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28화 (28/322)

< --오직 그대만을 위하여-- >

명희의 말과 태도에서 나는 내심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생각하며 약간 굳은 안색으로 명희에게 물었다.

"뭔데?"

"오빠, 소문이 사실 이예요?"

알면서도 나는 약간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가 전학을 갔고, 여자가 있다는 소문 말 이예요."

"내가 한 번 말한 적이 있을 걸. 오빠에게는 두 명의 여자가 더 있다고."

"네!"

"그 중 한 여자와는 헤어졌고, 한 여자와는 더욱 가까워져 임신까지 했다. 지금 6개월이 넘었어. 이제 오빠한테 정나미 떨어지지?"

"아니 예요. 절대 그런 것 없어요."

머리까지 저으며 강력하게 부인하는 명희였다.

"나 같으면 밥맛없을 것 같은데?"

나는 명희에게 유도심문을 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오빠에게 여자가 몇 이 돼도, 저를 받아만 주신다면 감지덕지 예요."

"에효! 불쌍한 것.........!"

나는 부지불식간에 뱉고 말았다. 그녀의 면전에서 차마 못할 소리를.

그래도 명희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오빠가 그렇게 좋냐?"

"어릴 때부터 오빠는 나의 우상이었고, 아빠가 술만 취하면 말씀하셔서 항상 장래의 낭군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네 얘기를 들으면 내가 무슨 죄인 같고, 괜히 슬퍼진다."

"절대 그러실 필요 없어요. 오빠를 놓지 못하는 제가 차라리 더 미워요."

"무슨 쓸데없는 말을........."

명희가 저렇게 까지 말하니 나도 인간인 더 이상 모진 소리를 못하겠다. 아니 순수한 인간성에 오히려 감동 받았다고 할까. 그 생각이 곧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명희야!"

"네, 오빠!"

"이리 가까이 와봐라."

"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조신하게 내게 다가오는 명희였다.

"어디 한 번 안아보자."

나의 말에 갑자기 붉은 홍시가 된 명희가 그냥 굳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몇 바퀴 돌렸다.

"오빠, 어지러워요. 내려주세요."

"그래."

일단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다시 번쩍 안아들어 내 무릎 위에 앉힌 다음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내말대로 해라."

"말씀하세요."

"네가 요즘 업무량이 많아 야근까지 하고 있는 것까지 이 오빠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서부지국을 넘겼으니 좀 여유가 생기지 않겠니? 그러니 이제부터 너는, 시간 나는 대로 사무실이고 집이고 가리지 말고, 검정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해. 책

도 이 오빠가 다 사 줄 테니까."

"다 좋은데, 책 살 돈은 제게도 있어요."

"마! 오빠가 사주면 감사히 받기만 하면 돼! 알겠어?"

"네!"

"오늘은 여기까지. 내 할 얘기 다 했으니, 끝으로 네가 오빠에게 할 얘기 있으면 해봐."

"오빠가 알아서 모든 것을 얘기해주시고, 처리해주시니, 저로서는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오빠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오빠!"

"그래, 그래! 열심히 해라!"

"네!"

내가 격려차원에서 등짝을 가볍게 몇 대 두드려주자, 명희는 기쁜 얼굴로 일어나 천천히 사무실 문을 나갔다.

그 이튿날 새벽 4시.

내가 막 기상해서 대충 눈곱만 떼고, 옷을 걸치고 사무실로 출근을 하려는데 미정이 나를 불렀다.

"자기, 잠깐만!"

"왜?"

나는 여전히 옷을 걸치며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새벽에는 경리들 안 나오지요?"

"그럼 밤중에 경리가 뭐 하러 나와?"

"사무실에 난로는 피우나요?"

"당연하지. 이 추위에 난로 없이 어떻게 견뎌. 연탄 나로가 있어. 왜?"

"커피도 있나요?"

"그럼, 사무실에 커피 떨어지면 돼?"

