런 의미에서 빨리 불 꺼!"
"쳇!"
마지못해 불을 끄러가던 미정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이불 한 채도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