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13화 (13/322)

< --고삐리 아빠-- >

다음 날 오후.

나는 학교를 파하고 지국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경리에게 언제 남청주지국장에서 받은 명함을 넘겨주고, 남청주 지국에 전화를 넣도록 했다. 아가씨가 받는지 바로 내게 전화기를 넘겨주는 경리 김명자였다. 대개의 신문사 경리가 그렇듯이 아직 퇴근을 안 한 모양이었다. 보통 신문사 경리들의 경우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을 했다. 점심시간 1시간을 빼고 8시간 근무인 셈이었다.

"여보세요!"

상대편에서 고운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 서청주 지국장인데요."

"네, 네. 말씀하세요."

"6시에 끝나지요?"

"네, 네!"

"끝나고 근처에서 잠시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로.........."

"용건은 만나서 말씀 드리기로 하고. 잠시면 됩니다."

"그럼, 부근에 와서 전화 주세요. 퇴근 안 하고 기다리고 있을 게요."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한 번 사무실을 휘둘러봐도 총무들은 물론 배달 학생 한 명 없었다.

"오늘 새벽에 내가 얘기 해놨는데, 오늘 낮에 새로 나온 사람 없던가요?"

"아직은 없었는데요."

"그래요?"

하긴 내가 너무 빠르게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부 지국을 인수할 것에 대비해서 예비 총무 3명을 구하도록 세 아이들에게 오늘 새벽에 지시를 한 일이 있었다. 내가 직접 찾아봐도 되지만 늘 시간에 쪼들리는 나로서는 이들에게 부탁을 해놓았던 것이다.

모충동에는 아직 놀고 있는 아이들이 꽤 많아서 내 지시는 쉽게 이행되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한 지시이고 보니, 이들이 아직 그 아이들을 못 만난 모양이었다. 아마 오늘쯤은 만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다.

"세 총무에게 분명히 말해주세요. 내일 새벽에는 그 아이들 꼭 데리고 나오라고요."

"알겠습니다."

그 아이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아이들인지 궁금할 법도 한데, 김명자는 내게 묻지 않았다. 무조건 긍정적인 답을 하고 보았다.

"요새 수금율 통계 내고 있습니까?"

"90%가 모두 넘어요."

"이번 달부터는 수금율을 95% 이상 끌어올리도록 하라고 하세요. 물론 내 지시사항이라 하고요. 판촉은 이제 조금 덜 신경 써도 된다하고요."

"네, 국장님!"

시간을 보니 벌써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지난번 내 청이래로 우리 지국에서 배달을 하고 있는 청고 동기 이춘방과 대화를 하느라 좀 늦게 사무실에 들렀다. 그 관계로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어 있었다. 나는 곧 사무실을 나와 수곡동을 향해 자전거를 달렸다. 나는 꽃다리 부근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이 주로 신 주택단지라 도로변에는 새로 들어선 상가가 많이 눈에 띄었다.

다방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지하 다방으로 들어가 다방 내에 설치된 공중전화기에서 남부 지국으로 전화를 했다. 곧 경리가 전화를 받았다. 흙 다방이라고 알려주고 이곳으로 오도록 했다.

5분 정도 기다리고 있으니 머리를 짧게 커트친 아가씨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그 아가씨가 직감적으로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손짓과 함께 그녀를 불렀다.

"여기입니다."

나의 부름에 곧 다가온 아가씨가 물었다.

"혹시 서청주 지국장님?"

"네, 자리에 앉으세요."

"네."

"무슨 차로 하시겠습니까?"

"커피요."

나의 손짓에 다방 아가씨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커피 두 잔요."

"네!"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하셨는지요?"

"신문은 혹 몇 부 나가는지 아십니까?"

"알고는 있지만 함부로 대답해 드릴 수는 없네요."

"하하하........! 바로 알려줬으면 실망했을 겁니다. 혹 지국장님으로부터는 어떤 언질도 못 받았습니까?"

"전혀요."

머리까지 저으며 강력하게 부인하는 경리를 자세히 보게 되었다. 목소리가 곱더니 인물은 별로였다. 어찌 된 일인지 목소리 고운 여자는 예쁜 경우가 드물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통계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흐흠.........! 그럼, 대화가 어렵겠는데........."

중얼거리는 듯한 나의 말을 용케 들었는지 아가씨가 물었다.

"혹시 신문지국을 국장님께 넘기려는 것인가요?"

