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의 두 번째 계단-- >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은 칭찬할 일이다만, 나는 네가 걱정스럽다. 돈이란 것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다. 하고 절대 저승으로 싸 짊어지고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곧 신외지물(身外之物)이란 말이다. 하니 돈의 노예가 되지는 마라. 그리고 ......."
여기서 말씀을 끊으신 아버지는 어느 새 비어있는 자신의 잔에다 당신 스스로 술을 따라 급히 한 잔을 잡숫고 말씀하셨다.
"돈이 사람을 망치기도 한다. 비근한 예로 네 할아버지가 그렇잖니? 당신 혼자 술과 여자로 일생을 호의호식하셨지만, 나 하나 소학교 문턱에도 안 보내시고......... 참 내........!"
목이 메이는지 아버지는 또 급히 술병을 찾으셨다. 그래서 내가 급히 아버지의 잔에다 술을 따라드렸다. 한 잔을 급히 잡수신 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지셨다.
"배운 학문 다 팽개치시고 당신은 일생을 허비하시고, 자식들에게는 못할 짓 한 사람이 성공한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니? 이게 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물이 있
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겠니? 그러니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교훈 삼아서라도, 돈을 버는 것까지는 좋다마는, 올바르게 써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약주 더 하시겠어요?"
"한 잔만 더 하자. 네 어미 잔소리 듣기 싫어, 이 한 잔으로 끝낼 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도 가볼 때가 있어서요?"
"어딜?"
"저랑 초등학교 동창 아시잖아요? 상백이라고."
"아, 알지. 참 상민이는 어떻게 됐니?"
"그놈이야 어릴 때부터 나랑 수재로 이름을 날린 놈이니, 이번에 서울대 상대를 봤는데, 아깝게 떨어진 모양 이예요."
"그래서 걔네 부모가 통 말이 없었군."
"저도 같이 청주 살아도 그 놈 얼굴 보기 힘들어요. 매일 처먹고 공부만 하느라고 방구석에서 나오지도 않아요."
"하긴 그럴게다. 걔가 머리도 좋지만 원체 노력파 아니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럼, 전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네 어미 밥 짓는다고 나갔으니, 해 떨어지기 전에 일찍 돌아와라."
"네, 아버지!"
그 길로 나는 미정이와 할머니에게도 잠깐 다녀올 것이 있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상백이 있냐?"
"어, 누구여? 아니 네가 여기까지 웬 일이냐?"
내가 부르자마자 마치 기다린 사람마냥 방문을 활짝 열고 나타나는 상백이었다.
"내가 못 올 때를 왔냐? 왜 이렇게 놀래?"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랐어도, 네 얼굴 보기가 대통령보기보다 힘드니 그렇지, 인마!"
"아무리 그렇더라도 오래간만에 찾아온 친구를 이렇게 문전박대하기냐?"
"아, 너무 반가운 바람에 깜빡했다. 어서 들어오너라."
"어머니한테 먼저 인사부터 드리고. 부엌에 계시냐?"
"부엌에 계셨으면 네 목소리 듣고 벌써 달려나오셨을 어머니시다. 마실가셨다."
"그래?"
쿵
"아이코!"
"하하하........!"
나보다도 7cm가 더 큰 상백이가 나를 쳐다보며 무심코 방안으로 들어가다가, 저희 집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친 것이다. 지금의 이 상백이도 컸지만, 금번에 서울대 상대를 봐서 떨어진, 이 상민이라는 친구도 180cm 정도로 당시로서는 무척 큰 키였다. 그래서 우리가 같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꺽다리 삼형제라는 놀림도 무척 많이 받았다. 한 마을에서 이렇게 큰 세 사람이 함께 다니니 아이들이 놀림 반 궁금함 반으로 매번 묻는 게,
'너희 동네에는 키를 크게 하는 나무라도 있느냐?'
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답하길 '신발에 비료를 넣어 신 다니면, 우리마냥 키가 클 수 있다'고 해 아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아무튼 상백이와 마주앉은 나는 녀석의 근황부터 물었다.
"대학시험은 어떻게 됐냐?"
"꼴 난 지방대도 떨어졌다."
이 녀석은 내가 증평공고로 전학 가서 다시 만나게 된 친구다. 거기서는 나 다음으로 공부를 잘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지만 199점을 받아, 간신히 충북지역 예비고사에는 붙고, 서울지역은 떨어져 충북밖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더니 그나마 청주대 건축과에도 떨어진 모양이었다. 참고로 올해 충북지역 예비고사 커트라인이 198점이었다. 서울은 2백 몇 점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나는 공부에 소질이 없는 놈인가 보다. 나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런데도 떨어지니, 정말 재수를 한다 해도 자신이 없다."
