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그대만을 위하여-- >
학교를 내려오며 주변의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려고 하니 도저히 줄이 길어서 못 걸겠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계속 내려오며 살펴봐도, 공중전화가 있는 곳이라면 모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고소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앞에서 내린 우리는 바로 매표소로 가서 버스표를 끊었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미정과 나는 전화를 걸기로 하고 공주전화 부스 앞으로 향했다. 터미널은 그래도 학교보다는 덜 번잡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부스에 줄을 서서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10분 쯤 지나니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우선 집에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명희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명희 엄마가 받았다.
"저 대정이 인데요."
"응, 그래, 그래. 잘 지냈고?"
"네, 다름이 아니라 서울대에 합격을 했다고 좀 전해주세요."
"그래? 정말 잘 됐네. 축하해!"
"고맙습니다."
"명희는 잘 있고."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게 공중전화라서 말이죠. 다음에 또 전화 드릴게요."
"그래. 아무튼 축하해! 그리고 명희하고 싸우지 말고 잘 지내고."
"네, 네!"
나는 즉시 전화를 끊고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바로 학교에도 이 소식을 알렸다. 물론 거기서도 축하한다고 난리였지만 사정을 이야기하고 얼른 끊었다. 내가 부스를 나서자 바로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두 통화씩이나 한다고, 기분 나쁜 투로 나를 째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얼굴 두껍게 무표정으로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미정이 있는 곳을 바라보니 미정이도 통화를 하고 있는데, 언제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아마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나 싶다. 뒤에 서 있는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보면.
아마 내 자랑을 실컷 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그래도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긴 통화는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미정이 있는 부스로 가서 옆문을 동전으로 톡톡 두들겼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한 미정이 곧 몇 마디 더하고는 바로 끊었다.
"무슨 통화가 그렇게 길어?"
"좋은 신랑 만났다고 성찬이 엄마가 끝없이 말을 시키길래........"
"당신이 내 자랑하느라고, 통화를 길게 끈 것 아니고?"
"그래요. 내가 자기 자랑 좀 했어요. 왜요? 떫어요?"
정곡을 찔리자 화를 내는 미정이었다.
"웬만치 해야지. 뒤에 기다리는 사람도 있잖아."
"됐네요. 그만 해요."
"아, 아직도 40분은 남았는데, 뭘 하지?"
"가서 잠시 의자에서 기다리면 되지요, 뭐."
"너무 무료해서. 좋은 방법 없을까?"
이때 다정이가 깨어나 칭얼거렸다.
"배고픈 모양인데, 젖병 안 가져왔어?"
"가져왔어요. 그러나저러나 이 가방 좀 들어줘요. 애 하고 무거워 죽겠네요."
내 합격 소식에 무거운지 모르고 들고 다니더니 이제는 내게 맡길 모양이다.
"알았다. 알았어."
"얼른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요. 다정이 젖 좀 먹이게."
"진짜로 젖 먹이게. 우유 가지고 왔다 메."
"아, 어떻게 알아듣는 거예요.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 사람 많은데서 확 까올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먹여버릴까 보다."
"아, 안돼, 안돼! 내 마누라 젖, 누가 보면 안 돼!"
내가 펄쩍 뛰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시시 웃고 마는 미정이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며 우리는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다 되어 청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속버스 안내양이 보기 드물게 예뻤다. 다 그래도 예쁜 애들을 선발하지만 이 아가씨는 특별히 미모가 뛰어났다. 내 시선이 자꾸 통로 안으로 걸어들어가면서도 뒤쪽으로 향하자. 미정이 얄미운지 나를 살짝 밀었다.
나는 일부러 달려 나가며 앞으로 꽈당 쓰러졌다.
"아이고, 저걸 어째........!"
미정이 울상을 짓거나 말거나 나는 털퍼덕 주저앉아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아이고, 이제는 마누라가 괄시를 하다못해 밀어 넘어뜨리기까지, 아이고 내 팔자야........"
젊은 놈이 구두 짝까지 벗어, 바닥까지 두드리며 신세한탄을 하고 있자, 안에 먼저 탔던 사람들이 왁자하니 웃음이 터졌다. 이에 미정이의 얼굴은 금방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나는 태연하게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쭉 내 뻗으며 말했다.
"사모님! 안으로 드실까요?"
"와아.........! 매너 최고다!"
어느 젊은 놈의 말에 나는 그쪽을 향해 씨익 한 번 웃어주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리번 거리며 우리의 좌석을 찾았다. 우리의 좌석번호는 15, 16번이었다. 좌석을 확인한 내가 두 손을 모아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모님, 안쪽으로 타시죠."
눈을 한 번 흘긴 미정이 말했다.
"웬일이세요? 매번 밖의 풍경 구경한다고, 창가에 타던 사람이."
"당신이 다정이 젖이라도 편히 먹이려면 안에 타는 게 좋잖아?"
