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43화 (43/322)

< --오직 그대만을 위하여-- >

레스토랑을 나온 우리는 곧 극장으로 향했다. 남주동에 있는 자유극장은 너무 멀어 가까운 곳에 있는 청주극장으로 갔다. 그 옆에는 현대극장이 기역자 형태로 나란히 붙어있었다. 청주 극장은 개봉관이고, 현대극장은 똑같은 가격에 2가지를 상영해주는 곳이었다. 상영 프로를 보니 청주극장은 '흑권'이라는 중국 무술 영화를, 현대극장은 '14인의 여걸'과 '이별'이라는 프로를 상영하고 있었다.

"어느 걸로 볼래?"

"기왕이면 2개짜리로. 제목들도 다 마음에 들고."

"무술 영화는 취미 없어?"

"응!"

"나는 그게 좋던데?"

"오늘은 그냥 이별 보자. 응~?"

보채는 아이마냥 칭얼거리니 나는 마지못해 현대극장의 표를 끊었다.

어두운 실내를 더듬더듬 더듬어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한 쪽 눈은 감고,

한 쪽 눈을 뜨고 극장에 들어가야 쉽게 어둠에 적응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매번 자리를 잡고 나서야 생각이 날게 뭐람? 나는 내심 투덜거리며 전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상영되는 영화의 내용을 보니 이별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한창 갈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파리를 배경으로 신성일과 김지미, 오수미 세 명의 주연 배우가, 신성일을 가운데 두고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조금 보다보니 진부한 내용이라 대충의 결론이 유추되었다. 재미가 없어졌다. 나는 곧 식곤증이 몰려왔다. 추가로 등심 이인 분을 더 시켜 합이 오인 분에, 와인 두 병, 게다가 밥까지 한 공기를 먹고 났더니, 식곤증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정을 좀 더 옆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그녀의 어깨를 빌려 잠을 청했다. 내가 잔다니 미정은 투덜거렸지만 곧 조용해졌다. 영화에 빠져 뚫어지게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를 잤을까, 미정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영화 다 끝나가요."

눈을 비비고 화면을 보니, 패티김의 이별노래가 흘러나오면서 마지막 장면이 상영되고 있었다.

벨이 울리며 실내가 환해지는데 미정이 엎드려 있었다.

"왜 그래?"

"몰라요?"

강제로 얼굴을 들어 올리니, 얼마나 울었는지 미정의 눈이 토끼 눈이 되어 있었다.

"뭘 그 까짓 영화를 보고 그렇게 울어?"

"나 안 버릴 거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는지 별 소릴 다 하는 미정이었다.

"영원히 당신만 사랑할 테니까, 어서 일어나 가자고."

"정말? 나 한 번만 안아줘요."

"이 사람 많은 데서?"

"상관없어요."

영화를 보고 마음이 많이 여려진 모양이었다. 전에 명희 얘기도 한 적이 있어 더 한 것 같았다. 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미정이 일어서서 양팔을 벌렸다. 내가 다가가서 살며시 끌어안았다. 미정이 더욱 힘을 주어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리고 매달려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여보! 나 버리지 말아요?"

"나도. 하늘만큼 땅만큼!"

"쳇, 재미없어."

미정은 곧 내 품을 벗어나더니, 옆 좌석의 다정이를 들쳐 없었다.

"가요, 여보!"

"손잡아. 넘어지면 큰일 나."

내 말에 웃음 띤 얼굴로 손을 내미는 미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모처럼 나는 지사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비교적 늦은 시각이었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사장님! 혹시 오시면 박 부장님이 잠깐 자신의 사무실로 들러 달라 시던데요."

나는 김 주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하고는 물었다.

"별일 없지?"

"네."

나는 시선을 돌려 명희를 보고 물었다.

"명희야, 공부는 잘 되고 있냐?"

"그럭저력 요."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열심히 해."

"네!"

