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그대만을 위하여-- >
다음 날 나는 학교로 찾아갔다. 주 기자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몰라도 전학을 가라 했다. 문제는 전학을 갈 학교였다. 청주 근교에는 마땅히 전할 갈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내 고향 도안에서도 가까운 증평공고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세간의 또래 아이들이 부르기를 '짱돌공고'라 부르는 그야말로 좀 처치는 학교였다. 나는 이 학교 건축과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한 동네 살던 친구로 내가 청주로 6학년 때 전학을 오기 전까지는 계속 같은 반에서 배웠던 친구였다. 이 상백(李 相伯)이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못하더니, 이곳에 진학해서 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적응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학교를 다니는 문제였다. 즉 통학거리였다. 청주에서 증평까지는 약 50리가 되었는데, 버스비 18원이 문제가 아니라, 만원 버스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참고로 시내버스 요금이 서울은 입석 20원, 좌석 30원 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이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그렇고, 특히 등하교 시간에는 학생들이
몰리기 때문에, 시내버스는 매번 콩나물시루가 되었다. 따라서 여차장이 배치기로 안으로 밀어 넣어서야 출발을 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니 어느 날은 발이 허공에 떠서 운전기사가 일부러 지그재그로 곡예 운전을 해야만, 발이 바닥에 닿는 아주 숨 막히는 시간을 하루에도 두 번씩 당해야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 잘못인데. 다 인과(因果)의 결과물인 것을.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내가 이렇게 전학을 하고 얼마 안 있어 나는 바로 방학을 맞이하였다. 즉 12월 24일이 되어 방학을 했던 것이다. 방학을 맞으니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나는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로 다음 날, 충청일보에 서청주 지국 매각 광고를 냈다. 지국 매각 문제는 천상 내가 흥정을 해야 하는데, 학교 다닐 때 광고를 내놓으면 학교 있는 시간에 만나자는 사람은,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단안을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광고를 내고 나서 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런 마음으로 생각하니, 오늘이 황수정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12월 25일 즉 크리스마스 날로, 요일은 수요일이었다. 나는 오후 6시 시간에 맞추어 정각에 예의 제과점으로 들어섰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직 안 나왔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들이차 있었다. 그래도 사방을 둘러보니 마침 테이블 하나가 빈 곳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10분 쯤 기다리니 그녀가 매장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등장에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소란스러움이 잠시 진정될 정도였다.
"여기다! 여기!"
나의 외침에 그녀가 알았다는 표시로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보이고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이번에는 모든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결코 반갑지 않은 상황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왜 만나자마자 인상을 써!"
예나 지금이나 거침이 없는 그녀의 입담이었다.
"너에게 쓴 것 아니거든."
"너?"
"됐고. 호칭문제로 또 시비하고 싶지 않으니 어서 앉아라."
"앉을 게 뭐 있어?"
"왜 또 초장부터 시비야?"
"흥!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뭔 말이야?"
"너 전학 갔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아니야?"
"맞아!"
"할 말이 있으면 해봐."
"마누라가 임신 6개월이다."
"흥! 마누라? 그럼, 그 전부터 사귀었다는 소리 아냐?"
"맞아! 비록 가짜 약혼이지만 네가 응하지 않은 다음부터야."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것은 아니지. 왜? 내 잘못을 남에게 미뤄."
"그런 점 또한 마음에 드는데, 이제 어쩌나? 유부남과 계속 사귈 수는 없잖아?"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제안하려고 했어."
"그게 말이 돼!"
그녀의 고함에 또 다시 장내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화가 나서 나는 그녀는 물론 주변을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대부분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를 꺼려 대부분 피했지만, 어떤 자들은 아예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싸울 수도 없어서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다.
"말을 해봐! 말을!"
아랑곳하지 않는 황수정이었다.
"헤어지자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이 새끼야, 내 마음을 빼앗아 갔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책임을!"
"뭔 책임? 내가 너와 키스를 한 번 했냐? 몸을 섞었냐? 얼결에 손 한 번 잡아본 게 다잖아?"
"내 얘기는 그게 아니잖아! 내 속상한 마음은 어떻게 할 건데?"
