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의 두 번째 계단-- >
나는 미정이가 준비를 하라고 다정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다정아, 아빠 해봐!"
이제 제법 말귀를 알아들어 어눌하지만 나를 부른다.
"아바.......!"
"그래!"
쪽!
다정이의 앙증맞은 입술에 뽀뽀를 했다. 그런데 이놈이 얼른 손으로 입술을 닦는 게 아닌가.
"더러워?"
이 말은 무슨 뜻인지 그 의미를 확실히 모르는 듯했다. 제 엄마가 더럽다는 말을 '지지~!
"라고 가르쳐서 그런 모양이었다. 티 하나 없는 맑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시종 깜빡이지도 않고 있었다.
"다정이는 누구를 닮아 이렇게 예뻐?"
"엄~ 마~!"
"젠장, 벌써부터 세뇌교육을 시켜서 말귀를 알아듣는 모양이네!"
나의 중얼거림에 또 흑백이 분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집안에서 미정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애 추워요. 얼른 들어오세요."
"알았어."
나는 다정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 나 미장원에 좀 다녀올까 하는데?"
"그냥도 예뻐! 뭔 미장원이야!"
"정말?"
"그럼, 정말이고말고. 단발머리가 이제 제법 자라 찰랑찰랑 얼마나 예뻐!"
사실이 그랬다. 진심을 담아 칭찬하니 미정이도 미장원 가는 것을 단념했다.
"다 떨어졌네!"
화장을 하던 미정이가 경대 서랍을 마구 뒤지며 하는 말이었다.
"뭐가?"
"오늘 같은 날은 살짝 분이라도 바르고 싶은데, 분도 없고. 그나마 크림도 떨어져 샘플이라도 있나 찾아보니, 그것도 없네요. 루즈라도 바르고 갈까?"
"너무 일찍부터 루즈바르면 혈색 죽어. 아직 파릇파릇해서 얼마나 혈색도 좋고 예뻐."
"사주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 예요?"
"당신이 사고 싶다면 얼마든지 사줄게. 그까짓 게 몇 푼이나 한다고. 정말로 예쁘니까 하는 소리야."
"알았어, 알았어요. 그러나저러나 오늘은 그나마 크림도 하나 못 바르고 가겠네요."
"스킨도 없어?"
"전혀요."
"당장 택시 타고 나가서 화장품을 아예 세트로 구입하자."
"그건 돈 낭비예요. 제가 필요 없는 것도 많이 들어있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꼭 필요한 것만 살게요."
"그래, 그럼. 일단 나가자."
"네! 그런데 당신은 준비 다 됐어요?"
"나야 이대로 그냥 가면 되지, 뭔 준비가 필요 있어?"
"알았어요. 다정이 이리 주세요. 제가 업을 게."
"아니야. 택시 탈거니까. 내가 안고 갈게."
"그러실래요? 등 좀 따뜻하게 하려니까 안 되겠네요. 호호호......!"
사실 아기를 업고 있으면 등뿐만 아니라 배까지 따뜻하다. 포대기로 감싸니까. 미정이가 다시 화장대를 보고 마무리 점검을 하고 일어서자, 나도 같이 따라 일어섰다. 내 품안에는 다정이가 안겨 있었다.
"다정아, 할머니한테 가자?"
무슨 말인지 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은 안 가르쳤어?"
"너무 어려워서요."
"두 분이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들으면 엄청 좋아 할 텐데."
"나는 더 서운할 것 같아요."
"왜?"
"내가 벌써 이렇게 늙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아마 내 생각에는 기쁘면서도 서운할 거야. 내 인생도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말이야."
"맞아요."
"저기 빈 택시 간다."
"택시!"