"알았어요. 저도 같이 나가요."

"무슨 일로."

"추운데 배달 마치고 오는 사람들 따끈한 커피라도 한 잔씩 타주게요."

"그 마음은 알겠는데, 홀몸도 아니고 한 번 아이들에게 버릇들이면 매일 기대를 한다고. 그러니 잠자코 누워서 잠이나 더 자."

"그래도 하고 싶어요."

"그 마음만 내 얘들한테 전달을 할게. 그리고 자기는 오늘부터 할 일이 있어."

"뭔데요?"

"오늘 당장 서점에 가서 검정고시에 필요한 책이 뭔지 알아봐서 일체를 다 구입하되, 각각 두 권씩 사도록 해."

"한 권은 누구 주게요."

"줄 사람이 있어. 그러니 더 묻지 말고 내 말대로 하도록 해."

"말 안 해줘도 짐작이 가네요."

미정이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누군데?"

"자기 없으면 죽고 못 산다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며 요. 당연히 그 사람이겠지요. 그 여자도 저와 같이 학력이 짧은가 보죠?"

"짐작대로야. 그러니 아무 말 말고 사와."

"알았어요."

전에 내게 말할 때는 다 수용하고 포용한다고 받아만 달라던 미정도, 이제 임신을 하고 동거를 시작하자, 마음이 약간은 변했는지 못내 서운한 기색이었다. 아니 질투가 끓어오르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내 앞에서 지금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었다. 나 또한 조금은 언잖은 기분이 되어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나는 책을 펴놓고 공부를 했다. 수학공부였다. 사무실에도 근간에는 항상 참고서 한두 권을 갖다놓고 배달이 없으니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가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자, 나는 미정이 하던 말대로 내가 시행하기로 했다. 진즉부터 난로에 올려놓아 끓고 있는 물을 가지고 나는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학생도 있으니 커피만이 아니라 다른 차를 타려고 보니 종류가 다양하지 못했다. 그리고 컵도 많이 부족했다. 한꺼번에 몰려들지만 않는다면 씻어서 또 사용해도 된다. 하지만 내가 그 짓까지 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경리들에게 지시해 다른 차도 더 다양하게 구비하고, 컵도 더 사다 놓도록 하려고 생각했다. 이 날 오후 1시.

오전에 집에서 공부를 하던 나는 이제야 출근하는 길이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김명자만 단독으로 지사장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새벽에 생각한 것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배달학생들에게 새벽에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대접할 생각 이예요. 그러니 여기에 맞게 컵도 더 준비하고 차도 좀 다양하게 갖추어 놓도록 하세요."

나는 추가로 다른 지시를 내리기 전에 사전 설명부터 했다.

"금번 지사 판촉은 서비스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로 판촉할 거예요."

"네~? 그 비싼 걸요."

"비싸도 다 방법이 있어요. 그러니 명자 씨는 일단 내 지시대로만 행하세요."

이렇게 말을 한 나는 김 명자에게 알아듣기 쉽게 세세히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 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부품에서부터 조립까지 일관체제를 갖춘 자전거 공장이 큰 곳으로 두 군데가 있는 것으로 알아요. 곧 삼천리와 대영이 그곳이죠. 이 두 업체는 정부로부터 독과점업체로 지정되어 있어, 다른 회사는 진입을 하려해도 할 수가 없는 형편 이예요. 따라서 공장도 가격이라도 만만찮게 부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나는 갈증이 나면서 커피 생각도 났다. 그래서 나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양! 여기 물 한 잔과 커피 두 잔만 타다 줘요."

"네, 지사장님!"

명희의 길게 끄는 대답이 들려오자 나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도 일단 두 회사 먼저 알아보세요. 그리고 여타 사방의 부품을 끌어 모아 조립하는 자전거 공장은 전국에 많이 산재해 있으니, 비교 견적을 제출받아 가장 싼 업체를 선정하도록 하세요. 이 과정에서 납품 조건도 확실히 받아야겠지만, 우리의 결제조건과 요구 사항도 잘 전달하도록 하세요."