"다 이유가 있었네요."
"그럼."
웃음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미정은 다정을 포대기를 풀러 내렸다. 이제 안고 타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다정이가 깨서 울려고 했다.
"얼른 젖 물려."
"알았어요."
울먹이는 다정이를 추슬린 미정이 자리에 앉자마자, 얼른 웃통을 젖혀 퉁퉁 분 젖을 꺼냈다. 젖 먹이기 편하게 하기 위해 보아하니, 브래지어도 안 한 것 같다. 다정이 며칠을 굶은 아이 마냥 쭉쭉 젖을 빨자, 미정이 중얼거렸다.
"아, 되게 아팠네!"
미처 젖을 먹이지 못하면 여자들은 젖이 불어 되게 아픈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미정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나도 한 통 먹으면 안 될까? 그러면 시원할 것 아냐?"
"이 이가 정말 못 하는 소리가 없네."
큰 소리도 못 내고 통박을 주는 미정의 표정이 아주 묘했다. 이렇게 투덕거리다보니 다정이가 배불리 먹었는지 젖을 떼고, 또 잠이 들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안을게."
"안 울까요?"
"일단 안아보고."
나는 아직도 포대기의 일부에 싸인 채인 다정이를 무 뽑듯 쓱 위로 뽑아 올렸다.
"으앙.........!"
"이런 제길........."
"아, 안되겠어요. 제가 안을 게요."
"낯가릴 사람이 따로 있지. 제 애비를 낯가려."
"그만치 평소에 안 놀아줘서 그래요."
"내가 볼 때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이 없을 때는 나와도 잘 노는데, 제 어미만 있다면 그저........."
"당신 가는 동안 한숨 푹 자요. 그동안 수험공부 하느라고, 잠 한 번 제대로 못 잤잖아요."
"그럴까?"
나는 의자를 뒤로 벌렁 젖히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내가 다시 잠을 깬 것은 미정이가 흔들어 깨워서였다.
"다 와가요. 내릴 준비하세요."
나는 눈을 비비며 여기가 어디 인가 살펴보니, 청주 관문의 명물인 강서의 가로수 터널이었다. 가로수들이 눈꽃을 이고 있어서 보기에도 참 아름다웠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투덜거림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깨웠어?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만."
"뭐가? 한참 이예요. 5분도 안 돼서 도착할 건데."
"그래도."
나의 투덜거림이 무색하게 몇 개의 신호등을 지나니 금방 터미널이었다. 우리는 내리자마자 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장모님과 모르는 분 남자분이 한 분 계셨는데, 장인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아빠.........! 흑흑흑........!"
미정이가 금방 울음을 터트리며 그 남성을 보고 달려들어 품안에 안겼다.
"그래 마음고생 많았지? 이 애비를 용서하거라."
"아니 예요,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아빠! 흑흑흑.......!"
"하하하........! 서울대에 합격했다며?"
"네!"
"그런 사위라면 내 백번이라도 용서하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아빠!"
비로소 미정이 웃음을 그치고 장인의 가슴팍을 두들겼다.
이때 또 다정이가 이 소란스러움에 깨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모양을 본 장모님이 얼른 포대기에서 다정이를 꺼냈다.
"으앙.........!"
또 운다.
'이놈의 새끼 울보 아니야!'
"엄마, 이리 주세요."
"그래, 그래."
다정이를 다시 미정이에게 맡기는 장모님이셨다. 이때 내가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인어른! 사위 강 대정이라 합니다!"
"난 아직 사위로 인정 안 했네 마는........"
"이, 양반이........."
장모님이 옆구리를 꼬집는 바람에 항복을 선언하는 장인어른이셨다.
"아, 그래, 그래! 이번에 서울대에 합격했다며?"
"네, 지금 막 확인하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아무튼 축하하네. 그러고 보면 머리도 대단히 좋은 모양이야?"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겸양을 하니 더욱 보기가 좋군."
이야기를 하면서 장인을 자세히 뜯어보니, 이 양반도 우리 아버지마냥 준수하게 잘 생겼다.
그런데 한 가지 올백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어쩐지 권위적인 냄새를 풍겼다. 부조가 그런지 몰라도 머리에 새치 하나 없이 검었다. 그래도 장모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정말 누가 봐도 장모님은 그 연세에도 미인 소리를 들을 만큼 미모가 뛰어났다. 그런 우성인자를 받아서 미정의 외모가 돋보이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그런 사람이 미정이에게 듣기로는, 집에서는 장모님을 거의 꼼짝을 못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동네에 마실이라도 가서 지체할라치면 찾으러 다니고, 내수로 시장을 보러 나와도 바로 바로 들어가야 할 정도로 통제가 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장모님은 가끔 속아서 왔다고 푸념을 하신단다. 당시에도 말단 공무원이었던 장인이었기에, 준수한 외양과 직업을 보고 시집을 왔더니, 너무 신세를 달달 볶는다는 장모님의 푸념이 종종 터지곤 한다는 것이다. 이때 방안에 계시던 아버지께서도 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방문을 열고 나오셨다. 내가 미정이를 끌고가 소개를 시켜드렸다.
