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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그룹-5화 (5/322)

< --고삐리 아빠-- >

10분 전 5시. 나는 미리 나오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제야 분식집에 도착했다. 오늘도 분식집 분위기는 똑같았다. 실내에 담배연기 자욱하고 남학생 몇 팀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는 신경 끊고, 그때부터 연신 시계만 보며 문가만 주시했다. 지금 차고 있는 이 시계도 부모님이 내가 청고에 수석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사준 시계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30분이 지나고 40분이 지나도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바람맞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도 나는 연신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10분을 더 기다렸다.

"아..........!"

내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신음소리였다. 시간은 벌써 5시 50분.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렸으나, 이제 바람맞은 게 확실했다. 이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세 사람이 출현했다. 정미정과 맹금자 일행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미정이의 등장이 반갑기도 했지만 내심으로는 놀란 가슴을 살짝 쓸어내리기도 했다. 내가 지금 이 시간에 황수정을 만나고 있었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하니 살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의 내심과는 상관없이 미정이 반가운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지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예요?"

"너야말로 이 시간에 웬일이야?"

"쟤네들이 하도 같이 나가자고 해서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잘 하는 짓이다."

나의 빈정에 마음이 상하기도 하련만 품성이 좋은 그녀는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오늘만이예요.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알았다. 튀김이라도 먹을래?"

"아니........."

그녀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드는데 옆 테이블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조용히 안 해. 시끄러워서 도대체 술이 안 넘어간다."

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이웃 남주동에 사는 고3으로 주먹이 가장 세다는 녀석이었다. 당연히 학교는 중간에 잘려 촌으로 다니고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상대하기가 싫어 아예 입을 닫고 눈살만 찌푸렸다.

"어쭈! 인상 쓰네. 눈 안 깔아! 확~!"

테이블 위의 젓가락을 들어다 놓는 녀석이었다. 표호기라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나는 미정이도 있는데 더 이상 상대하기 싫어 고개를 돌리는데, 또 나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쫄았냐?"

순간적으로 내 고개가 확 돌아갔다. 그리고 말한 녀석을 째려봤다. 역시 고3으로 표호기와 절친한 녀석이었다.

"아이고, 미치겠네. 이제 눈에 힘까지 주네."

녀석 대신 표호기가 건드렁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니 상대하기가 싫어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젠 말까지 씹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말이냐?"

이제 본격적으로 내 자리까지 걸어와 시비를 거는 녀석이었다.

"선배 대우 해줄 때 조용히 있어라. 앙!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

"허....... 참!"

나의 말에 기가 막히다는듯 웃던 녀석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한 걸음 더 내게 접근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녀석이 우리의 테이블에 있는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한 움큼 빼들었다. 그리고 내 눈을 향해 찔러왔다. 설명은 길었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에 대한 나의 대응도 민첩했다. 의자를 뒤로 밀며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눕힌 내 양발이 붕 떠올랐다.

"컥!"

턱주가리를 채인 녀석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나는 두 발을 당겨 반동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녀석의 곁으로 날아가 녀석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오른 주먹으로 복부를 강타했다. 이 순간에도 나는 명치를 가격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내 주먹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잘못하면 살인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가격하자 반동으로 튀어 올랐던 녀석의 몸이 물먹은 솜이 되어 가라앉았다. 이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놈들이 있었다. 지용준과 남희태였다.

"뭔 일이야? 무슨 일........."

나는 녀석을 놈들의 앞으로 밀어젖혔다.

"어~ 어!"

얼결에 표호기를 부축하며 뒤로 물러나는 둘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함께 했던 일행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변죽을 울리던 녀석마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눈길이 간 이상 녀석에게도 한 마디 했다.

"한 번 더 지껄여 보시지."

"아, 아니다."

손을 급히 내저으며 의자를 뒤로 빼는 녀석이었다. 김명성이라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괜찮은 것이냐?"

더 이상 적대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인지 옆에 있던 자가 나섰다. 나기성이라는 놈으로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표호기 앞으로 가 상태를 살핀 녀석이 호들갑을 떨었다.

"물 가져와. 물!"