왠지 목소리에 생기가 없어 안타까웠다. 나는 다시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는 박 부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내가 노크를 하니 그곳 경리의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왔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이예요, 지사장님. 부장님이 기다리세요."

나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하고, 다시 박 부장의 집무실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 내가 인사를 했다.

"편안하셨습니까?"

"편하지가 못해."

"왜요?"

"매일 활기찬 사람을 만나 원기를 얻곤 했는데, 강 지사장을 만나지 못했더니, 원기 충전이 안 됐나봐."

"무슨 그런 말씀을.........!"

"사실일세."

"고맙습니다."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쁜가?"

"공연히 하는 일 없이 바쁩니다."

"이런 여적지 세워 놨고만. 앉지."

말을 하며 소파를 손짓으로 가리키는 박 부장이었다.

"네."

"다름이 아니라.........."

박 부장이 운을 떼는데 경리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서로의 기호를 아니 자동이었다.

"드세. 마시고 이야기 함세."

"네!"

한 모금 입만 축인 박 부장이 다시 입을 떼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말은 아까도 했는데요."

"하하하........!"

"그럼, 그 말 빼고. 자네가 올해 판매부수 성장 1등으로, 전국 판매왕인 것은 알고 있지?"

"네!"

"원래는 매해 연말에 판매왕은 표창장과 함께 사례 발표를 하게 되어있네. 헌데 자네는 입시 문제로 참석할 처지가 아니었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사실을 장강재(張康在) 사장님께 직보를 드렸네. 그 과정에서 어떻게 1등을 하게 되었는지 꼬치꼬치 물으시기에, 내 밑천이 달리니 이실직고를 했지. 자네가 처음에는 무료기간을 줘서 판촉한 일, 그것이 안 먹히자 과감하게 누구도 고가라 생각도 못했던 자전거를 경품으로 내걸어 판촉한 일. 또.........!"

여기서 잠시 호흡을 고르며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신 박 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가 처음 제안해서 판촉사원제도를 기안하게 된 일. 또 판촉장려금의 지급으로 이제 전국에서 1등 신문이 된 배경 등을 상세히 설명 드렸더니, 뭐라고 하신지 아나?"

"글쎄요. 머리가 둔해서........"

"아, 서울대에 합격한 사람이 머리가 둔하다면 지방대 나온 우리 같은 사람은, 아예 죽으란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고요. 감히 높은 양반들의 의중은 전혀 짐작이 안 된다는 소리지요. 한마디로 예측 불가라는 말입니다."

"그건 그래. 왕왕 범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생각과 말씀들을 많이 하시긴 하시지. 어쩌다 이렇게 얘기가 빗나갔지?"

"아무튼 자네 본고사 끝나고 연락만 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시간을 비워놓을 테니, 서울에 한 번 올라오라 하시 더 만. 이 몸도 겸사겸사 우리 귀하신 몸 모시고 함께 가게 생겼고."

"다 좋은데, 이번에 어째 부장님이 영전이 안 되셨죠?"

"작년 고과를 가지고 올 3월에, 일제히 인사가 단행되네. 나도 기대하고 있네. 안 되면 섭하지. 하하하.........!"

자신이 너무 자신을 추켜세운 셈이 되어 무안했던지, 박 부장이 끝에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언제 시간 나십니까?"

"나야 항상 시간이야 많지."

"내일 오전 11시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서 올라가는 시간이 있으니."

"좋네. 내 전화를 걸어 확실한 약속을 받고, 다시 자네에게 알려줌세."

"알겠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신문을 내놓은 것으로 아는데? 또 주 기자의 말로는 건축 계통을 알아보고 다닌다는 말도 있고."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아주 오늘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이렇게 운을 뗀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지사를 동청주와 북청주로 분할하여 매각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단종면허는 취득했고, 새시대리점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까지. 그리고 말없이 상의에서 봉투를 꺼내 박 부장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

"그동안 잘 보살펴 주신 후의에 대한, 감사의 인사입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능구렁이가 다 되어 벌써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대충 들여다보고 있는 박 부장이었다.

