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삐리 아빠-- >
다음날 오후 4시 55분.
청주 고등학교 교문을 나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나와 이 춘방(李 春芳)이라는 녀석이었다. 녀석과 나는 중학교 동창이나 같은 반이 한 번도 된 적이 없고 해서,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친구였다.
이 역시 가정 형편이 어려워 보충 수업도 안 하고 하교하는 중이었다. 자전거도 없어 먼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니는 그에게 다가가 내가 말을 걸었다.
"춘방아, 잠깐!"
"무슨.........?"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춘방이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아프시니?"
"늘 그렇지 뭐. 쾌차하기는 틀렸고,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무슨 병인데?"
"남들이 소위 말하는 풍(風)."
"저런, 저런. 쯧쯧........! 네가 힘들겠구나. 아버지도 안 계신다고 들었는데."
"중학교 때 돌아가셨어."
"게다가 외아들이라며?"
"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네."
"들었다. 너랑 나랑은 그래도 명색이 중학교 동창 아니냐?"
"하긴.........! 내가 이래저래 친구들 사귈 여유가 없으니, 난 늘 외톨이였다. 그렇지만 중학교 때부터 전교 1등이요, 싸움도 잘 하는 너와는 사귀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도 없고, 숙기도 없는 난지라 그렇게 되었다."
"말을 하려드니 잘 하네."
빙긋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이춘방이었다.
"가면 어머니 병간하는 것이니?"
"도와주는 동네 여자 친구가 있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부터인데, 지극정성이야. 고마운 일이지. 덕분에 나는 시간제로 이일저일 닥치는 대로 일해 어머니 약값하고 생활비 한다."
"새벽에 신문배달 안 해 볼래?"
"얼마나 주는데?"
"한 부 돌리는데, 한 달에 50원씩."
"몇 부나 돌릴 수 있는데?"
"한 200부."
"와.......! 그럼, 돈이 얼마야?"
"1만원."
"결코 작은 돈이 아닌데?"
이 당시 80kg 일반미 한 가마 값이 대략 12,000원 정도 하던 시절이니, 결코 작은 금액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너에게만 특별히 20원씩 더 쳐주는 거야."
"네가 무슨 권한으로."
"명색이 내가 지국장이다."
"뭐? 그럼, 가난하지 않잖아?"
"시작한지 얼마 안 됐다. 지금은 부수가 꽤 나가는데 오늘부터 한 사람 자리가 벼서 네게 권하는 것이다."
"고마워. 언제부터 나가면 되는데?"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새벽에 배달한다며?"
"인수인계를 받아야 어느 집인 줄 알고 배달을 하지."
"하긴 그렀네. 오늘은 안 되고 내일 학교 끝나고 인수인계 받을게. 오늘은 다니던 곳에 그만둔다고 이야기하고 나올게."
"알았다. 내일은 별 얘기 없어도 지국으로 바로 와라. 지국 위치는 학교에서 가까워."
이렇게 말한 나는 지국의 위치를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고맙다. 내일 보자!"
"기다릴게."
나는 그와 헤어져 그길로 바로 청주경찰서로 향했다. 그리고 정 소장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했다. 정 소장과 내게 좋게 합의를 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건 아니라고 보았다. 사업을 하다보면 알게 되는 것인지만, 이런 건을 용서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것이 어차피 지국 내에서는 빅뉴스라 누구든 처리 결과를 다 알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를 흐지부지 처리하면 아이들에게 못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내가 저렇게 해도 별 이상 없겠네. 최대로 해봐야 먹은 것만 게워내면 될 테니까.
이런 인상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심는 것이기에 다음에 다른 놈이 이런 일을 또 일으킬 개연성이 있다. 아주 철저하게 벌해야 이들 생각에
'아, 저 새끼 독한 놈이네! 함부로 했다가는 큰 코 다치겠는데!'