"아버지, 며느리입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도 못하고 죄송해요."
"험, 험! 죄송할 것 없다. 같이 서울 같다 오는 길이냐?"
말씀을 하시면서도 미정이를 아래위로 뜯어보시던 아버지도 적이 마음에 드셨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그게 아니면 딸까지 낳은 마당에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셨는지 모르겠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자."
"네, 아버님! 그런데 저 아버님........!"
"왜?"
앞장서시던 아버지가 뒤를 흘끔 돌아보시며 물었다.
"저는 부엌에서 무얼 만들어야 돼서.........."
"네 시어머니 있잖니, 사돈댁도 있고. 오늘만은 그냥 안으로 들어가 쉬도록 해라!"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딱 그 말이 맞았다.
"저 양반은 날 못 잡아먹어서........."
지금까지 부엌에서 장모님과 함께 잡채를 만들고 계시던 어머니가 한 마디 툭 쏘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못 들은 척 하시고 내처 방으로 들어가셨다. 이때 장인어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표정으로 부엌 밖의 마당을 서성이고 계셨다. 사돈과는 아직 어려워 방으로 들어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부엌에 있을 수도 없어, 마냥 서성이며 주변 풍경만 살피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도 안사돈 간에는 서로 죽이 맞나보다. 간이 맞니 안 맞니, 상의해 가며 잡채를 만들고 계시니, 다행이었다. 아무튼 장인의 처지를 보고 내가 그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장인어른 안으로 들어가시지, 왜........."
"아니야, 내 조금 있다 들어가자."
"그럼, 저랑 술이라도 사러 가실래요?"
"그럴까?"
마땅히 할 일이 없으시니 선선히 동의하며 따라오는 장인어른이셨다.
"붙임성이 있어서 좋구먼."
"제가 좀 그런 편이죠."
"오늘은 평일인데, 근무 안 나가시고?"
"핑계 대고, 그냥 빠져 나왔어."
"고기는 좋아하세요?"
"촌살림에 없어서 못 먹지. 우리 어릴 때는 더 했어. 가뭄에 콩 나듯 일 년에 한두 번 먹으니, 기름기가 소화가 안 되어 죄다 설사를 좍좍하곤 그랬지. 그래도 지금은 조금 나아진 편이야."
"그러시겠어요."
"자네, 사업도 한다며."
"네, 조그맣게 신문사 하나를 운영하는데, 월 400 정도는 남습니다."
"400 이라니? 사백만 원을 말하는 것인가?"
"네, 장인어른!"
나의 대답에 길을 가시다 우뚝 서서 멍청히 나만 바라보고 계신 장인어른이셨다. 입을 떡 버린 채였다. 그런 모습을 내가 쳐다보자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는지 걸음을 옮기시며 말씀하셨다.
"공무원 생활을 30년 넘게 해도 내 한 달에 칠팔만 원 받기 힘들어. 그런데 월 사백을 번 다니......... 그것도 학생의 몸으로 말이야. 자네는 아예 사업 감각을 타고 난 듯싶으이."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정도 되면 겸양하지 말고, 자랑해도 되네! 이젠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찜찜함도 다 버렸네. 앞으로 미정이 끝까지 아끼고 위해 주게."
"그러하겠습니다. 장인어른!"
"믿네!"
"네!"
그러다보니 어느덧 가게에 다 왔다.
"고기는 아까 다 사간 것으로 알아. 술이나 좀 사가세."
"네, 장인어른!"
"아줌마! 여기 막걸리 10병만 주세요."
"통도 크군. 그런데 자네, 술은 잘 하나?"
"다섯 병 정도는 마십니다."
"소주로?"
"네!"
"너무 술 좋아하지 말게. 끝이 안 좋아. 대개 그렇게 주량을 타고난 사람들이 술을 달고 살게 마련이고, 끝에 가서는 간경화다, 경변이다 해서 일찍 죽어."
"명심하겠습니다. 장인어른."
"소주도 몇 병 사세. 우리는 주로 회식자리에서 소주를 먹거든."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나는 주인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
"왜, 학생!"
"여기 소주도 세 병만 주세요."
"돈 여기 있네. 얼마요?"
아주머니가 진열대 위의 소주를 가지러 간 사이에, 장인은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를 꺼내며 계산을 하려하고 있었다.
"장인어른, 제가 돈 낼게요."
"나중에 더 근사한데 가서 한 잔 사게."
"네! 장인어른!"
장인이 그렇게 말하는 데야, 나는 주머니에서 꺼냈던 돈을 슬그머니, 다시 주머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