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29화 (29/322)

< --오직 그대만을 위하여-- >

"어머니!"

"아니,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냐?"

나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를 불렀다. 부엌에서 무엇을 하시고 계셨는지 어머니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시면서 놀란 얼굴로 부엌에서 튀어나오셨다.

"다들 어디 가셨어요?"

나의 물음과 때를 같이하여 안방문과 윗방문은 물론 사랑채의 문까지 대답을 하듯 일제히 열렸다.

"어서 오너라!"

"오빠!"

"우리 장손 왔누?"

차례로 아버지, 여동생들, 할머니의 반가운 인사였다. 나이가 들어 동작이 굼떠지신 할머니의 반응이 늦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동생들이 이 추위에도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달려 나오고, 어머니는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고 채근하신다.

"추운데,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자."

"오빠! 보고 싶었어."

벌써 품안으로 뛰어들어 대롱대롱 매달리는 막내를 한손으로 감싸 안으며 나는 안방으로 향했다. 그 때 선물보따리를 들어 한 손이 불편한 나를 발견하신 어머니가 물으셨다.

"아니, 이건 뭐냐?"

"식구들 선물 이예요."

나는 자연스럽게 보따리를 어머니에게 인계하고, 나의 안방 행에 사랑채를 나와 지팡이까지 세 발로 걸어오시는 할머니를 마중했다.

"눈길에 미끄러울 텐데 집에 가만히 있지, 뭐 하러 왔어?"

"쌀 떨어졌나 보죠."

할머니의 말을 받아 나를 핀잔하는 아버지를 가재미눈으로 흘기시는 어머니셨다.

"어서 들어가자."

어머니의 말에 나는 동생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부축하여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모두 안방으로 들어와 할머니를 필두로 세 분이 아랫목에 좌정하자, 나는 차례로 큰절을 올렸다. 이때 내 밑의 큰 여동생들은 그동안 컸다는 것인지 부끄럽다는 얼굴로, 옷고름만 물

고 윗방에서 우리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다. 천방지축 막내 동생은 그 새를 못 참아 절을 하는 내 등에 올라타기도 했다.

"별고 없으시죠?"

"촌에서 별 일 있을 게 뭐 있노, 늘 그렇지. 겨울이라 한가하기도 하고."

대표로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내가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할머니가 내가 가지고 온 보따리를 지적하며 물으셨다.

"저건 뭐냐? 아가!"

어머니가 냉큼 답하셨다.

"장손이 가지고 온 것인데, 뭔지 끌러봐야겠네요."

"그려. 어여 어여 한 번 끌러봐라."

고부간의 대화가 이어지더니 마침내 내 선물보따리가 풀어졌다.

"우와.........! 빨간 내의다!"

막내의 말이 아니더라도 온통 방안이 시뻘개진 느낌이었다. 아버지 것, 회색 내의를 제외하고는 온통 여자들 것으로 붉은 색 일색이었다.

"뭔 돈이 있어, 이렇게 많은 속옷을 사온 거냐?"

어머니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조그맣게 신문사 지국을 하나 하고 있는데, 이제 벌이가 쏠쏠해서 하나씩 사왔어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짓을 하고 있다고?"

아버지의 노한 물음에 어머니가 변호에 나서셨다.

"우리가 돈을 제대로 못 대주니 학비라도 벌어 쓰려고 벌인 일인 모양이죠."

"험, 험.........!"

아버지의 헛기침과는 아랑곳없이 윗방의 동생들이 우르르 내려와 내의를 들고 제 몸에 대어보기 바쁘다. 제 것을 찾는 것이다.

"내꼬는?"

제가 하는 일은 하나도 없이 매일 남의 손을 타는 막내가, 제 것도 남이 챙겨주길 바라고 묻고 있었다.

"나는 빨간색 싫은데?"

좀 컸다고 중학교 다니는 바로 밑의 여동생이 고개를 외로 꼬고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겨울철에 뜨시기만 하면 최고지, 색깔은 왜 따져, 이년아!"