내가 알기로 이 녀석도 굉장한 노력파였다.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녀석으로부터 들은 바는, 그나마 중3때부터 노력해 증평공고라도 들어갔다 한다. 기초가 너무 부실했으니, 뒤늦게 아무리 노력해도 단기간 내에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가서도 열심히 노력은 했지만, 공고 특유의 가르치는 과목과 기초부족의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금번에 고배를 마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천상 취직이나 해야지 뭐."
"취직할 곳은 정해졌어?"
"아니,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벌써부터 어머니는 성화시다. 놀고먹는다고."
"하하하........! 홀어머니 혼자 너를, 네 엄마 말대로 고등가까지 가르쳐놨는데, 놀면 쓰냐?"
"너까지 그러기냐?"
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 회사로 와라!"
"무슨 소리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나 이번에 전문건설회가 하나 차렸다. 새시대리점도 하나 내고."
"공부는? 서울로 가야되잖아?"
"왔다갔다하며 해야지. 그러자니 너같이 믿고 맡길 놈이 필요하다."
"신문업은 때려치우고."
"응."
더 이상 설명하기 싫어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증평공고로 전학 가서 유일하게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내 사생활에 대해서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물론 내가 얘기해 줬기 때문이었다.
"명희는 잘 있냐?"
"야, 쓸데없는 대로 말 돌리지 말고, 올 거야, 말거야?"
"네가 그렇게까지 간곡하게 말하니, 이 몸이 가서 한 수 지도를 해줘야지 어쩌겠니?"
"지도? 꼴 같지 않은 소리하고 있네."
"꼴이고 뭐고, 정말 명희는 어떻게 된 건데, 동네 소문에 의하면 네가 데리고 산다며?"
"그 문제는 나중에 자세히 얘기 해줄게."
"뭔 문제가 있구나."
남의 아픈 데를 찌르는 녀석이었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뜨기까지 했다.
"네가 싫으면 나나 줘라. 어려서부터 너랑은 약혼이 된 사이라고 해서, 내 침만 삼켰잖냐?"
"너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래?"
"갑자기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냐?"
"월요일부터 당장 오전 9시까지 한국일보 청주지사 사무실로 출근해!"
"알았다. 꼭 그 시간에 가마."
"나 간다."
"벌써 왜? 내 말에 화났냐?"
"그런 일 없다. 약속 지키고."
"그럼, 나도 한 칼한다. 약속하면 칼이거든."
"제발 그렇게 해라!"
"멀리 안 나간다."
"알았다. 청주에서 보자."
"그래."
나는 그길로 녀석과 헤어져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오며가며 명희네 식구를 안 만나 천만다행이었다. 내 기척이 나자마자 어머니가 부엌에서 뛰쳐나오셨다.
"참말이냐?"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얼마? 3천만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메?"
"아, 그 얘기요. 제 말 그대로 예요."
"진짜, 이젠 네 동생들 교육비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렇지?"
"언제 제가 빈 말 해요. 지난번에 제가 약속한 사항이잖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못 미더웠다."
"이제는 믿음이 가세요?"
"하모, 하모! 여부가 있니, 참 잘했다. 아무튼 장하다! 내 아들! 어디 한 번 안아보자."
"어머니 왜 이러세요?"
"네 마누라가 질투할까봐 그러냐?"
"참 내, 어머니도.........!"
실소를 금치 못하며 나는 어머니를 방안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내 저녁상 갔고 들어갈 테니, 어서 들어가라."
"네, 어머니! 그런데 다정이 엄마는 뭐하고 있어요? 저녁 짓는 것도 안 도와주고?"
"나와서 거든다는 것을 내가 못 나오게 했다. 애 하고 오히려 내가 더 정신 사납다."
"알았어요, 어머니!"
나는 그길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미정이의 태도가 이상했다. 계속 실실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 예요."
여전히 웃으며 대답하는 미정이의 태도는 이 순간뿐이 아니었다. 고향집에 있는 동안 내내 그랬다. 그 이유를 나는 청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알았다. 이에 반해 할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전했다. 그 이유 또한 나중에 유추할 수 있었는데, 한 마디로 할머니는 경제관념이 없는 분이셨다.
아니 돈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분이셨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그 많은 재산을 다 팔아먹어도 방치하셨던 게다. 아무튼 이후 우리는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아내는 내 동생들과 윗방에서 함께 자고,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사랑채에서 이날 밤을 보냈다.
