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생활-- >
그날 밤 장모님이 하룻밤 주무시고 가신다고 하기에, 나와 명희가 한 방을 쓰고, 미정이는 다른 방에서 잤다. 장모님과 순희가 또 하나의 방을 썼다. 그러나 저러나 명희의 동생 순희가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 일장일단이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생활 할 때는 명희가 동생과 함께 지내니, 내 입장에서는 좀 안도감이 드는 반면에, 아무래도 내가 청주로 내려와 이 방에 기거할 때는 좀 불편한 면이 있을 것 같았다. 둘이 있을 때야 홀딱 벗고 돌아다녀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행동이나 옷차림 등 여러 면에서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둘이 함부로 장난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긴 세상만사가 다 좋기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위안을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장모님은 순희를 데리고 교복을 맞춘다고 외출을 하신다기에, 나는 명희도 함께 같이 같다 오라며 주머니에서 10만 원을 꺼내, 명희를 주었다.
교복이며 가방, 하다못해 단화까지 모두 명희가 지불하도록 했다. 이래서 돈이 많으면 좋다. 생색도 내고 점수도 따니, 식구들 모두 나를 안 좋게 볼 사람이 없었다. 아니 모두 내 편이 되어 나를 일심으로 칭찬하니 이 아니 즐거운 일인가!
아무튼 나는 오후에 장모님이 순희를 데리고 돌아가실 때, 고맙다는 말을 연신 들으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처제 또한 형부 고맙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릴 때는 가진 자의 기분을 만끽했다. 이틀 후.
나는 미정이를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패스보드에는 미리 찍어둔 여권 사진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고속버스는 무슨 일인지 한강 다리를 넘지도 못하고 지체 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방에서 무슨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지루하네요!"
미정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말했다. 다정이는 오늘 명희에게 맡긴 채였다. 대신 명희는 오는 하루 근무 열외였다.
"무슨 사고가 난 모양이야."
미정의 말에 답을 하는 나도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라 창문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주
위의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으면, 갑갑함이 덜할 것 같아서였다. 창문 후방으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공사가 한창이고, 강변 가까이에는 6층 높이의 반포아파트 공사가 외관을 드러낸 상태였다.
나는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저거다!"
차내의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고, 나의 고함에 깜짝 놀란 미정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개의치 않고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 안내양에게 갔다.
"여기서 내릴 수는 없소? 너무 지루해서 말이오."
"이 버스는 꼭 지정된 장소에서만 서게 되어 있어 불가능합니다. 손님!"
거절의 말이지만 손님이 불쾌하지 않도록 상냥하게 말하니 그나마 나았다. 할 수 없이 자리로 돌아온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러면서도 좌로 우로 주변의 풍경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좌측은 그나마 아파트라도 짓고 있으니 나았다. 우로는 그냥 띄엄띄엄 집이 보이고 황량한 과수원과 뽕나무밭, 채소밭을 비롯한 농경지 아니면 백사장이었다.
'우측이다!'
나는 내심 벌써 아파트 용지 매입의 위치까지 결정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제3한강교(80년대 중반 한남대교로 개칭) 우측으로 신사동과 압구정동이 지금은 거의 허허벌판인 채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가다가 서다가를 반복한 차가 마침내 터미널에 서자마자 나는 미리 입구까지 나와 있다가 바로 미정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택시 승강장으로 가 강남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30분을 달려 막상 신사동에 도착하니 막막했다.
땅을 구입하긴 해야겠는데 누가 주인인지 알 수도 없고 주변에 복덕방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큰 도로로 나와 택시를 타고 공사 중인 반포아파트 주변으로 왔다. 이곳에는 복덕방이 아예 몰려있었다. 아파트를 전매하거나 세를 놓아주기 위해 모여든 것 같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외부에서 보기에 가장 규모가 커 보이는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종로복덕방'이라는 상호였다. 그 앞에는 최신형 포니 승용차까지 주차되어 있어 신뢰가 더 했다. 나와 미정이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가씨가 다가와 상냥하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땅 좀 매입하려고 왔는데요."
"실례지만 어느 쪽 땅을........."
"가급적 압구정동이면 좋겠고, 아니면 신사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과수원이나 뽕밭 등 농경지가 아닌 모래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아가씨가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모래땅 사겠다는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이라 그럴 것이다.
"그건 제가 알 수가 없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사님에게 한 번 여쭈어 보고 올게요."
"그러세요."
