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13장-4절] 다시 시작이야!
땅땅!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재판받은 라누벨 환자. 나는 피해자로서 그 재판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결론만 말하자면?
기가 막힌 판결이 나왔다.
“가해자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자폐증으로...”
“강문수 씨...”
“...아, 네?”
판사의 판결을 멍한 얼굴로 듣고 있던 나를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깨어난 직후부터 가해자의 상태가 저 모양이라서... 재판을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귀신에 씐 가해자를 치료한 사람이 피해자가 된 상황이라서 보복 의혹이 나올 수 있습니다.”
“보복... 황당하긴 하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감사합니다!”
재판은 가해자가 교도소 대신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걸로 마무리!
어처구니없는 판결이었지만, 내 잘못도 있어서 불만을 표시할 순 없었다.
‘꿈속에서 갓난아기로 변했다고, 현실에서도 뇌가 퇴화할 줄은...’
저건 자폐증이 아니라 뇌를 포맷해서 아기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몸은 이미 늙었고 전과기록이 수두룩하기에 평범한 여생을 보내기 힘들지 않을까.
그걸로 만족했다.
“강문수 씨~!”
“올림픽에 또 참가하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한 말씀만...!”
조금은 시들시들해지는 것 같았던 내 인기는 올림픽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뜨거워졌다.
“그만 물어보십시오. 참가한다고 100번도 더 얘기한 것 같네요.”
일반적인 선수들은 올림픽이 2년마다 찾아오고, 젊은 신인들이 치고 올라오는 탓에 계속 주목받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동계, 하계 가리지 않기에 매년 올림픽이 있는 셈!
피메달 때문에 여러 종목을 동시에 진행하지 않는다는 올림픽 규칙이 있어서 오래 진행하기에 더욱 그렇다.
하계 올림픽의 폐막식이 끝나고 눈이 내리면 동계 올림픽 개막식. 그리고 동계 올림픽 폐막식이 끝나고 눈이 녹으면 하계 올림픽 개막식...
무한 반복이다.
“이번에도 전 종목입니까~?”
“그건 아직 못 정했습니다. 참가한다고는 했지만, 모든 종목을 나간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예전에 참가하셨던 수영과 태권도는...”
“질문은 여기까지. 법원까지 오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찰칵찰칵!
기자들이 사진만 찍고 돌아가지 않도록 적당히 호응해준 후, 경호원들의 도움으로 전용차에 올랐다.
“바쁘네요.”
“불평하시면 안 됩니다. 재능이 많아서 바쁘신 거니까요.”
“끙...”
올림픽이 너무 자주 열린다고 불평하는 목소리가 늘 있었지만, 스포츠토토 관계자들과 선수들이 피를 토하듯 외치면서 저지하고 있다.
아! 피메달을 노리는 선수들은 동계, 하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종목을 참가하기에 나처럼 바쁘다.
...훨씬 바쁘지 않을까?
초인적인 육체로 거의 모든 종목을 찍어 누르는 나보다 훈련이든 준비든 더 할 테기에.
수행원의 말처럼 불평하기에는 내가 가진 게 너무 많았다.
물론,
“마약이라...”
나도 놀면서 지금의 초인적인 육체를 얻은 건 아니다.
벌레처럼 팔다리가 찢겨보고, 허리가 절단되고, 미사일 폭격도 받아보고, 낙하산 없이 추락해보고, 타인에게 몸을 빼앗겨보고, 외계인을 만나고...
일반인은 목숨이 10개여도 불가능할 만큼의 경험을 쌓았다.
“마약이요?”
앞좌석에 앉은 수행원이 너무 뜬끔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행복한 꿈을 마약에 비유한 남자가 갑자기 떠올라서요. 자기 여동생도 몰라볼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꿈과 마약은 엄연히 다릅니다. 마약은 사람이 행복감을 느꼈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인 도파민을 인위적으로 100배 넘게 생성하도록 하니까요.”
“도파민... 오랜만에 듣네요.”
중고등학교 생물 수업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마약의 무서운 점은 의존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한 번 마약에 빠지면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고, 사람을 불행의 늪에 빠트립니다.”
“흠...”
내가 마약을 해보지 않아서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강문수 씨가 마약에 빠지면 다리가 예쁜 여성을 보더라도 아무런 느낌을 못 받게 됩니다.”
“어... 그건 좀 심각하네요.”
배우신 분답게 예시도 직관적으로 알기 쉬웠다!
“요즘은 소량의 마약을 유통하기만 해도 손모가지를 무조건 자르면서 근절됐지만, 일부 국가에선 마약을 형벌에 사용합니다.”
“형벌요?”
“네. 강문수 씨의 외가인 신성로마제국을 예로 들자면, 중범죄자들을 마약 중독에 빠트린 후에 감금합니다.”
“언제까지...”
“그건 죄질에 따라 다릅니다. 그렇게 형량을 모두 마치고 풀려날 때는 마약 중독도 치료해주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헐...”
“사형이 행복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두가 무서워하는 형벌입니다. 제국의 치안은 신앙이 아닌 마약이 잡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죠.”
“무서운 나라였네요.”
이 밖에도 범행을 실토하게 만들기 위해 마약을 쓰는 나라도 있다고...
인권은?
P의 적성검사로 뽑힌 정치인, 법조인들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법치국가를 추구한다. 이 부분은 P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인이 정치인과 법조인 역할도 했던 시절이 있으니까. 적성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 셈이다.
(점검에 들어갔던 P의 적성검사기가 정상화됐습니다.)
(전문가들은 적성검사기에 의존하는 현 사회를 꼬집어 비판했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P의 적성검사기가 사라진다는 음모론이 잠잠해졌습니다.)
