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의 두 번째 계단-- >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얘들이 많이도 사왔네요."
어머니는 우리가 사온 것을 일일이 펼쳐놓고 자랑을 하셨다.
"아이고 이건 돼지고기도 아니고 그 비싼 쇠고기, 이건 사과, 이건 또 어머니 잡수시라고 물렁물렁한 홍시도 사왔네요, 이건 대정이 아버지 좋아하는 술. 우선 홍시 하나 잡숴보세요. 어머니!"
"그럴까?"
치아가 다 빠지신 할머니가 홍시를 보고 아주 좋아하신다.
"엄마, 나도 줘."
막내가 쪼르르 달려와 보챈다.
"그래, 그래. 잠시만 기다려."
"엄마, 이거."
막내가 짚은 것은 하필 홍시였다.
"그것은 뒀다 할머니 드시게 내버려두고, 너는 사과 깎아 줄게.'
"홍시도 하나 먹고 싶은데?"
"어여, 가져가 먹어라."
"고마워요. 할머니!"
"저것이 정말, 버르장머리 없이."
막내가 홍시 하나를 가지고 얼른 윗방으로 사라졌다.
"어머니, 저는 쇠고기 잘게 갈아 무국 끓여 올릴 게요."
"그래, 그래. 모처럼 우리 손자 덕분에 쇠고기 한 번 먹어보자."
"네, 어머니!"
어머니가 자리에 일어나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술상부터 봐와. 모처럼 대정이와 한 잔하게."
"많이 잡수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봐오기나 해."
이때였다. 다정이가 으앙 하고 울었다.
"아니 지금까지 잘 놀다, 왜 그래?"
"배고픈가 봐요. 아버님!"
"그래? 데리고 가 젖 먹여라."
"네, 아버님!"
"그러나 저러나 낯을 안 가리니 신통하네."
"정말 오늘은 신기하네. 다른 사람한테는 가기만 하면 우는데........"
"그게 다 핏줄이 통해서 그런 거야."
할머니의 말이 모두 억지인 것을 알았지만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미정이 다정이를 안고 윗방으로 올라갔다. 이때 부엌에 가셨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손에는 채반을 든 채였다.
"우리 며늘아기는 어디 갔어?"
"애 젖 먹이러 윗방에요,"
"이리 내려와 고구마 좀 먹어봐라. 촌에서야 뭐 먹을 게 있니. 그저 구진하면 이거나 삶아먹고 그렇지."
"그게 구진할 때 먹는 거예요? 완전 한 끼 식사대용이죠."
나의 말에 아버지가 우스개소리를 하셨다.
"며늘아기도 있는데, 우리가 너무 못 사는 테는 내지말자."
"하하하........!"
나만 크게 웃었지 어머니는 맺힌 것이 많은지 웃지도 못하셨다. 뒤늦게 미정이의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젖 좀 먹이고 내려갈게요."
"그래, 그래."
어머니는 다시 나가셨다. 잠시 후, 교대로 다정이를 제우고 미정이가 안방으로 내려왔다.
"당신 고구마 하나 먹어봐."
"네!"
내가 고구마 하나를 집어 미정이에게 권했다. 한입 베어 물고 천천히 맛을 보던 미정이가 말했다.
"굉장히 팍신팍신하고 맛있네요. 아버님!"
"그게 붉은 황토에서 자라서 그래, 다른 밭에다 심으면 그 맛이 안나, 거 희한하지?"
"토질을 타는가 보죠, 뭐."
"아마 그런가 보다."
이때 어머니가 부엌에서 주안상을 들고 들어오셨다.
이때 미정이가 얼른 일어나 받으며 말했다.
"어머님 제가 부엌에 나가 도와드려야 되는데, 다정이 때문에 죄송해요."
"아니다. 우리 집에 오면 아무리 며늘아기라도 손님이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하룻밤 푹 쉬었다 가거라."
"고마워요, 어머님!"
고만한 일에도 눈가가 촉촉해지는 미정이를 보고 내가 한 마디 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돼. 적당히 눈치봐가며 부엌일도 거들어야지."
"알았어요."
"얘는 지금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남의 집 살림살이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서툴러, 오히려 주인한테는 성가시기만 한 게야."
나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않고, 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새언니한테 인사는 했어, 안했지? 이리 와 정식으로 인사들 해라."
나의 말에 9살에 학교를 들어가 올해 중3으로 올라가는 경순이를 비롯해, 둘째 경숙이, 막내 경자까지 쭈뼛쭈뼛 다가섰다.
"우와, 경순이는 벌써 처녀꼴 나네."
내 말에 그렇잖아도 부끄러움 많은 경순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셋을 맞아 미정이가 먼저 살짝 목례를 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어요. 내 이름은 정 미정 이예요.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언니는 몇 살이야?"
막내 경자의 말에 미정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설 세면 올해 스무 살 이예요."
"우와, 되게 빨리도 시집갔네. 우리 동네도 아직 그런 사람 없는데........"
