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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26화 (227/232)
  • 226화

    [13장-2절] 창세기를 보자

    바다의 신, 태양의 신, 예술의 신, 여행자의 신, 지혜의 신, 운명의 신...

    신(神)들이 역할을 나눠서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꿈. 인간들은 신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벌레나 다름없었다.

    “내 다리~!?”

    아싸에게 절단된 발목이 회복되질 않아서 공황에 빠진 라누벨 환자. 이 세계의 의료기술을 고려하면 꿈에서 깰 때까지 못 붙일 것 같다.

    아! 방법이 아예 없진 않군.

    “아저씨. 또 만났는데, 이번에도 무릎 꿇고 계시네요.”

    “강문수?! 네, 네가 왜 여기에?!”

    모든 그리스 신을 홀로 제압할 만큼 강한 힘으로 신전이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온 최강의 신.

    붙지 않는 발을 잡고 안간힘을 쓰던 그는, 자신의 파라다이스에 초대하지 않은 이물질을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질문이 잘못됐습니다.”

    “당장 대답해...!”

    “여기는 무당인 내 일터이고, 당신은 일거리입니다.”

    “여기서 무당이 왜 나와!”

    내 설명이 너무 함축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해주자.

    “여긴 꿈입니다.”

    “개소리!”

    “감방에서 재판만 기다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것이 더욱 개소리 같지 않습니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라누벨 환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당신은 조금 전에 귀신에게 살해될 뻔했습니다.”

    “살해? 꿈이라며?”

    이어진 내 설명에 허점이라도 발견한 듯이 비아냥거리는 남자.

    이젠 구질구질한 설명을 접고, 내 방식대로 상대하리라.

    “그래. 꿈이라서 이런 것도 돼.”

    “뭔- 꾸엑?!”

    빠각!

    내 주먹이 라누벨 환자의 턱주가리를 적당한 힘으로 후려쳤다.

    “가, 감히! 어?!”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제압했던 내 힘이 어째서 안 써지지? 라고 생각하는 얼굴이다.”

    “무슨 짓을 한- 꾸엑?!”

    “일단 맞자고.”

    퍽! 빠각! 퍽퍽! 푹...!

    재판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아내의 목숨을 노린 녀석이 감옥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니?

    이 새끼랑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사실이 매우 싫었다.

    “그, 그만... 아악?!”

    “꿈의 장점이 뭔지 알아? 보는 눈이 많아서 억제해야 했던 본성을 마음껏 표출해도 된다는 거야.”

    퍽! 퍼벅!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어리석은 짓만 경계하면, 이곳만큼 완벽한 ‘어른의 놀이터’가 또 있을까?

    최강의 존재도 내 영역, 내 앞에서는 약골로 변한다.

    “살려- 꺼윽?!”

    “오늘은 이게 마지막.”

    빠각!

    악당답지 않게 잘생긴 얼굴 정면에 내 주먹을 꽂아 넣으며 성형시켜줬다.

    “아으으...”

    “아직도 여기가 현실 같아? 죽을 때까지 내 샌드백 신세가 된 여기가 현실 같냐고.”

    “.......”

    “대답을 안 하네. 처음부터 다시-”

    “아닙니다! 꿈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 현실일 리 없습니다...!”

    충분한 ‘대화’를 나눈 라누벨 환자가 드디어 내 설명을 이해한 것 같아서 조금 뿌듯했다. 이것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장인의 마음인 걸까?

    가슴이 웅장해진다.

    “잘 들어. 훈련받은 개새끼처럼 내 말을 잘 따르면 현실의 아늑한 병실에서 눈을 뜨게 될 거야.”

    “......”

    “교육이 덜 됐네.”

    “헉! 아닙니다! 이해했습니다! 정말 이해했습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라누벨 환자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앞으로는 바로바로 대답해. 반응이 없어서 샌드백에 말하는 줄 알았잖아.”

    “네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괴롭히는 내가 ‘마법소년 최강훈’을 닮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기분 탓이다.

    “지금처럼 기어 다니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붙여봐.”

    “...헉!”

    조심스럽게 시도한 그가 두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했다.