내 말을 듣고 미정이가 택시를 부르나 못 듣고 그냥 지나쳤다. 내가 불러도 되나 내 목소리가 원래 큰 편이라, 다정이가 놀랄까봐 안 불렀더니 조금 더 걷게 생겼다. 이때 반대편에서 택시가 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틀라는 신호를 해서 그 택시를 탔다. 우리는 곧 본정으로 나가 화장품 할인코너에서 화장품을 샀다. 미정이는 딱 네 가지만 샀다. 스킨과 로션 그리고 분과 떨어진 크림이었다. 그러고는 아양을 떨어 샘플을 잔뜩 얻었다. 게다가 미정이의 깨끗한 피부며 아름다움이 화장품 모델을 해도 되겠다고, 아주머니는 연속 칭찬을 하며 덤으로 많이 주시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의 말에 내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이어 우리는 정육점으로 갔다. 내가 물었다.
"소고기 600g 한 근에 얼마입니까?"
"950원입니다."
"지난번에는 900원에 샀는데........?"
"오른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 예요. 500원 하던 돼지고기도 똑같이 50원씩 올랐어요. 오르면 우리도 좋을 것 하나도 없어요. 비싸다고 그만치 덜 사가시거든요."
"그건 그렇겠네요."
미정이가 맞장구를 치며 또 말했다.
"다섯 근씩이나 사는데 값은 다 받으시더라도, 덤으로 조금만 더 주세요. 아저씨, 네?"
눈웃음까지 치며 주인아저씨를 살살 녹이는 미정이었다.
"그럽시다. 내 색시가 예뻐서 주는 거니 그런 줄이나 아시오."
50대 주인 아저씨도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시종 미정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떼지 못하더니, 조금 더 준 모양이었다.
"두 분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고기를 건네며 하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화사한 웃음으로 화답하는 미정이었다. 이어 우리는 두 집 건너에 있는 제법 큰 슈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무얼 사시게요?"
미정이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과일하고 술."
"또 술?"
"정종으로 한 병만 살 거야."
"자기, 그런데 우리 집은 한 번 안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미정이었다. 정종 이야기를 하니 자신의 집 생각도 나는 모양이었다. 당시 남의 집을 찾아갈 때는 정 종 한 병이면 최고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과일바구니 하나 더 얹으면 금상첨화고, 고기까지 사가면 완전히 칙사 대접을 받았다.
"약혼 전에 거기도 한 번 갔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될라나 모르겠는데."
"쳇, 오늘과 같이 시간 만들면 될 것 아니 예요."
"그렇게 한 번 해보자고."
"나, 당신 믿어요?"
"알았어. 눈웃음 좀 치지 마. 요새 왜 안 하던 버릇을 하고 그래."
"그러니까 고기도 덤으로 더 얻었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앞으로는 절대 그런 짓 하지 마. 솔직히 내 각시가 남 앞에서 웃음 짓는 것도 싫어."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질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질투는 누가 한다고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소리는 질러요?"
"됐다고, 얼른 살 거나 사가지고 가자고."
"할 말 없으니까!"
"어허.........!"
내가 큰소리를 내자 얼른 꼬랑지를 내리는 미정이었다.
"알았어요. 다 내 잘못 이예요."
"알면 됐어."
우리는 아옹다옹 하느라고 슈퍼 앞에서 한참을 있었다. 우리는 곧 슈퍼로 들어가 정종 한 병과 사과 한 바구니를 샀다. 거기에다가 예상에 없던 홍시도 한 상자를 샀다. 이 없는 노인들이 좋아한다며 그녀가 우겼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길거리에서 또 다투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가자고 하고, 미정이는 돈 아깝다고 버스를 타고 가자는 바람에, 실랑이가 벌어졌던 것이다. 결국 내가 다정이까지 들먹여 우리는 택시를 타고 출발을 하게 되었다. 청주 시내를 벗어나자 이제는 완전히 비포장 길 이었다. 덜커덩 덜컹, 쿵 쾅, 쿵쾅!
엉덩이에 살집이 없는 사람은 엉덩이 다 깨지겠다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 만큼 도로 사정이 안 좋았다. 여름철 비가 와서 곳곳에 생긴 웅덩이가 그대로 방치되어, 이런 불상사를 야기하고 있었다. 그래도 택시 운전수가 요령 있게 험한 곳은 피해가서 이만하지, 아니면 정말 천정에 몇 번씩 머리를 부딪쳐야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십 분이 채 안되어 택시는 내수 부근을 달리고 있었다.
