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삐리 아빠-- >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봄이면 가끔 거칠게 부는 바람도 없어 더욱 좋았다. 나는 어둠침침해지는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시계를 흘깃 보니 약속시간 10분 전이다. 나는 일찍 나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내새끼의 가오가 있는 법이다. 내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 내 단골인 분식집이 보였다. 간판은 분식집이나 주로 튀김과 막걸리를 병에 담아 파는 집이었다. 그렇다고 라면이나 칼국수를 전혀 팔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니 오늘도 변함없이 익숙한 분위기였다. 자욱한 담배 연기와 퀴퀴한 막걸리 냄새가 났다. 5개의 테이블에는 삼삼오오 끼리끼리 모여앉아 남학생들은 주로 막걸리를 먹고, 여학생들은 튀김을 먹고 있었다. 둘러보니 마침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내가 막 그곳으로 가려는데 나를 부르는 놈들이 있었다.
"어쩐 일이냐? 이리와 합석해라."
한동네 사는 내 또래의 양아치들이었다. 중퇴 아니면 고등학교에 들어갔어도 중간에 퇴학을 맞고, 청주 시내가 아닌 인근 소읍으로 전학을 간 자들이었다. 평소 나는 그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나 혼자 충북에서는 최고의 명문고인 청주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명문대 진학을 위해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도 그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절대 나를 무시하지 못했다. 공부도 동네에서는 최고로 잘 하지만 싸움 실력도 일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나를 건드릴 녀석은 인근에 아무도 없었다. 이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회귀하고 난 후 주력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곧 운동과 공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초 운동을 시작하여, 중학교 때부터는 태권도, 검도, 복싱을 하며 실력을 다졌기 때문에, 웬만한 놈들은 한마디로 잽도 안 되었다. 한번은 그런 나에게 우리 동네에서는 싸움을 최고로 잘 한다는 조희찬 이란 놈이 내게 시비를 건 적이 있었다.
악질 양아치로 처음에는 좀 엎치락뒤치락 했으나, 종당에는 내가 그를 돌려차기로 날려 보내고 몇 대 더 패준 사건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나에게 덤비기는커녕 동래 또래 모두가 나를 어려워하였다. 아니 실실 피하기 바빴다. 모르긴 몰라도 이 동네 싸움 일등은, 청주 시내에서도 싸움 실력으로는 수위를 다툴 것이다.
왜냐하면 청주시내에서도 우리 동네인 모충동과 이웃한 남주동이 제일 못사는데다, 아이들이 거칠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곳에 잘 출입하지 않는 내가 나타난 것이 이들은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전혀 이런 곳에 출입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담배도 피우고, 가끔 답답할 때면 술도 마시러 이곳에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위 이들이 말하는 뻐끔 담배로 깊숙이 빨아들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직 확실히 중독 된 것도 아니어서, 있으면 피고 없으면 안 피웠다. 학교에서는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다. 괜히 담배 때문에 정학 맞을 일은 없잖은가. 아무튼 내가 간단한 손짓으로 이들의 제의를 거부하고 빈자리를 찾아가는데 나를 또 하는 체 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오래간만이다. 이리 와 앉아."
청주공고에 다니는 지 용준과 남 희태 라는 놈이었다. 청주공고에 다닌다는 것은 집은 못살아도 공부는 꽤 한다는 소리였다. 당시 대학진학자는 또래의 10%를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웬만치 사는 집은 거의 고등학교 졸업으로 공부를 마치는 것이 대부분인 시절이었다.
하긴 대학을 가고 싶어도 예비고사라는 시험제도가 있어서, 여기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예 대학 입학 자격을 주지 않는 시절이었다. 이 제도에 의해 대학 진학 욕구자의 절반이 또 잘려나갔던 것이다.
"다음에. 만날 손님이 있다."
이렇게 이들의 청마저 거절하고 빈자리에 앉는데 내 옆자리 겸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은 세 여학생의 떠드는 소리가 내 귓가를 두드렸다. 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끄고 힐긋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 3분 전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망부석이 되어 문가만 주시하기 시작했다. 초조한 시간은 자꾸 흐르기 시작했다. 1분, 2분이 지나 약속한 시간인 3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것도 안 시키고 기다린 시간이 무려 30분. 이제야 나는 직감적으로 바람 맞은 것을 알았다. 괜히 몸에서 열이 나고 부화가 끓어올랐다.
"아주머니! 막걸리 세 병만 주세요."
"튀김도 줄까?"
