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22화 (22/322)

< --고삐리 아빠-- >

세월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11월 중순이 되었다. 11월 12일. 오늘이 예비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나는 황수정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비 오던 날의 수정의 발언은 단지 나의 충격적 발언에 잠시 일탈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수정이 제과점에 나오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일단 내가 절교를 선언한 것이고, 그녀 또한 내 발언에 잠시 흔들렸을 뿐 평소 나에 대한 감정은 그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평소 10분씩 일찍 나가던 것을 오히려 오늘은 30분을 늦추어 나갔다. 빵 하나에 콜라나 한 잔 먹고 오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황수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 죽을래? 왜 이렇게 늦어?"

"미안,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변명은 했지만 내 가슴은 고목나무에 물이 오르듯 생기가 돌며 벅차게 뛰어 놀았다.

"시험은 잘 봤어?"

"기대한 만큼."

"잘 본 모양이네."

"그럭저럭."

대답이 시원치 않을 것을 보니 아주 잘 본 것은 아니지만, 죽을 쑨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대화가 단절되고 둘만의 공간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것을 먼저 깬 것은 수정이었다.

"오늘을 많이 기다렸다."

"왜?"

"나온 걸 보면 몰라. 네가 많이 보고 싶기도 했고."

"의외네."

"많이 생각도 했다. 확실히 비오는 날의 내 발언은 네 말대로 생리 중에 뱉은 말이고, 아니 비오는 날의 센티멘탈이라고 해두자. 그렇지만 너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애초의 우리의 계획대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되, 네가 서울로 진학하면 본격적으로 사귀어보자."

"우리?"

"너 오늘 왜 자꾸 까칠하게 굴어? 물론 내 일방적인 계획이지만, 동의해줬으면 좋겠어."

"좋다. 찬성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다른 여자들과 사귈 것이다. 더 이상 너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기는 싫다."

"이미 사귀고 있지?"

"넘겨짚지 마."

"소문이 그렇던데?"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여기서 나는 일부러 강경하게 나갔다. 뻔히 상대가 알고 있어도 현장을 들키지 않는 한 거짓말이라도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 여자의 심리이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아무튼 좋아! 내게 향하는 마음만 변함없으면."

"그 마음만은 확실하다."

"됐다. 뭐 먹을래?"

"라면!"

"호호호........! 유머는 여전하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전히 만남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4일이 지난 11월 16일.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친 나는 한국일보 지사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이 그동안 미루었던 청주지사의 신문을 인수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틈틈이 교섭을 해 지대 결정은 물론 실제로 판매되는 부수 그리고 구역까지 완전히 파악한 상태였다. 정식으로 계약만 하면 바로 내일부터라도 내가 인수해서 신문을 돌려야 할 판이었다.

대개의 신문은 이렇게 특혜를 베풀어 주지 않는다. 그냥 깜깜이인 채로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말만 믿고 계약을 해야 하는 것이 지국 인수인계 건이었다. 그렇지만 지사장이 내게 이런 특혜를 준 것은 첫째 지국이 본사 직영체제로 제대로 경영되지 않았고, 박 부장 자체가 이일에 넌덜머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5천부 발송에 현재 1,500부가 나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절충해서 지대를 매월 225,000원씩 납부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나머지는 요식 행위였다.

