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의 두 번째 계단-- >
내 생각이 짧았다. 몇 가지 오해가 겹쳐 미정을 즐겁게 해주겠다는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고개를 외면하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마음에도 없는 농담을 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이곳에 깨를 심을 수도 있어?"
"딱 보니 도시 한 복판인데, 이 비싼 땅에 깨 심는다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당신 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도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참 내........."
어이가 없는지 돌연 피식 웃은 미정이 말했다.
"따질 건 집에 가서 따지기로 하고, 나도 풀이나 뽑아야겠으니, 애나 보세요."
"나도 할 일이 있는데........."
울상을 지으며 내가 말했다.
"보라면 봐요!"
미정이의 매몰찬 말에 나는 다정이를 받아 안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고, 두야! 이래서 사람은 약점 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 돼!'
내심이야 어떠하든 나는 다정이를 안고 기저귀와 젖병이 든 가방까지 들고 한쪽 구석으로 옮겼다.
"다정아! 아빠 신세가 오늘은 왜 이 모양이냐?"
신세 한 탄을 해보지만 눈만 말똥말똥
'뭔 소리야?'
하는 표정의 다정이를 보고 있자니 한숨만 깊어졌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다정이를 추켜세워 더 힘주어 안고 가방을 중지에 걸었다. 그리고 넓은 공터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어디 가시게요?"
"설계사무실!"
나는 미정이의 물음에 오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리 주세요. 아이를 안고 어디를 가신다는 거예요. 제가 볼게요."
"알았어."
나는 급한 걸음으로 미정에게 걸어갔다.
"그 대신 빨리 다녀오세요."
"알았어. 아기 데리고 일 하지 말고, 한 옆에서 구경이나 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빨리 다녀오기나 하세요."
"알았어."
공터를 떠나면 나는 생각했다.
'오늘부로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가는 것 아니야?'
형편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평소 내가 생각해두었던 건축설계 사무소로 향했다. 시청 맞은편에 있는 동방건축 설계사무소였다. 나는 이곳에서 웃돈을 조금 더 주기로 하고 빠른 설계를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건물 밖으로 나와 생각에 잠겼다. 일 하는 현장으로 가봐야 하나? 일찍 돌아 가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길로 지사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김 주임 혼자 남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
"점심 때 다 되어가는 데요?"
"그런가.........?"
건축사무실에서 머문 시간이 길었나보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오늘은 왜 얘마저 까칠한 거야!'
"커피 한 잔 부탁합니다!"
"네, 사장님!"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다음 할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일의 추진을 위해서는 동선이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전화 생각을 하니 저 쪽 사무실도 최소한 전화 세 대는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집무실은 메인에서 따와도 되지만, 2층까지 생각하니 그 생각을 접고, 그냥 3대를 놓기로 결정했다. 내 사무실에서 2층집으로 하나를 연결해 쓸 생각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밤중에 집으로 전화가 왔는데, 업무용 전화라면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밤까지 업무의 연장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야지 피로가 풀리니, 업무의 연장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나는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 사무실 전화를 이층으로 따 올리기로 한 것이다. 아무래도 내 사무실 전화는 지인 밖에 모를 공산이 크므로, 그게 백 번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아무튼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 주임이 커피를 타들고 들어왔다.
"김 주임! 잠시 거기 앉아 봐요."
"네!"
"오늘 점심 이후에는 전화 3대를 신청해 줘요."
"건축 사무실에 쓰시게요?"
"그래요."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상의 안주머니에서 계약서를 꺼내 주며 말했다.
"주소는 여기 있으니까, 옮겨 적고 돌려주세요."
"네!"
"김 주임이 나가면 사무실이 빌 것 아니 예요?"
"네."
"점심시간에 총무들에게 물어봐서 오후에 비교적 한가한 사람에게 사무실을 지키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화 신청할 때는 담당 아가씨에게 잘 접근해서 웃돈을 좀 집어줘요."
"그게........."
"그것도 사회생활의 요령 이예요. 그러면 좋은 전화번호를 뺄 수 있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맙습니다."
"잠깐 만요!"
"네?"
"지금 당장 전화 쓸 일 없지요?"
"네!"
"알겠습니다. 내가 써야겠어요."