아가씨는 여러 개로 나뉘어 있는 룸 중에서 한 곳을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잠시 후 나온 아가씨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앞장을 서는 아가씨이나 안내도 필요 없었다. 이미 문이 반쯤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보고 있던 40대 후반의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았다. 벌써 노안이 왔는지 돋보기 너머로 보이는 눈알이 굉장히 무서웠다.
"모래땅을 사시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그 쪽으로 앉으세요. 보던 게 있어서."
나와 미정은 그가 권하는 대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가 돋보기를 벗고 우리 앞에 마주 앉았다.
그때까지 나가지 않고 기다리던 아가씨가 물었다.
"차는 뭘로 하시겠어요?"
"나는 커피로 주세요. 둘 둘 넣어서. 당신은?"
"저도 같이요."
"네~!"
말끝을 길게 끈 아가씨가 나가자 새삼 우리를 살핀 이시라는 사람이 말했다.
"참으로 부인이 미인이십니다. 어디 미스코리아 출신 아니세요?"
"아, 아닙니다."
미정이 급 얼굴이 빨개져서 부인을 했다.
"저,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이사 강 판술입니다."
그러면서 미리 준비한 명함을 내게 건네는 강 이사였다.
나 또한 명함을 한 장 꺼내 그에게 주었다.
"아, 한국일보 기자시네요. 나랑 종씨구요."
명함을 새긴 이래로 외부인에게 처음으로 건네주는 한국일보 기자 명함이었다.
"그렇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한 나는 그의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가씨에게 들었겠습다만, 그런 땅이 있습니까?"
"있긴 있습니다만, 너무 물량이 커서..........."
"몇 평인데요?"
"자그마치 16만만 평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런 쓸모없는 땅을, 그렇게 많이 사려합니까?"
"네?"
깜짝 놀란 시늉을 한 나는 연막작전을 펴기로 하고 주저주저 말했다.
"글쎄요. 정말 크긴 크네요. 너무 크긴 큰데......... 평당 얼마에 내놓았습니까?"
"170원을 받아달라고 하더군요."
"에이~! 무슨 그런 쓸모없는 땅을........."
나의 반응에 강 이사라는 사람도 노련하게 나왔다.
"요새 강남에 아파트 열기가 불기 시작해서, 사시려면 빨리 사두시는 게 낫습니다. 그 사람이 이것을 알면 물권을 거두어들일지도 몰라요."
"어디 사시는 분인데요?"
"저도 정확한 거처는 모릅니다. 전화번호만 알고 있습죠."
"지금 한 번 연락해보세요."
"실례지만 그만한 돈은 있습니까?"
"좀 부족하지만 끌어 모으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내 이번 건만 잘 성사대면 이사님에게도 섭섭지 않게 대접하리다."
"하하하........! 젊은 나이에 기자가 되셨다 했더니, 뭔가 특출 난 점이 있군요."
쓸데없는 아부를 하며 전화기 쪽으로 향하는 강 이사였다. 나는 그가 전화를 거는 동안 암산을 해보았다. 한 150원 정도로 깎을 예정을 하고 줄잡아 16만 평을 계산하니 2천4백만 원이라는 거액이 나왔다. 지금 내 통장을 탈탈 털면 3천5백만 원 정도는 있으니, 지불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내가 암산을 끝내고 오연히 앉아있는데, 강 이사가 송화기를 막고 내게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오시겠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실례지만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을 까요?"
"여기까지 오시려면 얼마나 걸리십니까?"
"대략 1시간 정도는 걸린다는 데요?"
나에게 의사를 묻는 강 이사였다.
"오시라고 하세요."
"네, 네!"
곧 강 이사가 전화를 끊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주인이 오는 동안 그 땅을 잠시 들러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가 막 일어나 나가려는데 아가씨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다녀와서 마실 게요."
"김 양아, 내 잠시 모시고 갔다 올 테니, 사무실 잘 지키고 있어라. 차는 네가 마시던지 버리던지 해라."
"네, 이사님!"
"아깝잖아요. 여보 얼른 한 잔 마시고 갑시다."
"알았어."
미정의 말에 나는 급히 마시다가 기어코 사례가 들려 콜록거렸다. 이를 보고 전부 빙그레 미소를 짓는 세 사람이었다.
"갑시다!"