아버지의 한마디에 더욱 삐친 여동생이, 내의를 버릴 듯 몇 번을 세차게 바람을 가르고서도, 끝내는 들고 윗방으로 발을 쾅쾅 구르며 올라갔다.

"저 놈의 계집애가!"

이 소동이 어이가 없으신지 게으른 황소의 하품 같은 얼굴을 하셨던 어머니가 내게 시선을 돌리고 물으셨다.

"명희는 잘 있는 게냐?"

"네!"

나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언급하기 싫어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채근이 이어졌다.

"뭔 대답이 그래?"

이때였다. 둘째 여동생이 나를 살려줬다.

"엄마, 고구마 타는 냄새 나는데?"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화들짝 놀라 부엌으로 달려가시는 어머니셨다. 나를 독촉할 어머니가 나가시니 아버지가 이제 바톤을 이어받으셨다.

"명희하고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거냐? 같이 살림을 차리고 있는 게냐?"

대답이 궁해진 나였다. 잠시 염두를 굴리던 나는 사실 대로 말씀드리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경리로 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어요. 살림은 따로 하고."

"아이고, 그럼! 언제 증손자는 안겨 주누?"

할머니의 말에 나는 지금이 말할 적기라고 판단하고 입을 열었다.

"할머니에게 증손자를 안겨줄 손부는 따로 있습니다. 지금 임신 6개월 이예요."

"뭐, 뭐라고?"

부엌에서 고구마를 꺼내 들고 오시던 어머니가 채반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온 방바닥이 고구마 천지였다.

"네놈이 지금 제 정신으로 하고 있는 소리여?"

아버지의 노호성이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빨리 손자 안기라메요?"

나의 볼멘소리에 주먹을 치켜드신 아버지의 흥분된 목소리와 파편이 내게까지도 튀었다.

"누가 이놈아! 아무나 하고 접 붙어, 애 낳으라 했어!"

'아, 쓰발!'

아무리 아버지지만, 내가 개돼지도 아니고 '접 붙는 게' 무슨 말이냐 말이다.

"내가 결혼할 사람은 내가 정해야지, 왜 미리 정해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세요!"

"뭐........?"

하도 어이가 없는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못하기는 아버지시다.

"그래? 벌써 임신 6개월 이라고?"

어머니가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으셨다.

"네!"

"어디 있는데?"

"청주에 있지 어디 있어요."

"당장 가자!"

"네?"

"며느리 재목 보러 가자고."

어머니는 벌써 내 손을 잡아끌고 계셨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금방 온 애를 쯧쯧........."

할머니의 끌탕에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은 어머니가 내 손을 놓고, 조금은 차분해지신 안색으로 물으셨다.

"그럼, 산달이 내년 3월이냐?"

"아니 4월이요."

어머니가 계산을 못하셔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음력 3월을 말씀하시고, 미처 그 생

각을 못한 나는 양력으로 대답했기 때문에, 동일한 답을 가지고 이런 말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아차 싶은 어머니가 정정해서 물으셨다.

"양력으로 4월 달이란 말이지?"

"네! 어머니!"

"그러나 저러나 그럼, 명희는 어떻게 하니?"

"다 데리고 살아라!"

어머니의 물음에 아버지가 답을 하셨다.

"아, 지금이 조선 이예요, 왜정 때에요? 법적으로 한 사람 밖에 못 데리고 살게 되어 있단 말 이예요."

나의 항변에 대한 대답은 엉뚱하게도 할머니가 하셨다.

"요새도 첩 데리고 사는 양반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 옛날에 벌어진 일이잖아요."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해도 식구들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고,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표정들이었다. 서로 고성이 오가니 머쓱한 막내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방안의 고구마도 누가 정리를 했는지, 채반 위에 원위치 되어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고구마에 손대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방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내 고집을 모두 아는 데다 내 의사 또한 강력하니, 서로 말을 해봐야 고성만 오갈 뿐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어머니는 현명하셨다.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답이 안 나온다는 것을 알고 한마디 불쑥 내뱉었다.