아줌마 또한 놀랐는지 얼른 한 바가지의 물을 건네는 분식집 아주머니였다.

그대로 한 바가지의 물을 표호기에게 끼얹는 나기성이었다.

"끙.........!"

비로소 깨어나는 표호기였다.

"야! 살아났어, 살아났어!"

누가 들으면 죽었다가 깨어난 줄 알겠다. 김명성의 호들갑에도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표호기였다.

"꼴 보기 싫으니 꺼져라!"

나의 고함에 표호기를 질질 끌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는 녀석이었다.

"학생들! 계산은 하고 가야지."

"네, 네!"

나기성이 주머니를 뒤져 꾸깃꾸깃한 10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그들이 나가자 지금까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미정이 급히 다가와 내게 물었다.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말했다.

"괜히 좋은 분위기만 잡쳤잖아!"

별로 좋은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간다!"

나는 이래저래 기분이 상해 밖으로 나왔다. 남의 반응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런 내 뒤를 따르는 놈이 있었다. 남희태였다.

"뭐, 먹은 건 없어? 내가 계산할 게."

"고맙다만 없다."

나는 씨익 미소 짓고 아주머니에게도 인사를 했다.

"아줌마, 미안해요. 괜히 소란 피워서."

"아니, 쌤통이었어! 오기만 하면 꼭 한 건씩 사고치고 간 놈들이거든."

"그럼, 내가 잘 한 건가요?"

"그럼. 튀김이라도 줄까?"

"아, 아니 예요. 아주머니!"

나는 인사를 꾸벅하고 급히 밖으로 나왔다. 미정이 실처럼 따라 나왔다.

"들어가 공부나 해라. 괜히 이런데 쫓아다니지 말고."

"네!"

작은 소리로 응답하고 앞장을 서서 걸어가는 미정이었다.

나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밖은 어두워져 벌써 초저녁별이 빛나고 있었다.

"잡지도 않아요?"

앞장서서 가던 미정이 돌아와 서운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공부하러 가는 사람을 왜 잡아."

"그래도 요? 우리 기왕 만났으니 데이트 할래요?"

"데이트할 기분 아니다."

"왜요? 바람 맞았어요?"

"뭐?"

나는 깜짝 놀라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놀래요? 넘겨짚은 것인데? 정말 바람맞은 거예요?"

"아니야!"

나는 고개까지 저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학교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안 나왔어."

"청 고?"

"응!"

순진하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믿어주는 미정이었다. 그런 미정이가 나는 고마웠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우리 언제 만나기로 했지?"

미정이 서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레, 일요일 날이잖아요."

"기왕 만난 것, 오늘 데이트 하자."

"모레는 요?"

"마, 당연히 안하는 거지."

"쳇! 모레도 만나면 안 될까요?"

"공부는 언제 하고? 너무 그러다, 정든다."

"쳇! 저는 요, 요즈음......... 책을 펴도, 음악을 들어도, 학교를 가도, 밥을 먹어도, 온통 대정 씨 생각뿐이에요. 나 미친 거, 아니 예요?"

"하하하..........!"

"왜 웃으세요? 남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랑 고백하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책망하는 미정이었다.

"정신 차려, 이놈아! 난 정 많은 놈이 아니라고. 언제 돌아설지 모르니, 아예 정 주지마라. 엉? 알았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나 칵 죽어버릴 거예요."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됐다고, 그런 소릴 하냐?"

"한 번을 만나도 백 년을 만난 사람같이 정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 년을 만나도 영정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대요."

"시 쓰냐?"

"남의 정을 그렇게 무시하지 말아요."

팩하고 돌아서는 미정이었다.

"정말 내 말 거짓말 아니다. 내게 진짜로 정 주지 마. 그러다가 너만 상처 입는다."

"쳇? 지금 현재 사는 집이 어디 예요? 집이라도 알아 놓게."

"얘가 정말?"

나를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직시했다.

"너 정도 반반한 얼굴이면 쫓아다니는 놈들도 많을 텐데, 왜 그래?"

"다 필요 없어요. 저는 진짜로 대정 씨가 좋단 말 이예요."