철딱서니 없는 막내의 말에 더욱 얼굴이 붉어지는 미정이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왜 없니? 저 상태의 딸 누구더라 걔는 열여덟에 시집갔고, 아랫마을 사는.........."
"됐어.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한 잔 따라봐."
"별꼴이네. 이 양반이 이제는 나보고 술을 다 따르라하네. 그런 짓은 어디 기생한테나 가서 시키세요."
쌩 하는 어머니 때문에 분위기가 싸 해지자 얼른 미정이가 나섰다.
"아버님,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그래, 그래! 어디 우리 며늘아기 술 한 반 받아보자."
이를 보고 있던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도 한 잔 해라."
술에 질린 어머니로부터는 여간해서 듣기 힘든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러고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도 한 잔 하실래요?"
"술이라면 진절 넌덜머리를 내는 분한테 그게 뭔 소리냐?"
어머니의 말과 달리 할머니는 점잖게 받으셨다.
"나는 한 잔만 먹으면 취해서 하루 종일 자야 된단다."
"그럼, 조금만 잡수시면 되잖아요?"
"그럴까?"
"어머니는 질리지도 않으셨어요?"
어머니의 말에 할머니가 아련한 눈으로 말씀하셨다.
"살아서는 그런 사람도, 이젠 벌써 그립다."
할머니의 말씀에 방안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이런 분위기를 내가 깼다.
"여보, 당신이 할머니 한 잔 따라 드려."
"네!"
나는 내 잔을 들어 할머니에게 드렸다.
"아주 조금만 따라라. 맛이나 보게."
"네, 할머님!"
정말 조금 따른 술을 입만 대셨다 떼신 할머니가 진저리까지 치며 말씀하셨다.
""아, 쓰다!"
"어머니는 정종인데 뭐가 그렇게 쓰다고........"
아버지의 말씀을 할머니가 받으셨다.
"술 좋아하는 너희들은 모르겠다만, 진짜 나는 술이 쓰다."
"그러니까 약주를 못 하시는 거예요."
"그런가?"
모자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갑자기 나서셨다.
"나도 한 잔 하야겠다."
"아니, 내가 권하는 술은 마다하던 사람이.........."
"우리 며늘아기 술 한 잔 받고 싶어서 그래요. 왜요?"
"하긴 우리 며늘아기가 너무 절색이라 나는 누가 채 갈까봐 겁난다."
"아버지!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시는 것 아니 예요?"
나의 항변에 아버지가 발끈하셨다.
"그만큼 우리 며늘아기가 예쁘다는 말이지 이놈아.........!"
"하하하........! 그런 뜻이었어요?"
"저런, 저런 팔불출........!"
아버지의 혀 차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미정이는 어머니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나도 미정이가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받고 셋은 모처럼 건배까지 하며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바로 이른 저녁을 한다고 부엌으로 나가시고, 아버지와 나의 술자리만이 이어졌다. 한 잔을 가볍게 비운 내가 안주도 집지 않고 물었다. 사실 안주라야 촌에서 풀밭이라 먹을 것도 없었다.
"동선이 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하시나요?"
"지난번 할아버지 장례식 때도 오셨잖니?"
"그래서 제가 물어보는 것 아닙니까?"
"지금 서울에서 남 집는 일 감독하고 있잖니."
"혹시 전화번호는 없을 테고, 주소 있으세요?"
"전화번호가 있다. 집주인 댁 것이라더라. 알려줄까?"
"네!"
아버지는 곧 할아버지가 쓰시던 문갑에서 전화번호 메모장을 들고 오셨다. 나는 그 아저씨 전화번호를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기억, 니은, 디귿 순으로 쓴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인데다 글씨는 왜 이렇게 크게 써놓았는지. 아무튼 나는 한참을 뒤적여 내 수첩에 전화번로를 메모해 두었다.
"그 사람은 왜?"
서울 동선이 아저씨는 아버지와 팔 촌간으로 아버지보다 연세가 한 살 더 많은 분이셨다.
"청주에 사무실 좀 지으려고요."
"뭐하는데 사무실이 필요해?"
"새시 대리점 냈어요."
"뭐? 그게 뭐하는 것이냐?"
"창문이나 저런 미닫이문을 대신하는 도시에 가면 왜 있잖아요? 밤색이나 흰색 알루미늄으로 된 창문 말 이예요."
"그래 봤다."
"그런 건축자재를 팔기도 하고, 그 것을 건물에 설치하는 공사도 할 거예요?"
"네가 기술이 있냐?"
"기술자 두지. 제가 왜 해요?"
전생에서 배웠다고 말 할 수는 없고, 이런 답변 밖에는 아버지에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기술이 없으면 남 부리기가 쉬운 세상이 아니다. 항상 조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신문사는 어떻게 되는 거냐?"
"벌써 남에게 다 넘겼어요."
"얼마를 받고?"
"총 3천6백만 원 받았어요."
"뭐?"
아버지는 정말 입을 떡 벌리고 한동안 다물지를 못하셨다. 얼마나 놀라시는지 졸도를 안 하신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