"가자!"

다시 내 손을 잡아 일으키는 어머니셨다.

약점이 있는 나도 어머니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한 척 일어섰다. 이 과정에서 내가 퇴학을 맞아, 증평공고로 전학을 했다는 말을, 차마 말씀 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길로 나와 어머니는 사리로 나와 버스를 타고 청주로 왔다. 오후 6시쯤이었다. 모자가 청주에 도착하니 짧은 겨울 해는 벌써 떨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길로 극구 사양하시는 어머니를 택시에 태워 내가 새로 이사한 사직동 집으로 모셨다. 그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방향이 틀리잖니?"

"어머니도 이제 제법 청주 지리를 아시는 모양 이예요?"

"내가 청주 드나든 지가 언제부터인데? 네가 홍역이 하도 심해서 그때부터이니 내가 청주지리는 너보다 더 잘 안다."

"하하하........!"

어머니도 뻥을 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대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나의 대소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신 어머니가 또 물으셨다.

"아직 멀었니?"

"다 와 갑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택시비를 계산해야 했다. 내가 몇 번 타 본 경험으로는 조금만 더 지나면 기본요금 이상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백 원짜리 지폐를 꺼내 주고는 얼른 내려 어머니께 문을 열어드렸다. 미터기에 백 원이 찍혀 있었으므로 나는 거스름 돈 셈할 필요도 없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얼마나 남지 않은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잡은 어머니의 손이 유난히 찼다.

"엄마, 손이 무척 차네요."

모처럼 나는 다정한 모자지간이 되어 어머니의 건강에 관심을 표시했다.

"다 나이 먹어 봐라. 혈액순환이 안 되니, 찰 수밖에."

"에이, 아직 환갑도 안 되신 분이........."

"우리 동네에 봐라. 환갑 넘은 노인이 몇인지? 순덕이 할머니 하고 해서, 여자 셋에 남자 하나뿐이잖니? 이렇게 인생이 허망한 것이다."

말씀 하시는 게 벌써 죽음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해왔다. 그래서 나는 그런 감정을 희석시키기 위해 썰렁한 농담을 했다.

"거기에 우리 할머니도 포함 된 거죠?"

"당연하지."

"다 왔어요. 어머니!"

골목 어귀에 이른 내가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쳐 미정을 불렀다.

"미정아! 오빠 왔다!"

이 소리에 어머니가 기어코 한마디 하셨다.

"오빠라고 부르니?"

"아니요. 자기, 당신이라 불러요."

"벌써?"

어머니의 놀라신 얼굴이 과히 볼만했다.

"왜요? 그렇게 부르면 안 돼요?"

"그게 아니고, 이 어미는 이날 이때까지 네 아버지와 여보 당신 소리 한 번 못하고 지냈다."

"그럼, 평소에 뭐라고 부르세요?"

"듣지 못했니? '이봐요' 아니면 '대정이 아부지' 이지."

"참, 답답하게도 사시네요!"

"자기!"

신나는 얼굴로 뛰어나와 나를 부르다가는 낯선 여인의 등장에 멈칫하는 미정이었다.

"어머니시다, 인사드려라!"

아연 놀란 미정이가 얼른 어머니 앞으로 뛰어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 죄송해요! 미처 몰라 뵈어서."

"서로 초면인데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하나 책잡힐 것 없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기나 하자."

"주세요!"

어머니가 들고 있는 보따리를 빼앗아 드는 미정이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나는 쌀도 못 가져왔는데, 어머니는 그새 찐 고구마를 챙겨 여기까지 들고 오신 모양이었다.

"다 왔는데........."

하시면서도 손을 놓는 어머니셨다. 보따리를 책가방마냥 가슴에 안은 미정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기는 언제 고향을 갔대?"

"가서 30분도 못 있고 왔다. 널 보겠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정말 임신은 한 거냐? 별로 표시가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어느새 앞장을 서셨는지 미정의 몸태를 보시고, 미정의 임신 소식부터 물으셨다.