지사 사무실 이것이 한국일보 충북 판매담당의 사무실이기도 했기 때문에 월세를 반분하기로 하고 계속 사용하기로 했다. 그 돈이 월 25,000원 이었다. 번화가라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1,2층을 동시에 쓰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크게 비싼 편은 아니었다. 계약은 금방 마쳤고 박 부장과 나는 뒤풀이로 간단하게 소주 한 잔씩을 하며 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튿날부터 안배성을 서부 소장으로, 조호철을 남부 소장으로 박아놓고, 나머지 총무들을 전원 빼서 지사에 투입했다. 빈자리는 일반 배달들이 메꿀 수 있도록 사전에 모두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아무튼 지사에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한 윤정환과 그 다음으로 들어온 양선기 기수 세 명 또 그 다음 기수 세 명 등 정예 7명이 투입되어 운영을 하게 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학생들이 배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 아직 이들 정예들이 배달에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판촉을 하기 위해 투입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판촉은 쉽지 않았다. 내가 남부에서 벌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벌써 이곳은 피 튀기는 판촉전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판촉을 해도 쉽게 부수가 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특별 대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생각하지 않아 그 방법을 생각해냈으나,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큰돈이 없었다. 답답했지만 실탄을 마련할 방도를 생각하니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서부 지국을 남에게 넘기고 그 돈을 지사의 판촉에 투입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연말까지 지켜보기로 하고 내년에는 필히 무슨 수를 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내게 뜻밖의 일이 터졌다. 방학이 다 되어가는 12월 중순 경이었다. 수업 중이었는데 학교로 전화가 온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이었다. 그간 딱 한 번 집에 다녀온 것이 다인 나였다. 그것도 쌀이 떨어져서.

집안에서 보면 내가 싸가지 없는 놈이었지만, 할아버지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당신은 그런대로 유학을 공부해 훈장 노릇도 했고, 선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같은 세대에 비하면 일생을 호의호식하며 지냈지만, 아버지는 국민학교 문턱도 못 가본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한문을 좀 배웠을 뿐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작용했다. 아무튼 그런 사람이고 보니 돌아가셨다 해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중에 알고 보니 끝에 가서는 나를 조금은 생각한 모양이었다. 위독하셔서 아버지가 임종이라도 지켜보게 할 양으로 부르고자 한 모양인데, 공부해야 된다고 이를 만류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바로 택시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당시 택시의 기본요금은 백 원이었다. 장지는 고향 선영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삼일장을 치렀는데 이 기간 내내 제일 곤혹스러운 것은 명희 아버지를 피해 다니는 일이었다. 결국 안 만날 수는 없어서 만나, '함께 잘 있다'는 말만 전했다.

삼일장이 끝나고 내가 학교에 등교하니 나를 기다리는 것은 담임선생님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정미정이 임신을 해서, 그녀와 내가 동시에 퇴학을 맞게 된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내가 뿌려 놓은 씨앗이었기에 감수를 해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어이없는 사실은 미정이 이 사실을 끝까지 나에게 숨겼다는 사실이었다. 임신 6개월이 되도록.

일단은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미정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가는 내내 나는 어떻게 하다가 임신이 되었나 생각을 했다. 근래는 계속해서 체외 사정을 했는데 말이다.

결론은 임신기간을 생각하니 그녀와 나와 처음 관계를 맺고, 세 번째 안에 임신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시의 내 행위도 떠올랐다. 그녀가 처음에 아프다고 보채는 바람에 체외 사정을 한다는 것이, 거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세 번째 까지는 그냥 질 내 사정을 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내 잘못을 깨닫고 체외 사정을 계속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벌써 늦은 일이었다. 하긴 요 근래는 자꾸 나를 피하던 미정이 생각났다. 1주일이 아니라 근간에는 1달을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핑계를 대니, 그러려니 했던 내 잘못이 컸다. 그런데 요는 어떻게 되었든 미정이 왜 나에게 임신 사실을 숨겼냐는 것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낙태를 하고 나면 나와 멀어질 것이 가장 두려웠지 않나 싶다.

지금 와서 이것저것 생각하면 무엇 하겠는가. 벌써 일은 벌어졌는데. 이제는 어떻게 이 일을 잘 수습하느냐만 남은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녀의 부엌으로 들어서니 여러 개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미정아!"

"........."

내가 미정을 부르자 미정의 대답은 없고, 중년부인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잘 됐다. 마침 왔나보다. 찾아 가렸더니."

그리고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미정이의 어머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미정과 많이 닮은 사십대 중반의 아주머니였다.

"자네가 강 대정 학생인가?"

"네, 어머니!"

"누가 자네 어머니인가? 동네 시끄러워질듯 하니 안으로 들어오게."

"네!"

내가 막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미정의 어머니의 호통이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년아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으면 다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기껏 학교 보내줬더니 서방질만 하고 다녀! 나가봐! 누가 왔나!"