(P의 적성검사기는...)
내가 차 안에서 노래를 안 듣기에 자연스럽게 뉴스가 들려왔다.
“P의 적성검사기로 여전히 시끌시끌하네요.”
“뭐...”
그 직접적인 관계자로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해도 불만, 안 해도 불만. 사람이 참 그렇습니다.”
“하하... 그러게요.”
악마 아싸의 난동도 결국은 어린애 같은 투정, 불만이었다.
행복하게 해줘서 불만이라니?
그 행복을 마약이 주는 착각이랑 동일시하면서 이 사달이 났다.
‘착각이라...’
꿈을 현실로 착각한 환자를 많이 보았다. 아니, 대부분은 판타지 작품 속의 주인공들처럼 현실이라고 믿는다.
반면,
“뭘 보고 계십니까?”
“제가 일했던 편의점 사장님의 팬카페요. 가상현실게임 속 아내랑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게시했네요.”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충실하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랬고...’
꿈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호위기사 발렌타인을 사랑했고, 상실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무엇이 정답일까?
이것만은 다양한 경험을 한 나조차 확답할 수 없었다.
“다행입니다.”
“예?”
“예전에 강문수 씨가 스포츠토토 앱만 들여다보고 계실 때는 제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왜요?”
내가 수행원에게 무슨 짓을 했나?
“강문수 씨의 근접 호위의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스포츠토토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아...”
“그렇다고 경호원들의 위치 배정을 제비뽑기로 정할 순 없잖습니까? 정말 힘들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힘들게 해드렸네요.”
“괜찮습니다. 고생한 만큼 지갑은 두둑해졌으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은퇴해도 될 만큼은 벌었습니다.”
“...그런데 왜 계속하세요?”
경호원이란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유사시에 목숨 걸고 총알받이가 돼야 할 만큼 위험한 직업.
하물며 수행원은 잡일까지 도맡아서 처리해야 하는 힘든 자리다.
“이 자리를 지옥 취급하면서 안 맡고 저에게 떠넘겼던 친구들의 바뀐 태도가 괘씸했습니다.”
“제가 지옥이었군요...”
“강문수 씨의 몸에 문제가 생기면 전쟁을 각오하라는 제국의 엄포가 있었습니다. 그 탓에 정신적인 부담감이 상당한 건 사실입니다.”
“아하!”
“그렇게 귀한 황족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방치했으면 참 뻔뻔하죠.”
“그러게요.”
내가 정말로 ‘황족’일 뿐이었다면 전쟁이란 말까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P의 자손.
나는 족보 덕분에 황제와 교황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다. 지금도 그쪽에선 내가 제국의 여성들에게 성은(聖恩)을 내리길 바라고 있으리라.
꿈속의 어린 나처럼.
“도착했습니다.”
“빨리 왔네요.”
스윽-
이런저런 주제로 수행원이랑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육군사령부의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공관에서 일반적인 가정집으로.
물론, 일반적이라고 하기에는 경호원이 지나치게 많긴 했지만,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단순한 ‘올림픽 국가대표 1명’의 희생이 아닌 외교적인 문제로 불거지는 까닭에 더욱 신경 쓰고 있었다.
“어서 와.”
“새근새근.”
잠든 아들을 품에 안은 송선영이 나를 반겨줬다.
“일은?”
“잘 마무리됐어.”
그 쓰레기를 정신병원에 넣는 결말이 과연 잘된 걸까, 라는 의문이 계속 맴돌긴 하지만, 이 문제를 계속 신경 써봤자 남는 건 없다.
빨리 잊고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있다.
“새근새근.”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라도 안 좋은 일을 빨리 보내버리는 편이 낫다.
“힘들었지? 이젠 내가 안을-”
“응애! 응애~!”
“...이 녀석이 벌써 차별하네.”
“애가 바보인 줄 알아? 집에 안 들어오는 아빠보다는 예쁜 엄마가 훨씬 좋은 건 당연한 거야.”
“큭!”
너무 옳은 소리를 하는 송선영의 핀잔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들~!”
집에 어머니도 계셨다.
“무슨 일이세요?”
하나하나의 목숨이 소중한 라누벨라는 한자리에 함께할 수 없다. 절대적인 법은 아니지만, 웬만하면 지키는 편.
그리고 이 ‘라누벨라’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주 놀러 오긴 해도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안 오시는 편인데...
“일이 있어야 엄마가 오나요?”
“네.”
가출까지 한 인간답지 않게 어머니는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편이다. 이런 부분은 황녀, 라누벨라 13세가 더 융통성 있다고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다.
“제국에 아들 혼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그걸 왜 어머니가... 아!”
남편이 또 출장을 간다는 말에도 송선영이 가만히 있었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
“썼어요.”
“부작용은 없겠죠?”
“아들처럼 실수해서 약혼하- 웁웁?!”
“거기까지!”
잘 알았습니다!
아내에게 최면술을 사용한 건 마음에 안 들지만, 통화가 아닌 ‘라누벨라’를 통해서 직접 전달할 만큼 비밀스러운 이야기란 뜻이리라.
‘가야지.’
악마들이 사라지면서 P의 건강이 호전되었는지도 궁금하고.
“언제까지 가면 되나요?”
“아들도 하계 올림픽을 준비하려면 바로 출발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중간에 또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네.”
나만 보면 우는 아들을 물끄러미 한 번 보고 다시 몸을 돌렸다.
집에 오자마자 해외 출장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P를 만나러 안 갈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후딱 처리하는 편이 낫겠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심히 다녀와.”
“다녀올게.”
효율적인 인류 사회를 구축한 신, P를 만나러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