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정그룹-3화 (3/322)

< --고삐리 아빠-- >

살짝 모퉁이에 숨어서 보니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양옥집으로 초인종도 있는 집의, 남색 현관문이 삐걱 열리며 키가 큰 그녀가 나타났다. 170cm 정도의 큰 키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당시 여학생들은 길게 머리를 못 기르게 하던 시절이었지만, 샴푸를 선전하는 아이는 머리가 생명이기 때문에, 예외로 허락을 받은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걸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안 그런 척 멀찍이 받쳐놓은 자전거 곁으로 가서 섰다.

내가 그렇게 하고 서 있자, 피할 길도 없는 외길이라 내 곁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도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바람이나 맞히고 그럴 거야?"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위인 여고 삼학년이었다.

"야, 아직 어린놈이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수작질이야."

잘나기도 했지만 대가 센 그녀였다.

"그럼, 지난번에는 왜 나온다고 했어?"

"내가 언제? 네가 편지만 주고 달아나놓고는."

'내가 그랬나?'

며칠 전을 회상해보니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나올 거지?'

하고 물으니,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럼, 그 때는 그때고, 이번 토요일 날 7시에 진미분식으로 나와."

"안 돼. 나 공부해야 돼!"

"밤이라 그런 거야."

"그래, 밤이라 더 더욱 안 되고."

"그럼, 낮이면 되는 거야."

"수작질 그만 하고, 빨리 비키기나 해."

"확답 안 하면 못가."

"정말 애가 못 됐네. 이러다 학교 늦겠다. 빨리 비키기나 해."

"확답을 하래도!"

"참 내........!"

어이가 없는지 허탈하게 웃은 그녀가 말했다.

"너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빨리 비켜."

들었던 가방을 얼러 메고 한 대 칠 기세의 황수정(黃守貞)이었다.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하는 양이 귀여워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빨리 약속하고 가면 되잖아."

"그래, 좋다 토요일 날 5시다. 됐지?"

"고마워."

나는 빙긋 웃으며 먼저 자전거를 타고 달아났다. 내가 요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2학년으로 회귀한 이래, 벌써 10년을 어린 몸으로 살다보니, 전생은 꿈결 같고, 생각까지 아예 어린 몸으로 체질화된 요즘의 나였다. 그렇지만 때로는 어른이 되어 심유한 눈빛을 깜박이기도 하는 나였다. 나는 요즈음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나는 내 구역의 신문 배달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지국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배달나간 지국장이 돌아오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20분쯤을 앉아 있으니, 자전거 받치

는 소리와 함께 지국장이 들어왔다.

"왜 집에 안 가고."

"지국 나갔어요?"

"마, 지국 나갔으면 내가 배달하고 있겠냐?"

"나한테 파시죠?"

"참 내........."

어이가 없는지 소 하품하는 웃음을 웃더니 정강용 지국장이 말했다.

"돈 가져와 당장이라도 팔게."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물러서리라고 보고 그가 한 말이었다.

"이렇게 하죠."

"어떻게?"

내가 진지한 자세인 반면에 그는 아직도 능글능글 아직 반 장난기였다.

"제가 권리금으로 5만 원을 드리고, 정국장님을 소장님으로 채용하겠습니다. 그 대신 월급은 지난번 제가 약속한대로 5만원 씩 드리겠습니다. 보다시피 제가 학생이라 이를 전적으로 맡아 운영할 능력도 못 되고요."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중하게 생각하던 그 역시 진지한 자세로 돌아와 내게 물었다.

"정말이냐?"

"아, 그럼 이 시간에 집에도 안 가고 장난하게 생겼어요?"

"돈은?"

"당장이라도 계약서 작성 끝내면 드리지요."

"그래?"

반문한 그의 자세가 더욱 신중해지고 진지해졌다.

"네가 지국을 운영하려면 일단 명의 변경을 해야 한다."

신문사 관행을 잘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왜요?"

"내 이름으로 그냥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너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많이 올라 있는 지대를 한 푼도 깎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신문사 속성 상, 타인으로 명의가 변경되기 전에는 신문 판매 부수가 크게 떨어져도, 절대 지대를 감해주지 않는다."

여기서 말을 끊고 한숨 돌린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명의 변경이 되고나서, 새 주인이 협상을 하면 얼마든지 지대를 낮추어 주는 것도 신문사의 관행이기도 하다."

"알겠습니다. 자세히 가르쳐주어 고맙습니다. 명의는 제가 고등학생이라 안 될 테니, 다른 어른으로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지사와 협상을 할 때 국장님도 옆에서 잘 도와주십시오."

"여부가 있냐? 네 밑에서 월급을 받아야 할 텐데, 네가 잘 되어야 나도 받기가 떳떳하지."