"언제부터 지가 나를 좋아 했다고........."
나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손이 내게로 날아왔다.
"이 새끼가 정말.........!"
그러나 그 손은 내게 잡혔다.
"놔, 놓으란 말이야!"
나는 밀듯이 그녀의 잡은 손목을 놓아주었다. 계속해서 장내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으므로 내가 말했다.
"우리 나가서 이야기 하자. 창피하다."
"여기서 얘기해. 남의 시선이 그렇게 중요해?"
정말 남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녀의 매너였다. 그래서 내가 짜증스럽게 물
었다.
"나 보고 어쩌라고?"
"내 상처 난 마음을 치료해줘."
"어떻게? 호호 불어 줄까?"
"너~! 지금 장난 하냐?"
하여튼 이상한 계집애였다. 평소에 모든 남성들이 저를 우러러본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서 인지는 몰라도, 나와 만나도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러다가도 헤어지자는 말만 나오면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지랄 발광이었다. 없어져봐야 사람이던 물건이든 그 소중함을 안다던가?
"흐흐........! 헤어지기 싫으면 너도 나한테 시집오던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렇게 이야기하다가는 밑도 끝도 없으니 이렇게 하자."
"어떻게?"
"쿨 하게 찢어지자고."
"흥! 네 멋대로?"
이 집착은 뭔지 정말 답답하다. 하여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정말 화가 나서 테이블을 쾅 치며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을 밀치고 밖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녀가 급히 나를 쫓아 나왔다. 다소 진정이 된 내가 말했다.
"걷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없이 팔짱을 끼는 수정이었다. 도로에서도 이목이 쏠리자 나는 이면 도로를 택했다. 조용히 따르던 그녀가 말했다.
"나한테 이렇게 막 대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 그리고 ........"
"그리고?"
"잊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지만, 기억에서 나란 놈을 지워라."
"이럴 때는 차라리 내 머리가 녹음 테이프였다면 좋겠다. 필요 없는 것은 지우고, 좋은 것만 남겨 두게."
"내 처지가 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잖아?"
"헤어져."
"뭐?"
내가 그녀의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되물은 것이다.
"아이도 내가 키울게."
"정말 말 같은 소리를 해라. 나는 그렇게 못 해!"
"이 새끼가 정말..........!"
가다가 우뚝 멈춰 서서 화를 내며 나를 노려보는 황수정이었다.
"그런 말투 때문에 내가 정나미 떨어지는 것, 알아? 몰라?"
"앞으로는 조신하게 굴게."
그 순간 내 머리에 수정의 심리 상태가 퍼뜩 떠올랐다.
"이제야 네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다가서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차였다는 소리 듣기 싫어 잡아당기고, 종당에는 네가 날 차버릴 건데, 내가 미쳤냐?"
내 말이 충격이었던지 말이 없는 수정이었다. 지금까지 자기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른 듯 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내 말이 정곡을 찌른 듯 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수정의 말투와 표정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네가 날 최초로 찬 사람이다. 아니 처음으로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열었던 사람이 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네 말대로 쿨 하게 헤어지자. 대신 서울로 진학하면 한 번은 연락해라. 그 때는 가볍게 술이나 한 잔 하자."
"너도 술 마실 줄 알아?"
"가끔 아빠를 상대로."
아빠 이야기를 하며 은연중 풀이 죽는 황수정이었다. 내가 눈치를 채고 물었다.
"왜?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어?"
"작년 총선에서 아빠가 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이나 뽑는 중선구에서도 3등을 하는 바람에, 많은 재산을 탕진했다. 게다가 요즈음은 건설업도 잘 안 되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가끔 집에 오시면 나를 붙들고 신세한탄 겸 부녀지간에 술 한 잔씩 나누곤 하지."
할 말이 없었다. 유신시대라 아무리 내가 정치에 관심이 없더라도, 수정이 아빠가 국회의원에 떨어진 것은, 동네 소문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도 잘 나간다던 건설 쪽까지 안 좋은 상황인지는 몰랐다. 동네 사람 누구도 사업 내용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 가족만 거의 동네 사람들과는 담을 쌓고 살고 있으니까. 수정이 엄마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은 동네 여 반장뿐이었다. 그 여자에게 동네 소식을 들을 뿐, 자신들의 집안 사정은 전혀 털어놓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래저래 수정의 도도한 기세도 한 풀 꺾인 것 같다. 우리는 이후 30여분 동안 거리를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내가 대학 진학 후, 서울에서 한 번 만나기로 하고.