이런 인상을 주어야만 모두가 함부로 굴지 않는다. 전생에서의 나는 이런 면이 부족했다. 관용을 베풀다가 이것이 제2, 제3의 똑 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사업은 절대 무르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아주 절감한 사람이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자세히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아무튼 다음 날 바로 정 소장은 경찰서로 불려갔다. 나는 윤 경장을 비롯해 경찰서에 아는 사람이 많아, 나에게는 이것이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 취조하는 사람이 최소한 감옥에 들어가서 몇 개월의 형은 살아야겠다고 법률용어를 들어 설명을 하니, 겁이 더럭 난 정 소장이 울며불며 취조관에게 매달렸다. 이때쯤 경찰에서 나를 불러 합의를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내 의사를 물어왔다. 나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버텼다. 그러자 정 소장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내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겠다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이런 일을 처음 당해보는 그로서는 굉장히 쫄아 있는 상태였다. 물론 전과도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합의를 봐주었다. 권리금으로 주기로 한 10만원 중 채 지급하지 못한 5만원을 상계하고도, 그간 수금해먹은 돈 6,750원을 다 게워내기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윤 경장에게 들켰다. 내가 신고를 하던 날은 없었는데, 오늘은 자리에
있어, 지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킨 것이다. 해서 나는 그날 저녁 윤 경장을 전에 우리가 아침밥을 먹던 식당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해봐라."
자리에 앉자마자 이실직고 하라는 윤 경장의 다그침이었다.
"사실 어머니가 편찮으셨던 게 아니라 신문사 지국을 인수하기 위해서 지난번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마, 바로 얘기를 해도 빌려줬을 것인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고등학생이 공부나 하지, 무슨 지국운영이내고 혼만 났을 거예요."
"하하하........! 하긴 그렇다. 그래 적자는 안 보는 것이냐?"
"사실 좀 어렵습니다. 삼 개월이 지나면........."
"그러길래 뭐 하러 지국은 맡아가지고........"
"제 말 끝까지 들어보세요. 처음에 500부로 시작을 했는데, 이것 보세요."
나는 말과 함께 품속에서 증빙자료를 꺼냈다. 독자대장 카드였다.
"뭐 이렇게 두꺼워?"
"1,500부로 키웠습니다."
그동안 계속된 판촉으로 또 100부가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와아, 정말 대단하다!"
소년처럼 아니 내일처럼 기뻐해주는 윤 경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윤 경장이 아직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뭔데? 애로사항이 있으면 다 말해봐."
"이렇게 판촉을 하다 보니 기존 당장 수금되고 있는 신문이 좀 끊어져 나갔어요. 그래서 3개월간 운영비가 좀 부족합니다. 10만원만 가지면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데........"
"10만 원? 큰돈은 아니다만......... 내 어떻게든 마련해볼게. 내일 들려봐라."
"사부님, 이자는 없습니다."
"내가 마! 이자바랄 것 같으면 너에게 빌려주지도 않는다."
"고맙습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모처럼만에 제자 녀석에게 저녁 한 끼 얻어먹어보도록 하자."
"여기, 주문 받으세요."
"네, 학생!"
나의 부름에 예의 그 아주머니가 쪼르르 달려왔다.
"오늘도 순두부로 드실래요?"
"오늘은 육개장으로 한 그릇 먹어보자."
"들으셨죠? 육개장 두 그릇 주세요. 아주머니!"
"네!"
"그 소장 건은 어떻게 된 일이냐?"
"제가 어리다고 좀 얕잡아봤나 봐요. 해서 본보기로 본때를 보여준 것이죠."
"잘했다. 그런 것이 사회생활의 요령이다. 그렇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가면 앞으로도 그런 일이 발생할 개연성이 아주 크다."
나는 윤 경장의 칭찬을 들으며 멋쩍은 웃음을 짓다가 신문 경영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밥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해야 했다. 다음날 오후에 나는 세 놈과 경리를 모아놓고 정 소장 처리 결과를 이야기하니 모두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경리에게는 윤 경장에 빌린 돈 10만을 내놓아, 3개월간의 부족할 듯한 사무실 운영비로 충당하도록 했다. 일요일 저녁 6시.