어쨌거나 차를 다 마신 내가 앞장을 섰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한 미정이 아가씨가 들고 있는 찻쟁반에 잔을 올려놓고 쫓아왔다. 차는 간신히 흉내만 내놓은 비포장 길을 달렸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 눈에
어림짐작으로도 압구정동 같았다. 내가 손가락질을 하며 중기가 가득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웬 중기가 저렇게 많이 모여 있습니까?"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를 공사하면서 외국에서 수입한 장비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저곳은 모래땅을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군요."
"이곳도 좀 정리만하면 그만한 정도의 용도로는 얼마든지 세를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강 이사는 전면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백사장을 손가락질 했다. 내가 매입하려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눈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채소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내 시선을 따라온 강 이사가 말했다.
"이곳이 저 정도 땅만 되었어도 값이 엄청날 것입니다."
"이사님!"
"네?"
"내 확실히 살 의향은 있으니까, 그 사람 편 그만 들고, 주인이 오면 최소한 150원 이하로 다운 시켜주세요. 내 섭하지 않게 대우할 테니까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화통해서 좋군요!"
이때 미정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런 모래땅을 그리 많이 사서 뭘 하시게요?"
"쉿! 1급 비밀. 내 나중에 당신에게 돈 받고 알려줄게~!"
"쳇, 안 알려줘도 되네요. 그런데........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그런 것 절대 아니니, 아무 소리 말아요."
"믿어요. 당신을."
그렇게 밀하고 쌩긋 웃는 미정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눈부셔 천사가 따로 없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 나였다.
"됐습니다. 가시죠."
"네!"
나는 가는 내내 생각을 했다.
'나중에 대규모 아파트를 지어 재개발 할 때도 한강 조망 권 때문에 유리하겠어.'
나는 내심 희희낙락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계약금 때문에 걱정이 되어 강 이사에게 물었다.
"부근에 은행이 있습니까?"
"있긴 하지만, 강북으로 올라가는 게 빠릅니다."
"강남에 인구가 얼마 이길래 은행 하나 제대로 없어요?"
"5만 남짓 될 거예요."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노른자위 땅이라는 강남이 지금은 찬밥 신세였다.
"혹시 토지대장은 떼어놓은 게 있나요?"
"있습니다. 제가 보니 깨끗합디다."
"그래야지요. 담보라도 설정되어 있으면 골 아프지요."
"맞습니다. 재산권 행사도 제대로 못하고 아주 골치 아픕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는 곧 원 위치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강 이사에게 토지대장을 보여 달라고 해서 확인해 보니 정말 깨끗했다. 그로부터 20분 후. 중절모를 쓴 한 노인이 나타났다. 60대 후반이었다. 서로 인사를 하느라 그가 머리를 벗으니 대머리 할아버지셨다. 아무튼 우리는 다시 소파에 앉아 흥정을 하게 되었다.
"어르신, 평당 140원 이면 시사겠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 팔아!"
흥정이고 자시고 다짜고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노인양반이었다.
"그러지 말고 잠시 앉아 더 대화를 나누어보시죠. 할아버지!"
"젊은 놈이 남의 땅을 거저먹으려면 돼?"
"그럼,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현금으로 일시에 준다면 내 160원까지는 생각해보겠네."
"오늘 아예 등기이전까지 마치게 서류이전만 해주신다면 돈도 일시불로 한꺼번에 다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150원으로 해주세요. 네?"
"허허........! 젊은이가 애교도 있네?"
"정말 현금으로 일시불이 가능한가?"
"그럼요, 어르신 모시고 제가 직접 은행에 가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체고 뭐고 난 몰라. 그 자리에서 몇 다발이 되었든 현금으로만 내놔. 그러면 내 150원에 내주지, 준비서류는 벌써 내 품에 다 완벽히 준비되어 있어."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럼, 계약이고 뭐고 바로 은행으로 가실까요?"
"그, 그러지 뭐."
둘의 갑작스런 진행에 멍하니 서있기만 하는 강 이사였다. 이후 우리는 바로 제일은행 한남동 지점을 찾아가, 나는 2400만 원을 일시불로 건네주고 그의 영수증을 받은 후, 이전 서류일체도 넘겨받았다. 그와 헤어진 나는 여기까지 따라온 강 이사에게 현찰로 50만 원을 사례비로 주었다. 주인영감에게도 구전을 얻어먹을 테니 섭섭지 않은 대우였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달려가 아예 이전등기까지 필했다.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달려가 아예 이전등기까지 필했다.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달려가 아예 이전등기까지 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