나는 아예 커피 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가면서 반을 비운 나는 곧 커피 잔을 책상 위에 놓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몇 번이에요?"
그러자 재치있게 김 주임이 다이얼을 돌릴 준비를 하고 물어왔다. 나는 다시 상의 패스보드에서 수첩을 꺼내, 아저씨의 이름이 적힌 폐이지가 나오게 하여, 김 주임에게 전해주고 말했다.
"강 동선이라는 이름입니다."
"네!"
잠시 끼르륵 끼르륵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곧 발신음이 떨어졌다.
"여보세요?"
중년여성의 음성이었다.
"거기 혹시 세 들어 사는 사람 중에 강동선 씨 있으면 좀 바꿔주세요?"
"네, 잠시 기다리세요."
"네!"
전화를 들고 가만히 생각하니 노가다 감독하는 사람이 낮 시간인 지금 집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왕 건 것이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잠시 후였다.
"여보세요?"
굵은 톤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나는 송화기를 입에 바짝 붙이며 말했다.
"동선이 아저씨 세요?"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저, 강동희의 아들 대정이인데요? 기억하세요?"
"왜 내가 너를 모르니? 어릴 때부터 공부 잘 하기로 소문난 놈 아니야!"
"하하하........! 저 올해 서울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래? 아주 잘 했다.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네가 어쩐 일이냐? 할머니라도 돌아가셨냐?"
"그게 아니고요? 건물을 하나 지으려는데? 가능하시겠어요?"
"잘 됐다. 그렇잖아도 겨울철이라 일감이 없어서 놀고 있던 참이다. 언제 내려가면 되겠냐?"
"음 설계가 5일 걸린다고 했으니까, 5일 후에 내려오세요. 아니 삼일 후에 내려오세요. 그 전에 일할 사람 수배도 해야 되잖아요?"
"그래, 그래 알았다. 참, 어디로 찾아가야 하니?"
"적으세요. 제 사무실 전화인데요. 이곳으로 낮 시간에 전화하면 저와 연결이 될 거예요. 가급적 시간을 맞추어 9시 정각에 전화를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래, 알았다. 불러봐라!"
"네 00국에 0000 번입니다."
"알았다. 내 불러볼 테니까 맞나봐라."
"네!"
이렇게 해서 나는 이번 공사의 감독을 섭외했다. 이 사람들이야 옛날 사람이 되어놓으니 자격증 같은 것은 물어보나 마나 분명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무는 백전노장이니 빠삭할 것이다. 반면에 이상백은 건축기능사2급 자격증은 있지만 실무는 제로에 가까우니 이상백을 배우게 하려는 의미가 깊다하겠다. 내가 시간을 보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나는 현장에 있는 아이들의 점심을 해결해줄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커피 다 안 드시고 가세요?"
"매일 먹는 커피인데요, 뭘! 사실 건축설계 사무소에서도 한 잔 하고 온 길이예요."
"치울게요."
"네! 내 건축 현장에 있을 테니 급한 일이라면 택시를 타고라도 오세요. 위치는 요. 청주극장 맞은편의 큰 도로변에 5천 평이 넘는 공터가 있어요. 그 곳 이예요."
"그런 요지가 왜 방치되어 있나요?"
"낸들 압니까? 부자놀음 하는 모양입니다. 아들의 유산으로 남겨준다고 그러고 있대요."
"돈이 썩어 문드러지는 모양이군."
"김 주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어쩐지 이상하네요."
"저도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은 아니 예요."
"그렇겠죠? 저 갑니다."
"네, 수고하세요!"
나는 그 길로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 돌아와서 보니 기가 차지도 않았다. 일이 별로 줄어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미정이까지 아기는 업고 추운 겨울임에도 땀은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밥까지 떠 먹여줘야 하니?"
내 말의 뜻이 무엇인지는 용케 알고 지용준이 변명을 했다.
"얼어서 풀이 안 뽑힙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 아니냐. 이 돌대가리들아! 내가 분명 뭐라 했어. 여기에 마사토와 자갈을 붓는다고 안 했어. 그러면 굳이 힘들여 뽑을 필요가 뭐야? 당장 가서 낫사와 이 돌대가리들아!"