이제 해가 많이 길어져 6시라도 해가 한 뼘은 남아 있는 듯 했다. 특별히 지국에서 할 일도 없고 해서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미정이가 내 집에 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일찍 들어온 것이 딱 맞았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내 빨래를 해서 마당에 빨랫줄에 널고 있었던 것이다. 그간 몇 번의 빨래를 해주었지만, 평소 꼭꼭 숨겨놓아 결코 빨 수 없었던 내 팬티 두 장도 함께 너는 것을 보고 나는 기가 차다 못해 말이 안 나왔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요. 빨래 널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내 팬티까지 빨았어?"
그 말에 홍조를 띤 미정이 항의를 했다.
"하면 안 되나요, 뭐? 신부가 신랑 팬티 좀 빨았기로 그게 무슨 큰 흉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하.........!"
뻔뻔한 그녀의 항변에 나는 할 말을 잇고 바람 빠지는 소리만 연발했다.
"누가 들으면 진짜 오해한다. 누가 신랑이고 신부야?"
"장차 그렇게 될 것, 아니 예요?"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고, 내가 결혼할 사람은 따로 있어. 이건 진짜니까 너, 흘려듣지 마.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다고."
"쳇, 누가 뭐래도 나는 대정 씨와 결혼할 거예요. 흥!"
"얘가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해도, 믿지를 않네."
"얼마든지 있어도 괜찮아요. 나랑 결혼만 하면."
"아이고 야..........!"
내가 머리를 쥐고 감싸 쥐는데 미정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빨래를 담았던 빈 대야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며 말한다.
"국수 먹고 싶은데, 국수 사올래요?"
"알았다."
"아까 확인해보니까 곤로에 기름도 없던 데요?"
"알았어, 기름도 사올게."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대두병을 들고 나와 국수 가게로 향했다. 그 집에서 석유도 팔고 하기 때문에 편리 했다. 나는 방앗간 있는 곳까지 내려와 국수 가게에서 국수 40원 어치와 기름 한 병을 샀다. 아무래도 기름을 대두병에 따르는 과정에서 기름이 묻어 미끄럽자, 석유가 묻을까봐 종이로 이를 싸주었으나,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미끄러워 잘못하면 병을 놓쳐 기름을 다 쏟을 번했다.
"자!"
나는 미정이에게 국수를 던지듯 주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곤로에 기름이나 넣어주지?"
"그런 것도 여자가 다 하는 거야."
투덜거리는 미정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우리 집에서 유일한 재산인 금성사 라디오를 틀었다. 때 아닌 유행가가 흘러나오는데 트롯트라 재미가 없어서 끄고 나는 다시 부엌으로 나왔다. 미정이 곤로의 뚜껑을 열고 이제 막 병을 들고 기름을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말없이 빼앗아 빠르게 넣었다. 콸콸 소리가 나며 잘 들어가나 일부는 밖으로 튀기도 했다.
"좀 천천히 넣어요. 새는 게 반이잖아요."
"조금 밖에 안 튀누만 무슨 반이나 샌다고........"
"쳇, 알아서 넣으세요."
돌아서더니 바가지로 물독에서 물을 퍼 냄비에 붓는 미정이었다.
"호박을 넣고 끌이면 더 맛있는데, 여름철이 아니니........."
내 말에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미정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입맛은 살아서.........."
"뭐라고?"
"아이고, 깜짝이야! 애 떨어지겠네!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생기지도 않은 무슨 애가 떨어져?"
내 말에 급격히 얼굴이 빨개지며 그녀가 항변했다.
"어른들 말이 그렇잖아요. 무심코 나온 말을 가지고........"
"알았다. 알았어. 어서 국수나 삶아라."
"물이 끓어야지요. 잔소리 그만하고 방에 들어가 계세요."
"알았다. 알았어."
나는 결국 미정이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방안으로 들어와 내일 시간표에 맞추어 미리 책가방이나 싸놓았다.
잠시 후, 미정이가 상을 들고 들어왔으므로 우리는 국수를 한 그릇씩 맛있게 비웠다. 그리고 30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공부를 해야 한다며 그녀를 집으로 쫓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