"여보, 저기 저쪽으로 쭉 들어가면 우리 집이 나와요."
미정이 차장 밖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초정 가는 길 아니야?"
"맞아요."
초정은 천연 광천수로 유명한 곳으로 세종대왕도 이곳까지 오셔서 눈병을 고치지 않았다던가. 또 지금은 일화에서 이 물을 가지고 천연사이다를 만들기도 하는 유명한 약수터가 있는 곳이었다.
"다음에 한 번 들르자고."
"네, 당신은 신용 있는 사람이라 나는 꿈속에서라도 믿어요."
"그 말까지 듣고 내가 안가면 나는 정말 나쁜 놈 되네."
"호호호........!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됐고. 다정이는 자?"
"네, 칭얼거리더니 어느새 잠들었네요."
이런저런 대화 속에 우리는 약 50분을 달려 고향 마을에 진입하고 있었다. 이때의 시간이 얼추 4시가 다 되어가는 즈음이었다. 짧은 겨울 해는 벌써 서천으로 많이 기울어 얼마 안 있으면 해가 떨어지게 생겼다. 어쨌든 지난번에는 동구 밖에서 내려서 걸어갔으나 오늘은 다정이도 있고 해서 아예 마을까지 진입을 했다. 멀리서 택시가 동네로 들어오자 웬만해서는 이런 차를 볼 일이 없는 아이들이 택시를 향해 쫓아왔다. 제법 추운 날씨에 미나리꽝에서 타던 썰매와 팽이는 모두 그대로 버려둔 채였다. 뽀얀 먼지를 마시면서도 아이들은 계속해서 택시를 쫓았다. 이 당시 이 마을은 자전거 한 대만 쌀장수가 끌고 와도 신기해하며, 짧은 다리를 이용해 어떻게 든 자전거를 배우던 시절이었기에, 택시는 마냥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이내 택시가 멎었다.
내가 계산을 하고 내리자 몰려있던 아이들 간에 다툼이 일었다.
"우와........! 대정이 아저씨다!"
"아저씨가, 뭐냐 인마! 형님이지."
"그러다 너 혼난다."
나는 녀석들에게 한 번 씨익 웃어주고는 다정이를 안아들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여보, 이걸 나 혼자 어떻게 다 들어요."
"그런가?"
모처럼 집에 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당신이 다정이 안아. 내가 나머지 다 들고 갈게."
"네!"
"거, 치맛단 좀 치켜 올려 바닥에 다 끌리겠다."
"네!"
그러고 보니 이럴 때 미정이가 한복을 입으면 엄청 예쁠 것 같다. 어차피 약혼식을 하려면 한 벌 맞추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짐을 모아들었다.
"어머니! 나 왔습니다."
나는 싸리문 밖에서부터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네가 웬일이냐? 아, 우리 며늘아기도 왔네. 우리 손녀딸도."
모처럼 어머니가 어머니답지 않게 수선을 피우는 사이 식구들이 모두 몰려나왔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왔냐? 이리 줘라!"
"네, 어머니!"
"아이고, 정말 많이도 사왔구나!"
이때 아버지가 나오셔서 무뚝뚝하게 한마디 하셨다.
"왔냐?"
"네, 아버지!"
"우리 며늘아기와 손녀딸도 왔구나! 애기 좀 이리 줘봐라!"
이때의 아버지 표정은 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급 방긋이셨다.
"아니, 다정이 아버지가 웬 일이세요? 애들 키울 때는 생전 안 안아주던 양반이."
"애들하고 손녀하고 똑 같아? 허허........! 그놈 참, 밉게도 생겼다."
아버지의 말에 미정이의 표정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샐쭉한다. 그래서 내가 미정이의 귀에 다 대고 속삭였다.
