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21화 (21/322)

< --고삐리 아빠-- >

그 날 밤.

남문로 본정에 위치한 일수 사무실.

담배연기 자욱한 가운데 맥주와 소주병이 여기 저기 뒹굴고 있는 사무실이었다.

한 사내가 담배 하나를 꼬나물고 회전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음침한 웃음으로 물었다.

"우리에 몰아넣었지?"

"네!"

"하하하.........! 우리에겐 일석이조야. 영감탱이에게 돈도 많고, 그 자식이 타락해 내 부하로도 들어올 수 있으니까."

"맞습니다. 더욱 신경 써서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만 나가봐!"

"네!"

대답과 함께 90도 각도로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 문을 나서는 자가 있으니, 퍼모스트 집에 있던 금을 떡칠을 한 깍두기 머리였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아파서 걸음을 제대로 못 걷는 그녀를 위해 여고 정문 앞 200미터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내가 멈춰선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끝나고 우리 집에 와 있어."

"왜, 또 하게?"

"내가 짐승이냐, 아픈 너를 데리고."

"어제 보니 무지막지한 짐승이던데, 뭘!"

"요것이.........!"

나는 그녀의 코를 잡고 흔들었다.

"아파!"

눈물이 핑 돈 그녀의 말에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꼭이다. 알았지?"

"네, 오빠! 사랑해!"

내 귀까지 다가와 속삭이고는 얼른 달아나는 그녀였다. 그러나 금방 그녀는 위태로운 걸음걸이가 되었다. 나는 시선을 외면하고 천천히 자

전거에 올라탔다. 지켜보던 여학생들의 다리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더욱 힘차게 폐달을 밟았다. 푸르른 가로수들이 연속해서 내 뒤로 물러났다. 나는 학교가 파하자마자 본정으로 갔다. 밀집된 상가 중에서 나는 두리번거리며 내가 목표로 하는 상점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눈에 띄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란제리 가게였다. 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삼심대 후반의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나를 맞았다.

"학생 뭘 찾는데?"

"여성용 속옷 요?"

"어머, 웬일이야? 학생이 여자 걸 다 찾고."

"어머니 생일 선물 이예요."

"여자 친구 것 아니고?"

짓궂게 물어보는 아주머니를 향해 나 또한 짓궂은 대꾸를 했다.

"맞아요. 아주머니랑 체형이 비슷해요. 아주머니가 입은 것과 똑 같은 사이즈로 하나 골라주세요."

"어머, 학생! 되게 짓궂네!"

그 나이에도 홍조를 띠며 말하는 아주머니가 신기해서 내 시선이 계속 머물자, 아주머니는 더욱 부끄러워진 듯 고개를 돌려 외면하며 물었다.

"무슨 색깔로?"

"보라색 요. 신비한 느낌을 주는 색깔이잖아요."

"학생이 별 걸 다 아네."

아주머니는 연신 나를 칭찬하며 속옷이 담긴 소형 박스를 연신 뒤적이고 있었다. 마침내 아주머니가 꺼내 놓은 박스를 받아 나는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두꺼운 종이에서 빼내 펼쳐보았다. 내 예상대로 삼각팬티였다.

"아주머니! 망사 팬티나 끈 팬티도 있어요?"

"어머, 학생! 그런 팬티도 있어?"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했다.

'시대가 일러 아직 안 나왔나?'

"그런 팬티가 있으면 잘 나갈 것 같아서요."

"어머, 망측해라!"

다시 한 번 홍조를 띠는 아주머니를 보고 씨익 웃으며 내가 말했다.

"이 색상으로 하나 더 주시고요. C컵 브래지어도 하나 있으면 주세요."

"어머, 애인이 가슴이 되게 큰가 보네."

"아마 맞을 것 같아요."

내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한 술 더 떴다.

"남자들은 대개 사이즈를 잘 모르는데? 재봤나? 물어봤나?"

"아주머니 농담 그만하시고, 얼른 포장이나 해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요. 학생!"

장사를 하도 오래해서 닳고 닳아서인지,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말하는 주인아주머니의 말투에는, 애교가 철철 넘쳐흘렀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내가 너무 일찍 왔는지 미정은 아직 와 있지 않았다. 나는 지국이나 한 번 둘러볼까 생각을 하는데, 저 만큼에서 인상을 쓰며 걸어오는 미정이 보였다. 내가 달려 나가며 불렀다.

"미정아!"

"오빠!"

반가움으로 마주 달려오려던 그녀가 주춤했다. 안 됐다는 생각에 나는 그 앞에 가서 얼른 쪼그려 앉았다.

"업혀!"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보긴 누가 봐. 보면 좀 어때. 신랑이 각시 업어주는 것도 흉인 감?"

나의 말에 활짝 펴진 미정이 냉큼 내 등에 업혔다. 몇 발짝 걷는데 앞에서 집 주인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어머, 남사스러워라!"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며 뱉는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미정을 다시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거 봐요."

"에잇 참! 하필 그때 나타날게 뭐야!"

"호호호........!"

나의 투덜거림에 미정이 입을 가리고 곱게 웃었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김치 다 얻어먹은 것 아니야?"

나의 중얼거림에 미정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 이예요?"

"아니야, 공연히 해 본 소리야."

나는 미정의 손을 잡고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주인아주머니는 전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방으로 미정이를 데리고 온 나는 세 개의 박스를 그녀의 앞으로 밀치며 말했다.

"한 번 봐봐."

"이게 뭐 예요?"

"선물!"

"정말?"