수정과 헤어지고 나니 술이 고팠다. 내가 아무리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수정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허전한 마음에 내 발걸음은 나도 몰래 술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내내 내 손은 바지주머니로 들어가 계속해서 수정에게 미처 끼워주지 못한 가락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허전한 마음을 안고 내가 도착한 곳은 '석굴암'이라고, 옛날 도자기 병에 막걸리를 담아 파는 집이었다. 실내 장식도 상호에 맞게 아주 고풍스럽게 꾸며 놓은 집이었다. 나는 이곳으로 들어가 파전에 막걸리 한 병을 시켜 혼자 쓸쓸히 마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정이나 끌고 들어와 한 잔 하고 헤어질 걸.'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다 원님 행차 뒤의 나팔 불기였다. 어쨌든 내가 그곳에서 다섯 병의 술을 마시고 거나해져 들어가니, 미정은 아직 안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서방님 기다리다가 눈 빠지겠네."
"자지 그랬어?"
"자기 오면 같이 잘라고. 으흥~! 술 마셨어?"
"조금, 언잖은 일이 있어서."
"나 때문에?"
"그 건 아니고."
"아휴~ 술내야! 얼른 씻고 자. 저녁은?"
"아직 전이야."
"뭐하고 밥도 못 먹고 다녀. 봐!"
말을 하며 윗목을 가리키는 미정이었다. 그곳에는 보자기로 덮어놓은 밥상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혹시 몰라 차려놨어."
"저녁 먹었어?"
"나도 아직 안 먹었어. 자기 오면 같이 먹으려고."
"임산부가 그러면 쓰나. 산모가 잘 먹어야 애기도 건강하지."
"너무 건강하면 낳기만 힘 드는 것 아닐까?"
"운동도 적당히 해야지. 매일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시장 보러 가는 것도 운동 아니야?"
"그런데 너, 언제부터 말이 반 토막이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먼저 말 트자고 안 그랬어. 이제 자기는 꼼짝없는 내건대 어때."
"너, 계획적으로 임신 했지?"
"나 혼자 어떻게 임신을 해. 씨 부린 사람이 누군데?"
"하긴........! 그러나 저러나 학교에서는 어떻게 자기 임신한 것을 알았데?"
"고발자가 있었대."
"뭐? 맹금자 아니야?"
"내가 신랄하게 물어봤거든. 하늘에 맹세코 절대 아니라는데."
"거 이상하네. 그럼, 누가 찔러 박았을까?"
"자기 그거 알아?"
"뭘?"
"맹금자도 임신 중이다?"
"뭐? 잘 들 논다~!"
"몇 개월이라는데?"
"5개월!"
"참.........!"
어이가 없어서 헛바람만 새어나온다.
"그 애는 무사한 거야?"
"아직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네. 어떤 새끼가 고발했지?"
"밥 차릴게 얼른 식사해."
말과 함께 아랫목에 묻어 둔 밥주발을 꺼내오는 미정이었다. 이 주발은 장모님이 사주고 가신 것이다. 이후 우리는 의문은 의문으로 남겨둔 채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가 끝나고 난 후였다. 미정이 나를 불렀다.
"자기!"
"왜?"
"이제 방학도 했으니, 시간 많잖아. 어디 하루 놀러갔다 오자."
"그래, 배 더 불러지면 거동도 불편하니 놀러가기 힘 들거야. 그전에 날 잡아 어디 한 번 다녀오는 것으로 하자."
"아이고, 좋아라!"
"너무 흥분하는 것도 아이한테는 안 좋아."
"아이고, 이놈의 애물단지........! 아, 우리 아기 듣겠네! 사랑스러운 나의 보배!"
그렇게 말하며 제법 불러오는 배를 살며시 쓰다듬는 미정이었다.
^^
^^============================ 작품 후기 ============================4종셋트는 매검향을 행복하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