"됐어요. 술만 주세요."
나는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술만 시켰다. 나는 유리컵에 막걸리를 따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바로 한 잔을 따라 그 잔 역시 단숨에 비웠다. 이렇게 5잔을 거푸
마시니 빈속이 찌르르 하며 뭔가 소식이 왔다. 이 와중에도 내 앞 자리에 앉았던 공고생 두 명은 여학생들과 수작질에 여념이 없었다. 괜히 이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나 나는 꾹 참고 술잔만 비워나갔다. 어느새 술병이 다 비어있었다. 미련을 갖고 세 병을 차례로 더 따라보나, 그야말로 병아리 오줌정도 밖에 나오지 않았다.
'알뜰히도 마셨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주머니를 뒤져보니 몇 병은 더 마실 여력이 있었다.
"아주머니, 여기 두 병만 더 주세요."
"네, 대정(大正)이 학생!"
'확실히 상술이 뛰어난 아주머니군!'
내 머리를 스치는 단상이었다. 한 번은 내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복을 입고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명찰을 한 번 보고 난 후,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하긴 내가 너무 잘나서 인지도 몰랐다. 공부하면 공부, 싸움이면 싸움, 인물이면 인물, 어느 하나 빠지지를 않으니.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아주머니 연령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사십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아직 어린 나를 남자로 생각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아주머니가 막걸리를 가져왔으므로 나는 말없이 이를 글라스에 따라 또 한 잔을 비웠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학생들에게 들러붙은 녀석들은 시끄러웠다. 아니래도 바람을 맞아 심란한데, 이들마저 이러니 괜히 짜증이 났다. 회귀해서 나는 이번 생에는 꼭 실패한 첫사랑을 이루리라 작정을 했다. 그 의도로 오늘 처음 시도한 데이트 신청이 무참히 깨져 기분이 최악인데, 이들마저 이러니 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내가 그런 기분으로 이들을 째려보는데, 지용준이라는 놈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 명이 모자라네. 네가 하나 차지하는 게 어때?"
녀석의 말인즉슨 여자가 세 명인데 자신들은 둘이니, 내가 거기에 끼라는 말이었다.
"됐어! 너희들끼리........."
말을 해놓고 생각하니 꿩 대신 닭이고, 화난 김에 서방질한다고 슬며시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말 도중에 여학생 셋을 뚫어지게 살피니, 게중에는 군계일학으로 아주 빼어난 여학생이 있었다. 가히 내 첫사랑과 쌍벽을 이룰만했다.
내 첫사랑과 쌍벽을 이룰 정도면 정말 뛰어난 미녀에 속하는 것이다. 내 첫사랑이야말로 이 당시 뜨는 샴푸광고 모델의 주인공 이었으니까. 이 여학생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이 순식간에 변했다.
"잠깐!"
제지를 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그 자리로 갔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아예 손가락질까지 하며.
"저 여학생은 내 차지다. 나머지는 너희들끼리 가위 바위 보를 하던지, 짝을 정해!"
나의 말에 모두 아연해 나를 쳐다보는 이들이었다. 커진 10개의 동공을 무시하고 나는 내가 지목한 여학생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였다. 모두의 눈길이 나에게 쏠렸다.
"나가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였다.
"나가자니까."
버럭 역정을 내며 나는 강제로 여학생의 팔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이... 이러지 말아요."
마지못해 끌려나오며 겁먹은 얼굴로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그녀였다.
"아직 계산도 안 했단 말이 예요."
"저 두 녀석이 계산하게 내버려두고 우린 나가자."
나는 그녀의 등을 밀며 뒤에 대고 소리쳤다.
"내 계산도 부탁해!"
"저 새끼가 정말!"
지용준의 말에 내가 녀석을 째려보자, 손을 저으며 애매한 웃음으로 시선을 일행에게 돌리는 그였다.
이어 일행에게 말하는 지용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기껏 꼬셔놨더니, 누구에게 상납한 꼴이잖아. 그래도 우리의 오야붕이니 할 수 없지."
체념한 듯 말한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야, 저 녀석의 말대로 우리 넷이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자. 이기는 사람은 이기는 사람끼리 편먹고........ 무슨 말인지 알지?"
"OK!"
지용준의 말에 남희태라는 놈이 동조했다. 여학생 둘도 서로 쳐다보더니 키득거리며 곧 가위바위보에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내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잠시 걷자고."
".........."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르는 그녀였다.