울 듯한 얼굴에 마음이 약해진 내가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내 집 가르쳐줄 테니, 가끔 반찬이라도 해가지고 올래?"

"정말 이예요?"

"물론 농담이지."

"헤헤헤.........! 좋았다 말았네."

"욘석이........!"

나는 그녀의 보조개가 너무 귀여워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아, 아파요."

그러다 보니 멀지 않은 우리 집에 다 왔다.

"이 집이다."

"들어가도 돼요?"

"사내 혼자 사는데 냄새난다."

"나는 대정 씨 냄새라면 다 좋더라."

"변태 아니야?"

"그게 왜 변태예요? 사랑에 콩깍지가 씌었다면 몰라도."

"참 내.........!"

어이가 없어 실소하던 내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던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요."

"다음에. 치우지도 않았다."

"어때요?"

"어허..........!"

"쳇!"

나의 강력한 반응에 돌아서는 그녀였다. 그것도 잠깐 이었다. 금방 돌아서서 묻는 그녀였다.

"모레도 만나는 거죠?"

"안 돼!"

"왜요?"

"공부한다는 소리 못 들었어?"

"그럼, 다음 주 일요일이 예요?"

"오케이!"

"그럴 때는 속 시원하게 대답하네."

뭐라고 궁시렁거리는 그녀의 말에 내가 못들은 양 물었다.

"뭐라고?"

"아, 아니 예요. 다음 주에 봐요."

팔랑팔랑 멀어지는 그녀였다. 손까지 흔들며.

다음 날 아침.

나는 황수정의 집 앞을 지키고 섰다. 물론 골목길에서다.

예의 그녀가 나타났다. 나는 안 그런 척 그녀를 등지고 섰다. 그녀의 기척에 돌아서며 내가 말했다.

"또 바람맞혔네."

완전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아, 실례! 깜빡했어!"

"그게 할 소리야?"

"생각이 없는데 자꾸 만나자고 하니까, 그렇지."

무시하고 내가 말했다.

"시간을 정해."

"그런 분식집은 싫다."

"그럼?"

"빵집에서 만나자."

"거기도 찐빵 팔아."

"내가 알아봤다. 불량학생들만 들락거리더 만."

"나 불량학생 아니거든."

"너 빼고."

"푸 하하하........!"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재치까지 있는 황수정이었다.

"만고당(萬古堂)에서 보자."

"본정에 있는 제과점?"

"오케이! 아주 잘 아네!"

"몇 시?"

"음........! 오후 5시"

"언제?"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해 째렸다.

"왜?"

영문을 몰라 내가 반문했다.

"우리가 무슨 요일에 만나기로 했지?"

"어제 금요일."

"그럼, 당연히 다음 주 금요이이지."

"알았다. 알았어."

기분 더럽다는 듯 내가 솟은 돌맹이를 발로 찼다.

"왜, 싫어?"

"아, 아니야!"

"됐지? 이제 좀 비켜 줄래?"

자전거를 끌며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앞에 있었다.

"먼저 가시죠. 공주님!"

나는 자전거에서 손을 떼고 두 팔을 팔려 손을 땅바닥으로 향했다.

"호호호........! 제법이네. 누나를 모실 줄도 알고."

"누나 아니거든, 내가 볼 때는 나보다도 정신 연령이 한참은 어려."

"뭐라고?"

갑자기 뒤돌아서서 도끼눈으로 나를 째리는 황수정이었다. 정말 성질 한번 지랄 같다. 못들은 척 그냥 갈 것이지. 누가 저 청순한 외모에 성질이 저렇게 개떡 같은 줄 알겠는가. 아무래도 결혼하는 날에는 내가 잡혀 살 공산이 크다.

"아, 아니야. 어서 갈 길 가. 학교 늦겠어."

"너, 이 누나에게 계속해서 반말할 거야?"

"우리 친구 아니었어?"

"뭐? 친구? 친구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녀의 막말에 내가 벙 쪄서 멍하니 서있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누나 먼저 간다!"

나 역시 썩소를 흘리며 같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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