"옛날 사람들은 예쁘다는 소리를 밉다고 해. 왜냐하면 옛날에는 어려서 아이들이 좀 많이 죽었어? 그러니까 아이가 예쁘다고 하면 귀신이 시샘을 내서 일찍 잡아간다고, 저런 표현을 쓰는 거야."
"네에,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우와.........! 예쁘다! 누구 예요?"
"오빠, 오빠!"
둘째의 물음에 대답할 새도 없이 나는 막내에게 시달려야 했다. 어째 안 보이나 했더니 바깥 화장실에서 이제야 튀어나온 막내가, 나에게 달려들어 어리광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이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할머니부터 뵙자!"
"네!"
지금까지 문을 열고 우리의 거동을 살피시던 할머니가, 우리가 그쪽으로 가자 간신히 일어서시는데, 입에서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삭신아!"
"그냥 앉아 계세요. 할머니! 지팡이는 어쩌시고요?"
내 말에 할머니는 다시 그냥 주저앉으셨다.
"할머니, 안방으로 모실까요?"
"그러자 다 모인 자리에서 얘기 좀 하자."
"네, 할머니! 업히세요."
나는 문지방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때맞추어 미정이가 인사를 했다.
"할머니, 내 색시예요. 예뻐요?"
"예쁘긴 예쁜 것 같다마는, 눈이 침침해서, 원.........."
나는 할머니를 업고 안방으로 향했다.
"어여, 어여, 다들 안으로 들어가자."
"네! 할머니!"
할머니는 내 등에 업히셔서 손짓까지 하며 미정이와 나를 졸졸 따르는 동생들을 안으로 휘몰았다.
어느새 어머니는 선물은 안방에 두시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 또한 벌써 방으로 들어가 계셨다. 방안으로 들어온 나는 할머니를 아랫목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동생들도 들어와 줄줄이 윗목에 앉았다. 함께 들어와 이리저리 방안을 살피는 미정을 보고 아버지가 한 말씀하셨다.
"며늘아기, 너도 거리 앉아라. 서있지만 말고."
"네에. 그런데 아버님 저 액자에 걸려있는 사진 중에 이 이도 있어요?"
"딱 한 장 있잖아. 거, 고추 내놓고 찍은 사진."
아버지의 말에 발그레 달아오른 미정이 액자를 향해 가깝게 다가갔다.
"뭘 봐! 남의 귀한 고추는 그냥 보는 게 아니야! 돈 내고 봐!"
"벌써 볼 장 다 본 것 아니냐?"
"하하하.........!"
모처럼만에 하는 아버지의 농담에 나는 대소를 터트렸고, 미정이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윗방으로 달아났다. 이때 어머니가 부엌에서 들어오시며 참견을 하셨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아버지 때문에 웃었어요."
"무슨 얘기인데?"
"나중에 아버지한테 들으시고, 미정이는 어디 갔어?"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께 절해야 되는 것 아니야?"
"너는 애들 듣는데, 미정이가 뭐냐? 미정이가. 각시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내 말에 미정이가 아직도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안방으로 내려왔다.
"할머님! 절 받으세요!"
"오냐, 오냐! 어디 우리 손자며느리 절 좀 받아보자. 내가 시방 오래 살다보니, 이런 날이 다 있구나!"
"할머니, 증손녀도 한 번 안아보시겠어요?"
"아서라! 마음 같아서는 백 번이라도 안아주고 업어주고 싶지만, 그러다가 같이 자빠질까봐 겁난다."
"하하하........!"
"호호호.........!"
미정이는 크게 웃지도 못하고 입을 가린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웃음의 여운이 가시자 내가 미정이 보고 말했다.
"같이 절하지."
"네!"
"할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
"만수무강하세요, 할머님!"
"그래, 그래! 너희들도 오래 살고."
"하하하........!"
"호호호.........!"
할머니의 말씀에 다시 한 번 웃음보가 터지는 우리 가족들이었다. ============================ 작품 후기 ============================감사하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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