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삐리 아빠-- >
다행히 황수정이었다.
조금 열린 문으로 황수정이 밖을 내다본다. 한쪽에 숨어 있던 내가 나타나 말했다.
"나야!"
"무슨 일이야? 약속한 날짜는 한참 남았잖아."
황수정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잠깐이면 돼. 오늘 꼭 할 말이 있어."
"지금 여기서 해."
"한두 마디로 될 이야기가 아니야."
"그럼, 저 위 호랑이 할머니 산소 옆으로 가 있어. 내가 곧 옷 갈아입고 나갈게."
그녀의 말에 새삼 그녀의 아래 위를 훑어보니, 당시로서는 귀한 상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뭘 봐!"
"흐흐흐.........! 기다릴게."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그녀가 말한 곳으로 갔다.
온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언덕 위에 호랑이할머니 산소라는 곳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별명이 붙은 유래는 호랑이라 불리는 할머니의 남편이 이곳에 묻혀 있는데, 주변에 마땅한 공터도 없고 잔디마저 심어져 있으니, 많은 동네 아이들이 이곳을 놀이터로 삼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잔디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들을 쫓는 과정에서 되게 무섭게 굴었다. 그로 인해 붙여진 별명의 장소가 이곳이었다. 덕분에 언제부터인가 노는 아이들 하나 없었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주변은 외딴 고도와도 같이 고즈넉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속이 상해 넣고 온 담배가 꿀맛이었다. 오늘 따라 깊숙이 빨았다 뱉으니, 답답한 가슴마저 후련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이곳으로 다가오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보나마나 황수정일 것이다. 내가 피우던 담배를 계속해서 빨고 있는데 그녀가 내 옆에 와서 섰다.
"너 담배 피우니?"
"보면 몰라."
부탁하러 온 처지도 잊고 내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아서라. 뼈 삭는다."
"하는 말마다 어째 노땅 같다."
"누나니까."
"쳇!"
"용건이 뭐야?"
"나랑 약혼하자!"
"야! 너 미쳤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말이 되는 소리를!"
"왜 안 되는데?"
"공부도 더 해야 되고, 또........"
"내가 싫은 건, 아니고?"
"그건 아니야. 네가 없으면 죽고 못 살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 싫지는 않아!"
"뭔 말이 그래? 그저 그런 정도로 좋아 한다는 말이야?"
"솔직히 나도 내 내면을 잘 모르겠다."
그녀의 대답에 나직이 한숨을 쉰 내가 말했다.
"사실은 이렇게 됐어."
이렇게 운을 뗀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들려주었다.
"어때 내 소원을 들어주겠지?"
"그래도 안 돼! 약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약혼은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되는 것이지, 아직 우리가 그럴 처지는 아니잖아. 너나 나나 더 커서 성인이 되었을 때 생각해보자."
"가짜로 하는 거래도?"
"가짜가 어디 있어! 나는 그런 것 못해!"
딱 잘라 거절한 그녀가 모질게 나를 외면하고는 터덜터덜 걸어내려 갔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정으로 나는 멀어져가는 그녀를 멍하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더 멍하니 서서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여 뻑뻑 빨고 있는데, 누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빠른 걸음정도가 아니라 뛰어 오고 있었다. 정미정과 한 방을 쓴다는 맹금자와 사귀는 지용준이라는 놈이었다.
"웬일이냐?"
"한참 찾아 헤맸네."
"무슨 일로?"
"너한테 형님 소리도 듣고 싶고, 함께 갈 곳도 있어서."
"뭔 말이야?"
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우리 약속 잊었어?"
"뭔 약속?"
"먼저 잡아먹는 놈이 형님하기로 한 약속!"
"뭐? 그럼, 너 벌써.........."
어이가 없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나였다.
"흐흐흐........! 그래 내가 해치웠다. 벌써 세 번째 관계를 가졌다."
"어디서?"
이 상황에서도 다급하게 튀어나오는 이 물음은 또 뭐란 말인가?
"흐흐흐.........! 바로 여기서!"
"지랄하고 있네. 증거 있어?"
"증거는 무슨.........! 내가 언제 너에게 거짓말하디?"
"그야 그렇지만........."
"까불지 말고 나한테 앞으로 형님이라 부르고, 날 따라와."
"어디 가게?"
"다 모여 있다."
"뭐?"
"너 모르게 우리가 추진한 일이 있어. 남주동에서는 표호기가 주동이 됐고, 모충동은 내가 아이들 끌어 모았지."
"무슨 말이야?"
"서클을 하나 만들기로 했어. 서클 명까지 벌써 정했다. 너! 동심회(同心會)야! 회장은 단연 만장일치로 너고."