나는 문득 시선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참으로 별이 곱기도 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 떨기들이 온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한 걸음 발걸음을 늦춘 내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주저주저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대답했다.
"정 미정(鄭 美貞)이예요."
"난 강 대정(姜 大正)이야. 청주고 2학년이고."
"저는 청주여고 2학년 이예요."
"알고 보니 서로 동급생이네. 서로 말 틀까?"
"거기는........ 진즉부터 말 놓았잖아요."
"하하하.........! 그랬나?"
웃음의 여운이 남은 음성으로 내가 말했다.
"이제 거기도 말 놔."
".........."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녀였다.
와락 짜증이 치밀어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놓을 거야, 말거야?"
"그........ 그래 요."
"뭔 대답이 그렇게 어정쩡해."
"너무 어른스럽고, 겁이 나서........"
그 말에 나의 시선이 흘깃 그녀에게 향했다. 나의 시선에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갑자기 고개를 푹 떨군 그녀가, 아주 작은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았어. 말 놓을게."
만족한 웃음을 지은 내가 물었다.
"집이 어디 인데?"
"원 집은 내수고, 모충동에서 자취해."
"혼자?"
"아니, 둘이서요."
부인하느라 머리를 흔드는데, 그렇게 길지 않은 머리칼이지만, 머릿결이 참으로 탐스러웠다. 내가 말이 없자 미정이가 부연 설명을 했다.
"아까 내 왼쪽에 예쁘장하게 생긴 애 있잖아요. 걔하고."
"공부는 잘 해?"
"좀 하는 편이예요."
아직도 존댓말과 반말을 오락가락하는 미정이였다.
"반에서 몇 등정도 하는데?"
"10등 안에는 들어."
"제법 하는 모양인데, 명문여고에서 그 정도이면."
더 이상 답을 않고 희미하게 웃기만 하는 미정이였다.
"거기는 요?"
"반에서 1등, 전교에서 3등 안에 들어."
"와~! 굉장하네요."
나는 그냥 미소로 답을 했다. 잠시 둘 사이에 말이 끊겼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그 침묵이 어색한지 그녀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아까 보니 주변 아이들이 꼼짝을 못하던데, 싸움 잘 해요?"
"좀 해. 남한테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야."
"에이~, 그 정도가 넘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할까?"
"네~!"
고개를 주억거리며 갑자기 내게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함인지 방긋 미소를 짓는 그녀였다. 꽃이 활짝 피어난 듯 예쁘다. 그렇지만 나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청주시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걸. 중학교 때부터 운동을 해, 무술 고단자니까."
"무슨 무술을 익혔는데요?"
"태권도, 검도, 복싱!"
"그렇게나 많이요?"
"응."
"정말로 싸움도 잘 하겠다."
미정이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운동을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싸움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싸움은 깡이다. 누구에게나 밀리지 않을 용기 즉 배포가 두둑해야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 악바리 근성도 좀 있어야 된다. 정미정의 간접적인 물음에 나는 그냥 웃는 것으로 답을 하고 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금요일."
"우리 언제 다시 만날까? 내일?"
"아니요. 매주 토요일은 집에 가봐야 돼요. 다음 주 금요일이 좋겠어요."
"그럼, 그날 7시에, 그 분식집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지."
"네!"
수줍게 대답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정미정이었다. 다시 말이 뚝 끊겼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무심한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침묵이 어색한지 미정이 또 말을 걸어왔다.
"아까 술을 연거푸 몇 병 정도를 비우는 것 같은데, 안 취해요?"
"별로. 입만 놀랬어."
"정말요?"
"그럼, 거짓말 할 필요가 없잖아. 술 좀 해?"
"아직 한 번도 안 마셔봤어요."
"그랬군. 보기보단 착실한 모양인데?"
"내가 어때서요? 저 착실해요."
"그런 사람이 이런 분식집에 와?"
"오늘 처음 와 본거예요. 아까 그 계집애가 하도 한 번 가보자고 해서요."
"믿지."
나의 주억거리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방긋 웃는 정미정이었다. 다시 한 번 눈이 부심을 느끼는 나였다. 순간적으로 모란이 만개한 듯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험, 험, 예쁜데........!"
나는 애써 그녀를 평가 절하했다. 그래도 그녀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잠깐의 침묵동안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는 한참을 꽃다리 방향으로 걸어왔다. 둘의 대화에 팔려 정신없이 걸었던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새로운 시작입니다!
끝까지 함께 동행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편안한 날 되세요!
^^============================ 작품 후기 ============================새로운 시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