신문 밥을 얼마나 먹었는지 몰라도 감이 빠른 아가씨였다. 내가 대략 추측하건데 23~24세로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사회생활을 한 느낌이 드는 아가씨였다. 지국장에게 물어보면 쉬울 것을, 전혀 그는 신문에는 관여를 않으니 어렵다. 그렇다고 소장을 바로 찾아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소장이 눈치를 채고 농간을 부릴 개연성이 높아 경리에게 먼저 접근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 달리 이 아가씨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배달원은 몇 명인가요?"

"세 명입니다."

"백 부씩은 배달하겠지요?"

"그것은 답 할 수 없습니다."

역시 녹록치가 않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상대를 너무 만만히 본 모양이었다. 괜히 내 정보만 상대측에 흘려준 꼴이 되었다. 더 이상 대화를 해봐야 중요한 정보에는 접근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이 때 마침 커피가 나왔으므로 나는 이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실례했다며 오늘은 이만 헤어질 것을 통보한 다음이었다. 먼저 계산대로 가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아가씨 또한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목례를 꾸벅하더니 제 갈기로 간다. 잠시 서서 생각을 해도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어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급하게 폐달을 밟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은 공부할 팔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집에는 생각지도 못한 분이 와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였다.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아니, 어머니가 웬일이세요?"

"할아버지가 더욱 기침이 심해지셔서 할아버지 모시고 병원에 왔다."

"할아버지는 요?"

"지금 병원에 누워계신다. 아버지가 병간을 하고."

"이상이 있대요?"

"폐암 말기라신다."

"네에?"

나는 깜짝 놀라 어머니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런 일을 거짓말로 이야기할 분은 아니시지만 너무 놀라운 일이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단단히 각오를 하셨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며칠 전에 와서 온갖 검사를 다 받았다. 가급적이면 너한테 알리지 않고 그냥 가려고 지금까지 끌었으나, 결과가 그러니 너도 이제는 알고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오늘 내가 들린 것이다."

"진즉 알리셨어야지요."

"네 공부에 지장을 줄 까봐........."

가만히 한숨을 쉬신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졌다.

"그러나 저러나 네가 사귀고 있는 아가씨는 없지?"

"네!"

나는 어머니께 거짓말을 했다. 공연히 걱정을 끼쳐드릴까 봐서다.

"알았다. 어서 저녁이나 먹자. 네가 좋아하는 김치찌개 해 놨다."

"네, 어머니! 그리고 앞으로는 오후에 제가 집에 없으면 제가 다니는 신문사로 전화하세요."

어머니가 공연히 걱정하실까봐 내가 운영한다는 말은 안했다. 나는 노트를 찢어 어머니에게 지국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종이를 몇 번 접어 주머니에 넣으신 어머니는 곧 부엌으로 가셨다. 곧 밥상이 들어왔다. 김치찌개와 평소에는 보기 드문 김 그리고 계란 후라이까지 차려진 진수성찬의 밥상이었다.

"꼭 누구 생인 상 같네요."

"오늘이 네 누이 생일 아니냐?"

"아, 그랬던가요?"

"공부에만 신경 쓰느라고 관심 없는 것은 안다마는, 최소한 집안 식구 생일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 않니?"

"네, 앞으로는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라. 그렇다고 일일이 챙길 필요는 없고. 그럴 처지도 아니고 말이다."

"네, 어머니!"

"항상 너를 객지에 보내놓고 마음에 걸렸다. 밥은 제대로 해먹고 학교를 다니는지? 연탄불을 꺼트려 추운 방에서 자지는 않는지? 그래도 오늘 네가 사는 모습을 오래간만에 두 눈으로 똑똑히 보니 그런대로 마음이 놓인다."

"안 챙겨 먹으면 저만 손해인데요."

"잘 생각했다. 항상 네가 우리 집안의 장남이요, 기둥임을 명심하고, 출세해서 네 동생 앞길도 열어 줄 생각을 해라."

"네, 어머니!"

"내 잔소리에 찬 다 식겠다. 어서 먹자!"

"네, 어머니!"

그날 밤 모처럼 모자가 한방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어머니는 일찍 집을 나서셨다. 집에 다녀오셔야 된다고 하시며. 그날 오후였다. 나는 학교를 파하자마자 할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다는 도립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병실에는 뜻밖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아침에 집을 가신다던 어머니와 동네의 처자 하나였다.