"낫 살 돈도 안 줬으면서........."
남희태가 꾸덜거렸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네 옆의 형수 아니 사모님은 뒀다 뭐하게? 너희들하고 같이 풀 뽑고 있다고, 일용 노동자인 줄 알아? 그만한 돈은 다 가지고 있으니, 달라고 해야지. 안 그래, 여보?"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니면 벌써부터 인기 관리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미정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 잘못이 커요.
'낫!'
소리 한 마디만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 예요? 다들 열심히 해서 배고플 거예요. 어디 좋은데 모시
고 가서 점심이나 사주세요."
여자는 자고로 미정이 같아야 한다. 남자가 혼을 내키는데 같이 거들어 동조하면, 그 집안에는 일꾼이 되었든, 일반 직원이 되었든, 얼마 붙어있지를 못한다. 한 쪽에서 혼을 내키면 옆에서 이들을 감싸주고 변호해주면, 그 여자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직율이 훨씬 적은 게 사실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금방 미정의 말이 효과를 보았다.
"역시, 우리 사모님! 최고야!"
남희태가 엄지손가락 까지 치켜세우며 말했다.
"가자!"
"나는 짜장면!"
이상백의 말에 내가 돌아보며 말했다.
"역시 촌놈은 못 속여."
"나도 짜장면."
동조하는 지용준을 보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놈들까지 촌놈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뭘로 먹고 싶어?"
나는 제일 쳐져 걷고 있는 미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는 짬뽕 요."
"천상 중식집으로 가야겠다."
"사장님 나는 볶음밥입니다."
남희태의 말에 내가 소리를 질렀다.
"일도 못한 놈들이 뭐가 그렇게 복잡해. 다들 미정이만 빼고 짜장면으로 통일 해!"
"아휴! 저 독재자!"
미정의 말에 뜨끔해, 나는 아무 말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점심 식사를 끝낸 나는 미정이까지 낫 한 자루씩을 사주고 그곳을 떠났다. 미정이는 들어가래도 막무가내로 같이 일하겠다고 버텼다. 요즘 운동을 너무 안 했다나, 뭐라나.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미정이의 설득은 포기하고,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네! 한국일보 지사입니다."
"난데요. 전화 받을 총무 정해졌으면 택시 타고 전신전화국으로 오세요."
"왜요? 저 혼자 처리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이 붐비는 카운터 앞에서 여자가,
'내 돈 줄 테니, 전화번호 좋은 것으로 뽑아 주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돈을 찔러주는 대도 요령이 있어야 돼요."
"저도 한참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바로 택시 타고 나오세요."
"네, 사장님!"
나는 현장에서 10분 거리에 있기에 천천히 걸어서 전신전화국으로 향했다. 얼추 시간이 맞았는지 마침 김 주임이 택시에서 내렸다.
"여기요."
"네, 사장님!"
빠른 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가오는 김명자 주임이었다.
"이럴 때는 팔짱을 껴도 괜찮습니다."
"네?"
내 말이 너무 뜬금없었다는 듯 의문의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는 김 주임이었다.
"농담이었습니다. 인수인계는 잘 되어 가고 있나요?"
"곧 소장들은 빠져도 될 것 갔습니다. 모두 인수인계도 마치고 사람도 구해졌답니다."
"총무들은 요?"
"시일이 좀 걸려야 할 듯합니다. 거기까지는 아직 사람 수배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오늘 전화 좀 많이 왔습니까?"
"오는 전화는 불이 나나 막상 이력서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열에 서넛?"
"분명 동종업계 최고대우라고 명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 정도지요. 아니었으면 더 형편없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일단 대기 순번표나 뽑으시죠."
"네, 사장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전화국 내부로 돌아와 그 앞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김 주임이 바로 번호표를 뽑아왔다. 나는 안내라고 써 붙인 카운터 앞으로 갔다.
나는 주머니에서 기자증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강 대정 기자라 합니다. 잠시 국장님 좀 뵐 수 있을 까요?"
"소속이 어디이신지?"
내가 신분증을 보여 줄 때 빠르게 한 번 보여주는 시늉만 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으므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호통을 칠까하다가 너무 경우가 없는 것 같아서 아예 기자증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보세요. 마르고 닳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