"지랄들........."
"회장님! 어서 가실까요?"
"난 그런 모임 필요 없다."
"아, 왜 이러 실까!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얻으면 되는데."
"그래도!"
"야, 왜 안내려와 새끼야!"
언덕 아래서 소리치는 놈이 또 있었다.
"저건 또 누구야?"
"목소리 들으면 몰라. 남희태지. 저 새끼는 기술도 좋아."
"뭔 말이야?"
"나보다 시도는 먼저 했는데, 불알만 담궜단다.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하하하.........! 미친놈들!"
그러다보니 언덕을 다 내려와 있었다.
"빨리 가자 얘들 눈 빠지겠다."
"가자!"
양 옆에서 나를 끌고 가는 녀석들이었다. 방금 황수정의 일로 기분도 울적한데, 술이나 한 잔 마시고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강제로 이들이 이끄는 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예의 분식집에 우리가 나타나니 박수와 환호성이 크게 일었다.
"와........! 드디어 회장님 납시셨다! 박수!"
와아.........!
짝짝짝.........!
온통 사내새끼들만 가득한 가운데 담배 연기 또한 장난이 아니도록 자욱했다. 오늘 완전히 전세를 냈는지, 결코 작지 않은 실내가 또래로 가득 차 있었다.
"회장님, 한 말씀 하실까요?"
맥주병에 숟가락 하나 꼽은 것을 마이크라고 내밀며 지용준이 익살을 떨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다마는 술이나 한 잔 다고!"
"뭔 취임사가 그래?"
모충동 꼴통 최상철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남주동에서는 제일 잘 나간다는 표호기도 그에게는 깨질 것이다. 전에까지는 모충동에서 제일 잘 나가는 조희찬과 쌍벽을 이루던 놈이니까.
나는 남희태가 따라 준 술을 급히 마시고 최상철에게 물었다.
"요즘 너는 뭐하냐?"
"뭐하긴 자식아! 양아치가 별 볼일 있어. 지나가는 학생들 삥이나 좀 뜯는 것이지."
중학교 때 벌써 폭력으로 퇴학을 맞은 놈다운 답변이었다.
"조희찬은 뭐 하냐?"
"아, 너한테 깨졌는데, 무슨 면목으로 여기에 나타나겠냐? 내가 권해도 가입 않는다더라. 저는 더 큰 물에서 논다나 뭐라나. 하긴 그 새끼 요즈음은 본정에서 놀고 있더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내가 다시 잔을 남희태에게 내밀었다. 그가 따라 준 술을 급히 비운 나는 손으로 입을 쓱 닦고 새삼스레 실내를 한 번 둘러보는데 뒤늦게 남희태가 안주라고 튀김을 내밀었다. 손으로 이를 툭 쳐 생각 없음을 밝힌 내가, 대충 장내의 인원수를 헤아리고 물었다.
"전부 몇 명이냐?"
"너까지 꼭 열일곱 명. 그래서 세븐틴 클럽이라고 하려다 말았다."
지용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모임의 목적이 뭐야?"
"상부상조! 궂은일이나 기쁜 일이나, 애경사에 모두 앞장서서 돕자는 취지지."
"취지는 좋다 만은, 폭력성은 안돼! 그러면 내 회장 취임 안 하고."
"우리가 깡패냐? 폭력 어쩌고 하게."
최상철의 말에 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는 그런 말 할 처지가 못 되는 것 같은데?"
"내가 어때서."
"됐다. 됐어! 성원이 되었으므로, 백 프로 참석에 백 프로 찬성으로 강 대정을 본 동심회의 회장으로 모실 것이며, 금일부로 친목단체인 동심회는 정식으로 발족합니다!"
어디서 듣고 보았는지 몰라도 지용준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탁자를 내리치는 것으로 장내 인물들의 박수와 환호를 유도해 내었다.
"자, 잔이 빈 사람은 각자 알아서 잔을 채우도록! 곧 회장님의 선창에 의해, 건배 잔이 있을 예정이니까."
"옳소, 옳아!"
뭐가 옳고 그른지는 몰라도 아이들은 신나게 떠들며 남의 잔에다 잔을 채워주기에 분주했다.
"자, 건배! 회장님, 건배사 하시죠!"
지용준의 말에 기왕 여기까지 온 것, 나는 잔을 높이 치켜들어 외쳤다.
"동심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의 우렁찬 함성 속에서 우리는 붓고 마시며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니 파할 때는 어언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걱정이 되어서인지 벌써 주무셨을 어머니도 이 명희도 모두 깨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니?"