수만 개의 꽃이 일제히 만개한 듯 환해지는 미정의 얼굴이었다. 정말 예쁘기는 되게 예뻤다.

"어머, 이게 뭐야?"

박스를 열어 내용물을 펼쳐본 미정이 뱀을 본 듯 놀라며 삼각팬티를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왜 그렇게 놀라?"

"너무 징그러워요."

"너무 야하다고?"

"네!"

"나는 더 야한 걸 입히고 싶은데?"

"몰라욧!"

등을 돌리는 미정이었다.

"여기서 입어 볼 래?"

"안돼요."

"그럼, 집에 가서 갈아입어라."

"네, 고마워요."

돌아앉아 감사를 표하는 그녀의 눈에는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고맙긴, 내 눈 호강하자는 건데."

"몰라요."

나의 농담에 나를 때리는 시늉을 하는 미정이었다.

"저녁 해먹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것으로 하자."

"네!"

미정의 표정은 안도와 서운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미정은 우리 집에 두 번을 다녀갔고, 그 때마다 우리는 관계를 가졌다. 처음이 어렵지 남녀 관계는 묘해서 다음부터는 별 힘들이지 않아도 자동이었다. 속된 말로 길난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튼 이 날은 뒤늦게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팔월의 마지막 주인데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비 맞기가 싫어서 우산을 쓰고 등교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비가 지국에 있기는 있었으나, 마침 집에는 없었다. 오늘도 나는 주머니에 든 황수정에게 주려고 장만한 반지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빠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그녀의 집 앞이 얼마 남지 않아, 그녀의 생각이 나서 하는 행위였다. 걸어가는 길이라 조금은 일찍 출발한 나였기에 오늘은 수정이 등교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집을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누가 대문에서 튀어나왔다. 황수정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튀어나와 놀란 것보다, 그녀를 마주친 것이 나는 더 놀라워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파리 들어가겠다."

여전히 싸가지 없는 말만 골라하는 그녀였다.

"오늘은 왜 이렇게 등교가 빨라?"

"아까부터 널 기다렸어."

"왜? 이제라도 약혼이라도 하게?"

"천만에 만만의 콩떡! 이제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도 힘들겠다."

"왜?"

미정을 차지한 나는 전보다 반응이 많이 덤덤해졌다.

"예비고사가 채 세 달도 안 남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아빠가 만나지 말래."

"그럼, 그러던지."

"반응이 왜 그래?"

"뭘, 어쩌라고. 그럼, 울며불며 매달릴 줄 알았어?"

"최소한."

"걸어가면서 얘기하지."

"제법이네. 이제 나랑 오래 있고 싶은 생각도 없는 모양이지."

"나 학교 늦거든."

"그래, 가면서 얘기하자. 더 할 얘기도 없지만."

"그래? 그러면 이걸로 종치자."

나의 말이 충격이었던지 놀라움이 온 얼굴로 번져나가는 수정이었다.

"왜? 어차피 만날 수도 없는 사이잖아. 예비고사 끝나면 본고사 본다고 못 만날 테고. 또 그다음은 서울로 진학하게 되면 어차피 멀어질 사이 아냐? 게다가 아빠까지 나서서 만나지 말래며?"

"하긴, 그렇다 만은......... 허전한 이 가슴은 뭐지?"

독백하듯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연기 하냐?"

내 말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멍하니 비오는 하늘을 쳐다보며 그녀가 또 다시 중얼거렸다.

"너를 그만큼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던가?"

"쇼 그만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나 하시지."

"넌, 내 마음 몰라!"

"오늘 멘스 하냐?"

"이 미친 새끼가!"

손을 번쩍 치켜드는 황수정이었다.

"여자가 말 한 번 거칠다. 정말 진심이면 지금이라도 약혼을 하던지?"

"네 말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서 하는 소리냐?"

멈춰 서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황수정이었다.

"애, 그런 말도 그럼 농담으로 하냐?"

"그럼, 가자! 할아버지한테!"

"하하하.........!"

"왜?"

나의 대소에 깜짝 놀란 듯한 그녀가 다급히 물었다.

"늦었다."

"뭐?"

"할아버지 퇴원하고 안 계신다고."

"어디 계신데? 설마 돌아가신 것은 아니겠지?"

"촌에 계신다."

"그럼, 거기까지 가자."

"학교 수업은?"

"수업이 대수냐?"

"너, 아무래도 오늘 제 정신이 아니다. 비 오는 날이면 이런 거야?"

"나도 내가 혼란스럽다. 네가 나를 거절하니까, 이상하게 네가 땡긴다."

"여자가 말 좀 곱게 해라. 깡패도 아니고."

"아무려면 어떠니? 너의 거절에 정신이 번쩍 났다. 아무래도 나도 너를 많이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야. 하긴 공부를 해도 네 모습이 많이 어른거리긴 했지."

"갈수록 가관이군. 네 말이 진심이면 이렇게 하자."

"어떻게?"

"우선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잘 보고. 예비고사 끝나는 날 6시에 그 제과점으로 와. 그때까지 다시 한 번 나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때도 지금 이 마음이 변함없으면 그날 나오고, 아니면 말아. 그 이후로는 나도 너를 잊을 게."

"와.........! 진짜 박력 넘치네. 평소에도 그렇지만 오늘은 더 하다. 더 멋져 보여!"

"쓸데없는 소리. 학교 늦겠다. 나 먼저 간다."

나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손을 흔들어 주고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가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의 황수정은 제 정신이 아니거나, 본마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드는 나였다.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 작품 후기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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