"몇 장인가?"

"오십 장입니다."

"확실히 자네의 로비는 범인의 상상을 뛰어넘네. 대 사업가가 되겠어."

기분이 좋은지 나를 띄우는 박 부장이었다. 그리고 나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던 박 부장이 말했다.

"지국을 할 임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데려오게. 둘이 되었든, 셋이 되었든."

분할을 승인한다는 말이었다.

"고맙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조아린 내가 말했다.

"잠시 결재할 서류가 있어, 제 사무실에 있겠습니다."

"내 약속받는 대로 자네 사무실로 찾아감세."

"기다리겠습니다."

이후 박 부장이 와서 전하길, 내일 오전 11시에 한국일보 본사 사장실에서, 장 사장과의 면담이 잡혔다는 통보를 박 부장으로부터 받았다. 익일 오전 11시 한국일보 본사 사장실.

비서의 안내로 박 부장과 나는 사장실 옆 접견실로 안내되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곧이어 아가씨가 들어와 차 주문을 받아갔다. 잠시 후 주문한 차가 나왔다. 박 부장과 내가 내온 차를 홀짝이고 있는데, 근엄한 안색의 장 사장이 한 사람을 대동하고 함께 들어왔다.

박 부장이 군기든 이등병처럼 총알처럼 튀어 일어났다. 그 바람에 마시던 차를 바지에 조금 엎질렀다. 나는 내심 실소를 금치 못하며, 노련한 병장처럼 마시던 차를 다 삼키고, 느긋하게 일어나 들어온 사람들을 주시했다. 나의 행동거지에 편집국장이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가 폈다. 누구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지만, 나는 이제 지사도 내놓아 특별히 사장이라도 어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 차이가 행동에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먼저 손을 내밀며 말을 하는 장강재 사장이었다.

"자네가 청주 지사장이겠구만."

"네, 강 대정입니다."

군대가 아닌 이상 나는 두 손으로 장 사장과 손을 맞잡았다.

"앉지. 자네 이야기는 박 부장으로부터 많이 들었네. 금번에는 서울 공대에 합격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나는 기왕 면담하는 것, 좋은 인상을 줄 필요가 있어 정 자세로 앉아 답을 했다.

"인재는 인재야. 긴말 않겠네. 한국일보에 입사할 의향은 없나?"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음........! 실망이군.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으니,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시게."

"고맙습니다."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혹시 내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 있으면 이 자리에서 말씀해 보시게."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허허........! 그래?"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웃던 장 사장이 말했다.

"감히 내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내 사장 취임이래, 자네가 처음이네."

나는 그의 말에 그냥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래, 어디 말씀 해보시게. 요구 조건부터."

나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고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기자증을 주십시오."

"그거 아무나 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잖나?"

"명예 기자증이면 됩니다. 보수가 필요 없는 문제 그대로 명예 기자지요. 제가 취재한 것이 보도할 가치가 있으면 하는 것이고, 아니면 말면 되겠지요. 덤으로 취재원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이니, 본사 차원에서도 손해 볼 일은 하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자네 생각이고. 기자증이 남발되어서는 안 되지. 일단 이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고, 자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내게 귀한 것이라면 응하지 못할 이유가, 나 또한 없다고 보네."

이렇게 말하고 빤히 내 눈을 응시하는 장 사장이었다.

"세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자네의 제안이 정말 우리 회사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제안이라면 내 더한 것이라도 내줄 수가 있네."

"첫째........."

이때 여비서가 노크와 함께 소반(小盤)을 들고 나타났다. 사장과 편집국장의 차일 것이다. 그래서 잠시 내 말이 중단되었다. ============================ 작품 후기 ============================뭐, 빼먹은 것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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