"고맙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그래, 어디 돈부터 보자."

나는 신문지에 싸서 둘둘 말은 5만을 품속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좋다! 작성하자. 어떻게 해야 되지?"

"제가 준비해왔습니다."

나는 품에서 네 겹으로 접은 편지지 두 장을 꺼냈다. 그곳에는 대충의 양식이 쓰여 있었다.

서로의 주민번호와 성명 그 외에 계약 내용을 추가했다.

한국일보 서부지국장 정강용이 사무실 비품 일체와 기존 신문 700부에 대한 권리금으로 5만원을 받되, 후임자 강대정은 정강용을 월 5만원의 소장으로 임명한다는 조건까지 명기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지금 쓰고 있는 사무실의 임대문제였다. 현재는 보증금 10만원에 월 1만원의 사글세를 내고 있었는데, 보증금을 빼달라는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나머지 5만원을 전부 내준다 해도 5만원이 부족하므로 그를 잘 달랬다.

"이왕 국장님이 봐주시는 것 사글세는 제가 다달이 내고, 보증금은 월 2만원씩 다섯 달에 걸쳐 갚을게요."

나의 제의에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정국장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 지국이 지금 상태로는 다달이 적자다. 네가 본사의 박 부장과 상의하여 지대를 얼마나 깎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잘못하면 적자보기 십상이다. 아직 완전히 계약이 체결된 것이 아니니, 웬만하면 네가 손을 떼는 게 낫겠다."

"기왕 내친걸음이니 제 원대로 해주세요. 그리고 신문사 경영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비책이 준비되어 있어요."

"허허허.........! 내가 얘들 데리고 장난치는 것 같아, 좀 찜찜하기는 하다만, 네가 정 그렇게 나오니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런데 또 하나 계약서상에 문제가 있다."

나는 시침 뚝 떼고 물었다.

"뭔데요?"

"판매부수 700부를 명기하지는 말자."

"왜요? 그 전에 700부라 안 하셨어요? 그럼, 그 정도도 안 되는 거예요?"

"아, 아니다! 그냥 그럼, 그렇게 하자."

나의 강력한 항변에 당황한 정국장이 얼버무리더니 그 대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설마 고등학생인 내가 소장인 자신도 있는데, 나서서 일일이 부수 파악까지 하고 다니랴 하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종전의 보증금 및 사글세 조항도 부기로 넣어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나는 즉시 그 자리에서 5만원을 건네주었다. 물론 당연히 2부를 작성하여 서로 서명날인 하였다. 그날 오후.

당시 다른 학생들은 하루 2시간씩 수업이 끝나고도 보충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가정형편상 보충수업비 낼 형편도 못된다고 우겨, 남보다 2시간 빠르게 하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주인집 아저씨를 찾았다. 일용 노동자인 집주인 아저씨는 오늘 따라 일이 없는지 일을 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에 있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동네에 하나 있는 전방에서 막걸리 타령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가게를 찾아가 막걸리 두 되와 안주로 두부를 사들고, 주인아저씨를 집으로 청했다. 주전자는 나중에 갖다 주기로 하고 빌린 것이었다. 내 손에 들린 주전자를 보고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응해, 집으로 함께 발걸음을 떼놓

았다.

"무슨 일인데 네가 나를 다 접대한다고 그러냐?"

오순의 아저씨는 누런 이를 내보이며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물으셨다.

"청이 하나 있어서요."

"뭔데?"

집에 가서 말씀드리기로 하죠.

"그래, 그래."

둘은 금방 집에 도착했다. 나는 주인아저씨께 두부와 막걸리를 내밀었다. 이를 받아든 주인아저씨가 안방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임자! 문 좀 열어봐!"

"무슨 일 이예요?"

안방 문이 풀썩 열리며 삐쩍 마른 몸매에 해소기침을 고래지게 하는, 겉늙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 옆방 학생이 사온 것인데, 더운 물에 덥혀서, 간장이나 좀 끼얹어 줘."

"아이고, 오나가나 그 놈의 술은.........! 내 학생의 얼굴을 보아 오늘만 해줄 테니, 그리 알아요."

"알았어, 알았어! 얼른 해오기나 해."

아저씨는 마누라의 지청구에도 기분 좋은 얼굴로 두부를 내밀었다. 그리고 손수 부엌으로 들어가 대접 두 개를 내왔다. 이어 주전자를 잡고 흔들더니 자신과 내 것의 주발에 콸콸 따랐다.

"들자고."

"안주나 나오거든 드시죠?"

"자네는 그럼, 안주 나오거든 들어. 나는 먼저 한 대접 쭉 할 테니."