그 순간 내가 방안에 들어가 보니 정말 미정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녀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거기 앉아!"

내가 자리에 앉자 이제 화살이 내게 돌아왔다.

"자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저 아이 버려놨으니, 책임져야지. 설마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막상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미정이 어머니의 호통은 계속되었다.

"왜 대답이 없어? 어른 말이 말 같지 않아?"

"책임지겠습니다."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어떻게?"

"데리고 살아야지요."

"능력은 되는가?"

"지금도 사업을 하고 있어서 부모님께 손 벌리지도 않아도 밥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나의 대답에 황당한지 대답이 없던 미정의 어머니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져 나에게 물었다.

"무슨 사업을 하길래?"

"신문사 지국을 하고 있는데, 웬만한 대학졸업자 봉급쟁이보다는 낫습니다."

"그래도 능력은 있나보네. 하긴 능력이 있으니 벌써부터 계집을 집적거렸겠지만."

미정이 모친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살이 미정에게로 향했다.

"이년이 정말 답답하게. 그렇게 숫기도 없는 년이 어떻게 서방질은 했어!"

그러면서 이불을 확 걷어 젖히는 미정이 모친이었다. 비로소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마디로 초췌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학교는 이미 끝난 일이고. 네 서방과 살 거야?"

"네, 어머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확실한 미정의 의사표현이었다.

"좋다. 당장 짐 싸서 네 서방들 집으로 옮기자."

"어머니!"

너무 서두르는 모친을 만류하려고 엉금엉금 기어 제 어미한테 가는 미정이었다.

"방을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긴 후에 이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왜? 지금 사는 곳은 시원찮은가? 돈 잘 번다며?"

"아직은 그렇습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나도 이 아이가 그리로 살림 옮기는 것을 보고 집에 갈 테니 그리 알고 서둘러. 하긴 옮길 세간도 없다마는........."

"알겠습니다. 어머니!"

대화가 이 정도까지 진행되자 비로소 내가 어머니라 불러도 까탈을 잡지 않는 미정이 모친이었다. 잠시 실내에 어색한 정막이 흐르자 미정이 무릎걸음으로 내게 와 무릎을 꿇고 정중히 사죄했다.

"미안해요.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러나 저러나 대정 씨 학교 문제는 어떻게 해요?"

"그 문제는 미정이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최소한 옮겨갈 학교는 내가 확보할 테니까."

"그게 가능한 거야?"

"네, 어머니!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좀 있어서 알아본 관계로는 학교에 기부금을 좀 내면, 비록 촌 학교지만 전학은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미정이도 가능하겠는데?"

"가능은 할 겁니다만......... 아이 때문에 문제죠. 이제 저 정도면 낳아야지 별 수 있습니까?"

"그럼, 낳아야지. 뗄 생각을 했나? 6개월이 넘으면 산모 잡는다고 병원에서도 낙태수술을 안 해줘. 나도 알아 볼 것 다 알아봤어."

"아무리 생각을 해도 미정이의 경우는 돈을 써서 일단 전학을 시키고, 아이 때문에 휴학처리를 하는 게 낫겠습니다."

"대정 씨! 나 학교 안 가! 집에서 살림이나 할래."

미정의 말에 모친이 나섰다.

"잘~ 한다! 학벌 없으면 나중에 서방이 깔봐! 이것아!"

"대정 씨는 절대 그럴 사람 아니 예요."

"흥! 절대 그럴 사람 아닌 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처음에는 다 죽고 못 살 것 같이 굴어도, 사랑이 식으면 별 이야기가 다 나오게 되어 있어."

"제 생각으로는 번거롭게 촌으로 전학가고 그러느니 차라리 검정고시를 보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붙으면 계속해서 공부시키고 싶습니다."

"아이는?"

"촌의 부모님께 맡기던지 정 아니면 유모를 하나 들여 학업에 전념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저 년이 서방복은 있는 모양이네. 지금 자시 보니 인물도 훤하고, 똑똑하게 생겼어."

비로소 기분이 많이 풀렸는지 내 칭찬까지 하는 미정이 모친이었다.

============================ 작품 후기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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