한마디로 나는 이날 독수공방을 했다. 아니 독수공방은 아닌가? 할머니와 함께 잤으니.
청주로 오는 버스 안.
살며시 내게 어깨를 기댄 미정이가 물었다.
"정말, 자기! 그 많은 돈을 번거야?"
나는 비로소 미정이가 고향집에서 시종 미소 짓고 있던 까닭을 알았다.
아버지에게 내가 3천6백만 원의 돈을 벌었다고 얘기할 때, 미정이는 물론 할머니 아니 동생들까지 다 있었으니, 귀머거리가 아닌 다음에야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언제 거짓말 해?"
"아니, 그게 아니고 너무 많은 돈을 벌었다니 믿기지 않아서."
"서방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여~ 봉~!"
더욱 내 어깨에 밀착을 하며 아양을 떠는 미정이었다.
"왜? 할 말 있으면 빨리 빨리 해."
"우리 친정에 농토나 몇 마지기 사주면 안 될까?"
"너무 앞서가지마. 내가 그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도, 아버지 어머니가 그런 소리 하는 것 봤어? 때가 되면 내가 다 어련히 알아서 조치할 테니까. 당신은 잠자코 기다려."
"알았어요. 여보! 내가 너무 주제넘었어요. 기분 나빴다면 용서하세요."
"기분 나쁘지는 않아. 누구나 다 신랑이 나 같이 큰 부자가 되었다면 아내들은 그런 말을 신랑에게 한 번 쯤은 했을 거야. 하지만 때가 있는 법이라고. 지금은 그것을 종자돈 삼아 사업체를 더욱 키울 때야. 그러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분간 기다려!"
"여보, 나 오늘 당신이 너무 너무 존경스러운 것 있지요? 존경심이 가만히 있어도 팍팍 솟아나요."
"그것도 아부는 아니겠지?"
"진심이야!"
새침하게 말하고는 내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하는 미정이었다. 그 모습조차 너무 귀여워 나는 그녀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마침 일요일이라 이날 하루를 집에서 편안하게 쉰 나는 명희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운을 상당히 회복하고 오늘의 업무에 임할 수 있었다. 조금 일찍 출근해 앞으로의 사업구상을 하고 있자니 경리 김명자 주임이 출근을 했다. 9시 15분 전이었다. 다른 때보다도 5분은 더 일찍 출근한 김 주임이었다. 통상 그녀의 출근 시간은 10분 전 9시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의 지시에 의해 두 잔의 차를 들고 들어온 김 주임과 나는, 티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내가 말했다.
"명희의 일이 금방 수습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요. 명희의 공백을 혼자 메우느라 힘들지는 않습니까?"
"할 만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러나 저러나 신문도 다 매각한 마당에 경리 한 사람을 더 뽑기도 그렇고 말이죠."
"어차피 이번 달 수금만 마감 치면, 이곳일은 완전히 손을 떼게 될 터인데, 앞으로 저도 그만두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니, 무슨 섭한 말씀을........ 시집 갈 때까지는 나와 오래 오래 같이 근무합시다. 아시다시피 이제 새시대리점도 내서 그곳에도 경리가 필요하고, 단종 사무실 경리도 별도로 있어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일 잘 마무리 짓고, 바로 그쪽으로 이전하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께서 그만큼 저를 아껴주시는 것 같아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렴, 그래야지요. 그러고 혼자 업무를 보니 업무량이 많이 늘 것 아니겠습니까? 그 보답으로 이번 달은 특별히 보너스로 10만 원 더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염치불구하고 사양치 않겠습니다."
"하하하........! 사양하면 내가 또 섭하지요. 그리고 오늘부터 광고가 나가지 않습니까?"
"네, 사장님!"
"걸려오는 전화는 모두 이력서 제출해서 기다리라고 하세요. 일단 서류전형을 실시해 필요한 사람에 한해 일괄 면접을 실시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제 호칭이 달라졌네요?"
"이제 지사는 손 뗀 것이나 마찬가지고, 새로 대리점 사장에 전문건설업 사장님이 되셨으니, 그렇게 불러드리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아서요."
"역시 현명하네요. 그런데 사적인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내 말에 갑자기 긴장이 되는지 김 주임이 다리를 모으며 말했다.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애인은 있습니까?"
"하나 소개시켜 주시 게요?"
재치있게 되받아 치는 김명자였다.
"김 주임보다는 다 어린 사람들만 알다보니....... 연말연시에는 외롭겠습니다."
"옆구리가 허전하다 못해 시리지요. 쌍쌍이 시시닥거리고 가는 모습을 보면, 쫓아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이때였다. 밖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