"내 생각으로는 일단 처음 일착으로 2천 대를 주문할 거예요. 대금은 지사 도착 즉시, 백 퍼센트 현금결재를 해준다고 하세요. 그 대신 이틀 내에 2천 대가 모두 도착을 해야 하는 조건 이예요. 그리고 2차 물량은 똑같은 조건으로 1,500대를 주문할 것이고, 추가 물량은 추후 상황을 봐가며 주문하겠다고 하세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요?"

"네, 사장님!"

"이런 조건을 제시해서 품질과 납기를 준수하되, 가장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업체를 선정하도록 하세요. 알겠지요?"

내 지시가 거의 끝나 가는데 비로소 명희가 물과 커피를 타들고 들어왔다.

"거기다 놓고 나가요."

명희는 내 지시에 따라 내 책상 앞에 놓인 양 소파 사이의 티 탁자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나갔다. 그러자 김명자가 센스있게 커피와 물을 내 집무용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을 마시고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1차와 2차 물량의 인터발은 단 이틀 이예요. 그러니 동시 발주라고 보면 되겠네요."

"제작자 측에서 상당한 납기 압박을 받겠는데요?"

"그러니 다 만들어 놓고, 요이 땅 하면 일제히 납품이 들어와야죠. 그리고 납품일은 우리의 주문이 나간 이십일 후부터 예요. 이런 조건을 다 맞출 수 있는 업체 중에서, 가장 싼 가격을 제시하는 업체에 발주를 하도록 하세요."

"내 지시는 여기까지 예요."

"알겠습니다. 지사장님!"

바로 나가려는 김명자에게 내가 말했다.

"커피 안마시고 가요?"

"나가서 마시려고요."

"처음 우리가 지국 시작했을 때를 생각하며 모처럼 같이 한 잔 합시다."

"네~!"

김명자가 밝게 웃으며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이후 나는 남부 소장 임백룡에게 전화를 걸어 지사로 들어오도록 조치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이 판촉전의 총 지휘를 맡기려는 것이다. 나이와 경험이 가장 많아 적격이었다. 또 나와의 만남 이후에는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아, 요즈음은 내 신임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튼 나는 또 서부지국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15일 내에 세 총무는 물론 고민호까지 모두 내게 보내 달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나는 담당 박 부장에게도 찾아가, 본사 요원 세 명을 넉넉잡아 열흘만 판촉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박 부장은 먹은 놈이 물 킨다는 격언대로 내 요청을 쉽게 수락했다. 사전 조치를 대충 끝내자 비로소 나는 한가한 시간이 되어,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퇴근은 아니고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인 판촉전이 전개되기 전에 촌에 한 번 다녀올 생각으로, 모처럼 집에 선물을 사들고 가려고 막상 밖으로 나오니, 무엇을 사가야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곳저곳 가게만 기웃거리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추운 겨울에는 두꺼운 내의가 제격이다 싶어 식구 수대로 한 벌씩 모두 샀다. 그리고 나는 생각난 김에 아주 일을 저질러 버렸다. 택시를 잡아타고 고향으로 출발을 한 것이다.

돈을 몇 푼 만지니 나도 간이 부었나보다. 옛날 같으면 언감생심 택시를 탈 생각은커녕 근처에도 안 갔을 것이다. 아무튼 택시를 타니 고향이 금방이었다. 채 한 시간이 안 되어 나는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시간을 보니 오후 3시 30분이었다. 나는 고향에 소문이라도 나면 말들이 많을 것 같아,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는 선물보따리는 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멀리 큰 은행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의 전경도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인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두르고 있었다. 이따금 거친 바람이 불어 지붕 위의 눈을 휘말아 올리고, 미나리꽝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썰매를 타고 있는 아이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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