"아직 그렇게 도드라지게 표시 날 기간도 아니지만, 옷도 헐렁하게 입어서 더한 모양 이예요."

나의 대답에 어머니가 웃으시며 말했다.

"아주 박사 다 됐다."

미정은 시어머니가 어려운지 그동안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부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살피시던 어머니는 이젠 숫제 앉지도 안으시고 방안을 살피고 계셨다.

"방이 넓고 깨끗하니 좋다. 옛날 집에 비하면 대궐이다. 대궐! 헌데 처갓집에서 얻어준 것이냐?"

"아니, 제 돈으로 얻었어요?"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조그만 신문사 하나 한다고 했잖아요."

"그게 그렇게 돈이 잘 벌리냐? 행여 망해서 집에 손 벌리는 것은 아니겠지?"

"보태 줄 돈이나 있어요?"

"하긴 그렇다마는........."

내말에 갑자기 처연한 한숨을 내쉬고 들이시는 어머니셨다.

"어머님 앉으셔서 제 절 받으세요."

미정의 말에 비로소 자세히 미정을 뜯어보시는 어머니셨다.

"참으로 곱기도 하다! 무뚝뚝하기는 천하제일인 놈이 어디 가서 이렇게 고운 색시를 다 물어 왔을 꼬?"

"참, 내.........! 내가 뭐가 그렇게 무뚝뚝해요."

"네도 네 애비 못지않잖아! 내가 강 서방네의 무뚝뚝함에 질린 사람이다. 아주! 네 할아버지부터!"

"어머님 대정 씨는 그렇지 않던 데요?"

"처음이라 그렇겠지. 나중에 겪어 보면 안다."

'자기 정말 그럴 거야?'

하는 눈빛으로 나를 한 번 쏘아본 미정이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어머니께 공손히 절을 드린다.

"어머님, 절 받으세요."

"그래, 그래!"

미정이 차분하게 절을 하고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절을 받으신다. 미정이 자세를 펴자, 어머니는 더욱 뚫어질 듯한 눈으로 미정을 세밀히 살피신다.

"몸은 괜찮고?"

"네, 어머님!"

"성은 뭐고? 어디에 살았던 고?"

"정 미정이고요. 내수가 제 원래의 집입니다. 어머님!"

"가깝네."

"네, 어머님!"

연신 고개 조아리기 바쁜 미정이었다.

"저녁은 어떻게 됐어?"

나는 미정을 얼른 어려운 자리에서 해방시키고자 물었다.

"짓다 말았어요. 어머니 곧 따뜻한 진지 올릴게요."

"그래, 그래! 상냥도 하다. 곰 같은 것보다는 백 번 낫다!"

미정의 자태와 하는 짓이 마음에 드셨는지 어머니의 표정이 매우 밝으셨다. 미정이 밖으로 나가고 방안에는 나와 어머니만 덩그라니 남았다.

"명희보다는 백 번 나아 보이는데, 큰일은 큰일이다. 이를 어쩌누........? 명희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냔 말이다."

"뭘, 어떻게 해요. 제 갈 길로 가라고 하면 되지요."

"이 녀석이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할머니 말씀대로 하는 방법은 어떻겠니? 물론 명희의 동의를 얻어야겠지만. 또 그 집안의 동의도 얻어야 하고. 명희 아버지 펄펄 뛸 것을 생각하니, 그 방법도 아찔하긴 하다."

"그 문제는 제가 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 어머니 아버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

"알아서, 잘~ 하겠다.........!"

이때 밥은 안 짓고 바로 방 옆에 붙어 내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미정이었다.

"어찌 됐든 좋은 며느리를 얻어 기쁘기는 하다마는........."

"밥 아직 멀었어?"

"네, 다 돼가요."

황급히 멀어지며 답을 하려다 미정은 하마터면 긴 치맛단을 밟아 넘어질 뻔했다. ============================ 작품 후기 ============================즐거운 휴일 되세요!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즐거운 휴일 되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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