그렇게 말하고 그는 못 참겠는지 막걸리를 벌컥벌컥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손가락을 한 번 빠는 게 전부였다. 손가락에 간이 묻어 있어 짭조름하니 안주가 되는 모양이었다.

"부탁할 일이 뭔가?"

"실은 제가 신문사 하나를 인수하기로 했는데, 어른 명의가 필요해서요."

"그럼, 나보고 대신 계약을 서 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다 망하면?"

"망해도 절대 피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제가 무슨 돈이 있어, 그걸 하겠습니까? 신문사는 어렵고, 제가 착실해 보이니, 지국장이 한 번 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힘들다 싶으면 한두 달 해보고 때려치울 겁니다."

"그러면 모를까.........?"

그래도 일말의 의구심이 남아 있는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주인집 아저씨였다.

"그것은 최악의 경우고요. 혹시 누가 알아요? 제가 열심히 해서 좀 남으면 집세 외에도 단 돈 2천원이라도, 다달이 막걸리 값으로 드릴게요."

"정말이냐?"

"아니, 제가 아버님뻘 되시는 분을 모셔놓고 거짓말 하게 생겼어요. 지금?"

"하하하.........! 내가 쭉 지켜보아도 대정이 같이 착실한 학생이, 그런 실없는 소릴 하진 않겠지."

막걸리 값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아주 좋아라 하는 주인아저씨였다. 그렇지만 나는 배가 아팠다. 막걸리 한 되에 60원씩인데 매일 1되 꼴 이상을 사드리는 것이니, 나이 작은 게 억울할 뿐이다.

이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두부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잘 하세요. 대정이 학생이야 믿지만, 함부로 아무 한 테나 보증서지 말고요. 달랑 집하나 있는 것, 홀랑 안 날릴 리면."

"부엌에서 들었어? 알았어, 알았다고. 거기 놓고, 어서 들어가기나 해!"

"흥!"

세차게 콧방귀를 뀌고, 치맛자락을 여몄다가 안으로 들어가는 아주머니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내가 빈 잔에 막걸리를 채우고 있는데 아저씨가 물었다.

"내일 오후에 제가 학교 끝나고 모시러 올 테니, 도장하고 주민증 지참하시고 저만 따라오시면 돼요."

"알았네, 알았어! 내 자네 말대로 함세. 어서 한 잔 쭉 드세."

"네, 아저씨!"

그때부터 우리는 기분 좋게 막걸리를 마셨다. 그렇지만 나는 딱 한 잔만 마셨다. 그동안 동네에 쌓아놓은 좋은 이미지가 깨질까 봐서다. 다음 날 오후.

나는 주인집 아저씨를 모시고 청주공고에서 멀지 않은 한국일보 지사 사무실을 찾았다. 당연히 시간에 맞추어 정국장도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나는 본사 판매국 소속으로 충북 담당인 박 수동 부장과는 안면이 있었다. 그가 때로 신문이 제대로 배달되고 있는지,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각 지국을 돌았기 때문에 본 것이다.

"자넨가?"

기억에도 없는지 새삼 나를 아래위로 훑던 시선이, 이제는 집주인아저씨에게로 향해 약간은 실망한 기색을 띠고 말했다.

"신문 사업이 장난은 아닐세. 웬만한 사람도 1~2년 버티면 잘 버텼다고 소문이 나는 데가 이 동네야. 그런데 어린 자네가........."

주인아저씨의 눈치가 변하는 것을 보고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제가 어려 보여 경영이 힘들어 보이면, 그만큼 생각해서 지대나 많이 깎아주세요."

"이런 경우가 없긴 없는데.........."

한참을 고민 고민하며 생각하더니 최 부장이 말했다.

"계약은 이 어르신 성함으로 할 것이지?"

"네!"

"일단 계약은 체결하마. 그 대신 경영이 어설프면 3개월 쯤 지켜보다가 바로 접수 들어간다?"

"네!"

대답은 냉큼 잘 하는 나였다. 얼른 대답해놓고 심각한 안색으로 말하는 나였다.

"단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요 놈 봐라!'

하는 표정의 박 부장이 턱짓으로 내 말을 재촉했다.

"돈 들여서 열심히 키우는데 지대 먹이지 말고, 한 이년 쯤 후에 지대 조금만 먹도록 해주세요."

"그런 걱정 말고 열심히 하기나 해. 욘석아!"

"약속하신 거죠?"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한 그가 서둘러 계약서를 꺼내놓았다.

"지대는 얼마로 해주실 건데요?"

"음..........!"

잠시 생각에 잠기는 박 부장이었다.

============================ 작품 후기 ============================선작과 추천, 코멘은 작가를 행복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 미리 사례 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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