    “이젠 도망쳐봐.”

    “네?”

    “도망치란 말을 몰라?”

    “아, 아닙니다!”

    남자가 내 눈치를 보다가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콰당!

    접착했던 다리가 떨어지며 신전 폐허를 나뒹굴었다.

    “그래. 그렇게 돼.”

    “아으으... 내 다리에 무슨 짓을...?”

    “귀신에게 당한 상처는 무당만 치료할 수 있지.”

    “그런 억지가...!”

    “어디가 억지지? 귀신 잡는 무당이 귀신에게 당한 상처를 치료하는 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치료가 전혀 안 됐습니다.”

    라누벨 환자는 욕하고 싶다는 얼굴로 조곤조곤 말했다.

    “그건 나랑 멀어져서 그래.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거지. 아! 접착제를 바르고 꿰매면 붙긴 하겠군.”

    “그, 그런...”

    망연자실하는 그에게 더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육아(育兒)로 바쁜 아빠고, 이런 새끼를 상대하는 것보다 내 아들의 기저귀를 가는 편이 훨씬 즐겁고 만족스럽다.

    “야.”

    “...네.”

    “모든 신을 쓸어버린 너의 권능은 뭐냐?”

    “우라노스입니다.”

    우라노스(Uranus).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하늘’을 관장하는 태초의 신, 1세대 신이다.

    땅을 관장하는 가이아의 처녀 잉태를 통해서 태어났으며, 자기 엄마랑 짝짓기해서 낳은 막내아들 크로노스에게 거세당하기 전까지 세상을 지배했다.

    즉, 유일한 약점은 시간!

    하지만 그 유일한 약점은 손자 ‘제우스’에게 똑같이 거세당하고 봉인됐기에 막아설 적수가 없었다.

    ...라는 설정이었다.

    “멋지군.”

    적성이 예술가도 아닌 인간이 생각해낸 세계관치고는 짜임새가 탄탄하잖아? 소설 소재로 써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

    “하늘 아래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제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력처럼 하늘로 짓누르기에...”

    “아아.”

    이해했다.

    “하지만 시간(크로노스)은 하늘(우라노스)과 땅(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짓누를 수 없는 시간이 저에겐 유일한 천적입니다.”

    “잠깐!”

    “예?”

    “네가 말하는 크로노스와 이 크로노스는 발음만 같은 다른 존재야.”

    “그게 무슨...?”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의 이름이 크로노스인 건 맞는데, 이 녀석은 시간이 아닌 농사와 계절의 신이야.”

    “그러면 시간의 신은...?”

    “발음만 같은 다른 신. 가이아가 낳은 우라노스랑 같은 항렬의 형제지. 그래서 크로노스의 상징은 우라노스를 거세할 때 사용했던 낫이야.”

    “......”

    설정이 제법 탄탄한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잘 아는 이유?

    모든 판타지 작품의 시조가 ‘고전 판타지’에 해당하는 종교와 신화에서 비롯됐기에 공부 좀 했다. 지금처럼 라누벨 환자를 설득하는 등의 원활한 업무 진행을 위해서.

    “그래서 어원이 달라. 태초신 크로노스는 그리스 철학에서 ‘시간’을 뜻하는 순수한 단어고, 우라노스의 막내아들 크로노스는 낫으로 농작물을 ‘자른다.’는 의미에서 비롯됐지.”

    “그렇다면 여긴 왜...”

    “네 꿈이니까.”

    “......”

    “네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을 교정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한 결과지. 너무 실망하지 마. 영어권 국가에선 철자(綴字)가 달라서 혼동하지 않는데, 음절만 따온 나라의 사람들을 잘 틀려. 요즘은 애들도 유치하다고 안 보는 신화에 관심 있는 사람도 드물고.”

    “내가 유치하다니...”

    즉, 이 세계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완전판이라고 보면 안 된다.

    라누벨 환자가 알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생성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일 뿐. 그게 잘못된 지식일지라도 꿈은 수정하지 않는다.

    작가의 실수를 편집자가 수정하지 않고 그냥 연재하듯이...!