"술 한 잔 하고 왔습니다."
"아이고, 누가 술꾼 손자 아니랄까봐 그러니? 벌써부터 웬 술이야?"
"속상해서요."
"아무리 속상해도 그렇지."
"밤이 늦었어요, 어머니!"
"그래, 자라! 얼른 자고 내일 일찍 학교 가야지."
'배달 가야지요!'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것을 참고 나는 그 자리에 벌렁 누웠다.
"그냥 그렇게 자면 어떻게 해? 옷이라도 벗고 자야지."
"내버려 둬요. 몇 시간 못 잘 텐데요. 뭐!"
"참, 너 신문배달 한다고 했지. 어여 아랫목으로 와라! 어미가 가운데 자마!"
"알았어요."
나는 일어나지도 않고 몸을 이리저리 굴려 아랫목으로 와, 얇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만 닿으면 쉽게 잠에 빠져드는 나로서는 아주 희귀한 경우였다. 더 더군다나 술기운이 있는데도 말이다. 한참을 뒤척이던 내가 어느 순간 잠에 빠져 눈을 뜬 것은 한밤중이었다. 밖으로 나와 시산을 보니 새벽 2시였다. 평소 같았으면 4시에 저절로 눈을 떴겠지만 막걸리를 많이 마셔서인지, 너무 오줌이 마려운 관계로 평소보다 2시간 일찍 깬 것이다. 내가 하품을 하며 변소로 가서 막 소피를 보고 나오는데, 처마 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그림자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피니 이 명희였다.
"왜 더 안자고?"
"한숨도 못 잤어요. 그냥, 가슴도 두근거리고........"
고개를 떨군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였다. 내가 이를 보고 나직이 한숨을 쉬자 그녀가 말했다.
"오빠! 제가 오빠 좋아 하는 것은 아시죠?"
"몰라! 언제 너를 가까이 해 본 적이 있니? 초등학교 외에는."
"맞는 말이지만 저는 그때부터 오빠를 장래의 내 신랑이라 생각하고 사모해왔어요."
"지랄, 누구 맘대로!"
"오빠!"
그녀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몰라라 하고 자전거 곁으로 갔다.
"나 간다!"
"어딜 요?"
"배달!"
"너무 해요."
나는 그녀의 흐느낌을 등 뒤로 들으며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새벽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음력으로는 그뭄이 되리라. 나는 침침한 길을 달리고 달렸다. 이 생각 저 생각. 아예 종당에는 생각이라는 놈을 하기 싫었다. 검은 포도(鋪道)가 오늘따라 마구 내게 달려드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빠르게 질주했다. 저 만큼 지국의 불빛이 보이자 나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어제 광고지 한 장이 있는 것을 보고 왔다. 총무들이 그것을 신문 사이에 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것이 새벽 1시에 나온 그들의 일과였으므로. 나는 천천히 자전거를 받쳐놓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장당 1원씩이어도 무시 못 할 돈이었다. 2,000부가 나가니까 1원씩이라도 2,000원 인데 통상 최소 나가는 신문의 배 이상을 불렀다. 즉 500부가 나가도 2,000부가 나간다고 뻥 튀기고, 2,000부 값을 받는 게 통례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 무심천 동쪽으로 있는 집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냥 2천부를 불러 2천부 값만 받으니 사실은 좀 부족했다. 그런 것을 앞으로는 남부까지 맡았으니 무조건 4천부를 불러 4천원을 받도록 했다. 그러면 사실 남는다. 그렇지만 남는 것은 다음날 한 번 더 넣어주면, 그렇게 내 양심을 속이는 행위는 아니라고 보았다. 지금까지의 경우는 8절지의 경우 1원이라는 이야기고, 4절지 이상이 되면 그 배가 되는 2원을 받았으므로, 광고지만 많으면 신문이 적게 나가도 손해 볼 일은 없는 게 신문 사업이었다. 그러나 가물에 콩 나듯 얻어걸리는 것이 이것이라, 지금 시대에는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수익이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니 여섯 명이 삽지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3명은 제법 능숙한데, 3명은 초보로 굼뜨기 짝이 없었다.
"일찍 나오셨네요."
새로운 아이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물었다.
"얼마나 남았어?"
"거의 다 되어 갑니다."
"이 정도 물량이면 지금 이 시간이면 혼자 다 쳐냈어야 된다. 아직도 너무 느려. 좀 더 빨리 익숙해지도록."
"네!"
떫은 얼굴을 하는 세 명을 얼굴을 보고 나는 웃으며 새로운 신입을 비키게 하고, 나머지 물량을 전부 끌어 모아 내가 직접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