이 명희(李 明熙)라고 할아버지가 누누이 약혼이나 혼례를 올리라던 그 아가씨였다. 그래봐야 올해 열일곱 살 난, 아직은 처녀라 하기에도 뭐한 여자 아이였다. 놀라움도 잠시 나는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어떠세요? 할아버지!"

"그만하다만, 내 죽기 전에 빨리 저 아이와 약혼식이라도 해라!"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아직 학생이고 사귀는 여자도 있단 말입니다."

"네가 말만 있다해 놓고 언제 한 번 그 아이 집에 데려온 적 있느냐? 더 이상 거짓말에 속을 내가 아니니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라."

"그게 아내래도 그러네요. 할아버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렇게 해!"

할아버지의 역정과 강요에 나도 화가 나서 그대로 병실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저........ 저........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나는 병실에서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말을 더 이상 듣기 싫어 그길로 지국으로 달려왔다. 오는 내내 가만히 생각해도 이것은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엉뚱한 여자와 약혼이라도 하게 생겼으니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모종의 결심을 굳힌 나는 경리에게 물었다.

"오늘 새벽에 나온 세 아이들은 인수인계를 받고 있습니까?"

"네, 오전에 명단 전부 긁고, 지금은 다시 확인 중에 있는 걸로 알아요."

"다른 특별한 일은 없죠."

"네!"

"내 다른 바쁜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문 입구까지 따라 나온 경리 김명자에게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 자전거에 올랐다. 그리고 나는 곧장 금방으로 가서 대충 짐작되는 굵기의 금가락지 하나를 샀다. 반 돈짜리였다. 그리고 나는 곧장 집으로 왔다. 집에는 뜻밖에도 병원에 있을 줄 알았던 어머니와 이 명희가 와 있었다. 와락 짜증이 났다.

"무슨 일 있으면 지국으로 전화 달랬잖아요."

"엄마가 아들네 집에 오는데 그게 별일이냐?"

"혼자 오신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대충 집안 일 해놓고 나오셨다."

동문서답이었지만 내게서 오늘밤 여기서 두 사람이 자고 가겠다는 말로 들렸다. 더 짜증이 치솟아 밖으로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들어와 봐라!"

할 수 없이 대답도 안하고 골이 난 그 표정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니, 이 명희란 여자는 고개만 푹 숙이고 윗목에 앉아 있었다.

"네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게 있다."

나는 묵묵히 평소와 달리 엄숙한 어머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괜히 저러시는 게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 네가 알라나 모르겠다마는 명희의 부친과 아버지는 동갑내기야. 한 동네에서 같이 커온 죽마고우지. 해서 어릴 때부터 서로 술만 마시면 농담으로 해온 이야기가 있단다. 서로 딸과 아들을 낳으면 사돈 맺자고. 그게 너와 명희를 낳고도 계속 이어져 현실이 되었지."

가늘게 한숨을 쉬신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졌다.

"가끔 네 할아버지가 술김에라도 돌아가시기 전에 증손 보아야겠으니, 너 얼른 장가들이라는 말에, 그 이야기를 들려드린 적이 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너에게까지 보채긴 보채도 기다려주셨지만, 이제 당신도 아신다. 생명이 얼마 안 남으신 걸. 해서 저 아이를 이번에 데리고 나온 거야. 뭔 말인지 알아?"

"몰라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명희네 집에서도 이번에 아예 살림 차린 줄 안다. 급하니 식은 나중에 올리더라

도......."

말을 하면 할수록 가관인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화가 아니라 한숨 밖에 나오는 것이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는 경우를 당하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이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고민으로 한숨부터 쉬어졌다.

"그런데 왜 저한테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나도 너희 아버지 얼굴 한 번 못보고 친정아버지가 정해준 혼처로 그냥 시집왔다."

"지금이 그때와 같아요? 지금이 조선시대냐고요?"

"나도 조선시대 사람 아니다. 해방되고 육이오도 지나고, 한참 지난 세월에 널 낳은 거여."

"참 내........."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대화마저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드는 둥 마는 둥 대충 먹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나는 내일 아침 등교 길에 만나려던 생각을 접고, 바로 황수정의 집 앞으로 갔다.

내 처지가 한심했다. 막상 초인종을 누르려니 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라도 나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새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가운데 저녁놀만 붉게 타고 있었다. 나는 재삼 결심을 굳게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딩동!

"누구세요?"

물음과 함께 집안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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