    P가 창조해낸 이 세계들은 그다지 성실하지 못하다.

    “이해했어?”

    “진짜로 꿈이라니...”

    보통은 이 정도로 절망하고 ‘꿈’임을 인식하면 깨어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정상!

    검귀와 악마들이 있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억지로 생성된 세계라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꿈의 주체인 환자가 죽거나, 모든 검귀가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후자.

    악마를 포함한 모든 검귀를 처리해서 이 세계를 끝낼 계획이다.

    다만,

    ‘아싸를 공격한 악마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다 잡은 물고기(아싸)를 쫓아내면서 나의 야근을 부르긴 했지만, 그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

    착한 악마.

    애초에 ‘악마’라는 표현도 라누벨라 8세가 만들었기에 악마가 그 ‘악마’인 건 아니다.

    강문수 식으로 표현하면?

    착한 익귀!

    그래서 지금부터는 둘을 나눠서 부르기로 했다. 나쁜 악마는 그대로 악마! 착한 악마는 익귀!

    별의 이름을 맨 처음에 발견한 과학자가 정하듯, 착한 악마를 부르는 호칭도 내가 정하는 게 순리잖아?

    마음에 든다.

    “지금부터 내 설명을 잘 들어. 귀신은 너를 죽이기 위해 또 올 거야. 그리고 귀신에게 살해되도 현실에서 눈을 뜨긴 하는데, 몇 분 안에 심장마비로 죽어.”

    “진짜로?”

    “내 아내를 공격한 새끼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겁주기 위해.”

    “오!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을걸? 환생의 존재를 믿고 자살하는 인간은 없잖아?”

    전혀 없진 않다.

    내 아내니까!

    “젠장...”

    “한 번만 내 앞에서 욕하면 혀를 뽑아버릴 줄 알아.”

    “......”

    “대답.”

    “네.”

    가장 중요한 라누벨 환자의 확보에는 성공했다. 협조도 완만한 대화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을 듯하고.

    이제 남은 건?

    날갯짓 한 번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악마를 붙잡을 방법이다.

    ‘어디 보자...’

    악마를 잡으려면 세계를 작게 축소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 세계가 창조되는 과정을 그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창세기부터 이해해야 한다.

    「태초에 카오스란 ‘혼돈’이 있었고, 무거워진 혼돈은 아래로 가라앉아서 땅과 바다가 되고, 가벼운 건 위로 올라가서 하늘이 됐다.」

    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지옥(타르타로스), 대지(가이아), 욕망(에로스), 어둠(에레보스), 밤(닉스)을 관장하는 다섯 태초의 신이 탄생...

    이 형제들끼리 또 아웅다웅하며 짝짓기해서 낮(헤매라), 공기(아이테르), 하늘(우라노스), 산맥(우레아), 바다(폰토스) 등이 태어나며 세계가 완성된다.

    세계를 축소하려면?

    ‘어디 보자... 낮과 밤은 죽여도 의미가 없고, 어둠과 욕망도... 하늘은 환자라서 죽일 수 없고, 그러면 산맥, 바다, 대지만 남는데...’

    산맥과 바다는 태초의 신이긴 하지만, 바다의 신이 포세이돈인 것처럼 이 둘은 추상적인 개념만 남았다.

    타르타로스도 마찬가지. 태초의 신으로서 가이아와 형제자매이긴 하지만, 타르타로스(지옥)는 가이아의 자궁을 의미하기에 둘을 하나로 봐야 하리라.

    결론!

    “가이아는 어디에 있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관을 좁히려면 가이아의 협조가 꼭 필요했다.

    “그, 그건...”

    “어서 말해.”

    “......”

    “또 맞을래?”

    “헉! 신전 지하에 감금해뒀습니다!”

    “설정이긴 해도 아내인데 감금을? 변태냐?”

    “그 설정 때문입니다! 우라노스는 아내의 배신으로 추락한 신이기에!”

    “왜? 그러면 다른 신들처럼 모가지만 남겨서 장식해두지.”

    “...대지의 여신다운 풍만한 몸이 제 취향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우리는 무너진 신전 지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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