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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23화 (224/232)
  • 223화

    그 이후의 일은 썩 즐겁지 않다.

    악마를 몰살시키면서 임무 종료. 이제 단 6마리만 남았으며, 그중에 문제를 일으키는 1마리를 제거하면 진짜 끝난다는 정보도 입수...

    정보에 거짓이 섞였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건 현실에서 밀린 문제부터 끝낸 후에 알아보면 될 것이다.

    “엉엉!”

    지미 로리쿤은 어린애처럼 서럽게 울고 있었다.

    드라마 같은 반전 없이 ‘전 약혼녀의 친구’에게 차였고, 그는 모든 걸 잃은 인간처럼 좌절했다.

    “힘내세요.”

    “...강문수 씨도 알고 계셨습니까?”

    “네. 기적 같은 반전을 기대했지만, 없었던 것 같네요.”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저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당신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모습을 자주 봤으니까요.”

    “......”

    음? 이건 무슨 소리지?

    “조금 전에 그녀가 고백했습니다. 저보다 당신이 좋다고. 그래서 이 관계를 더 유지하기 힘들어졌다고.”

    “...힘내세요.”

    이 정도면 단순히 차인 수준이 아닐까?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이라면 총살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강문수 씨! 어서 약혼식을...!”

    악마가 박멸됐음을 확인한 아가씨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달려왔다.

    나도 진짜 곤란하단 말이지!

    꿈에 들어갈 때마다 송선영에게 미안한 짓을 해온 건 맞다. 내가 죽일 놈이란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칭찬받아야 하지 않을까?

    나르시아 엘베레스트.

    총리의 딸은 ‘강문수’를 빨리 소유하기 위해 매력적인 알몸 노출은 기본, 수면제와 미약 같은 악랄한 수단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약물은 나에게 통하지 않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란 평가를 받는 여성의 유혹은 매우 강렬했다.

    ‘그러나 나는 견뎌냈다!’

    돌격해오는 여성을 내던지거나 피할 순 없어서 포옹은 제법 했지만, 입맞춤 이상은 한 번도 안 했으니까!

    내가 그동안 잘못을 많이 저질렀지만, 이번만큼은 내 절제심에 박수와 칭찬을 주고 싶다.

    “로리쿤 씨.”

    “네...”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물어볼게요.”

    “네. 뭐든 물어보세요...”

    “살기 싫다는 말, 진심입니까?”

    “어... 막상 총구가 제 머리를 조준하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진심입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충분? 어?”

    톡.

    나는 손끝으로 라누벨 환자의 이마를 밀치며 말했다.

    “집에 갈 시간입니다.”

    * * *

    위대한 선배에게 한 번 당했고, 라누벨라 7세에게 또 당했다.

    두 번이나 직접 당하면서 봤기에 흉내는 어느 정도 가능. 하지만 워낙 고급 기술이라서 나는 ‘조건’이 있다.

    라누벨 환자의 마음!

    꿈의 세계에 대한 집착을 상당 부분 내려놔야 한다. 현실로 강제 추방하는 선배나 추기경보다는 몇 수 아래.

    하지만 환자를 완전히 설득해야 했던 이전이랑 비교하면 매우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번뜩!

    현실로 돌아오면서 두 눈을 뜬 나는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여긴...?”

    엘몰랑스 병원의 복도에 배치된 대기석이었다.

    그런 내 주위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호원 둘이 좌우에 서 있고, 대기석 건너편의 문 앞에도 한 명...

    자연스럽게 문에 걸린 간판의 글씨를 보게 됐다.

    [초음파실]

    “아...”

    예전에 송선영이 보여준 ‘임신 증거’인 태아 사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강문수 씨?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우측의 경호원, 낯익은 수행원이 내 행동을 수상하게 바라보며 질문했다.

    “...들어가도 됩니까?”

    “네. 송선영 씨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지만요.”

    “괜찮습니다.”

    지금의 나는 진짜 강문수니까. 송선영이 들어오지 말라고 한 강문수는 대역인 눈깔 촉수다.

    끼익-

    잠겨 있지 않은 초음파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아! 강문수 씨!”

    “어머!”

    의사와 간호사로 짐작되는 남녀가 보이고, 등받이가 젖혀진 의자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일어났어?”

    “아...”

    “그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네.”

    언제나 늘씬한 모습만 보아왔던 그녀의 배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잘 잤어.”

    의사와 간호사가 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게다가,

    ‘와! 와와~!’

    송선영의 아랫배 안쪽에서 벌어지는 신비를 비춰주는 초음파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꿈속이긴 해도, 너무나 쉽사리 빼앗았거나 빼앗기는 인간의 생명.

    하지만 그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다.

    “이 추세면 출산예정일은 변동 없이 4일 뒤가 될 겁니다. 정확한 시간은 오차가 있겠지만, 새벽 4시 전후일 가능성이 70%쯤 됩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의 성별이 궁금했지만, 그건 나중에 따로 물어보면 된다. 초음파실에 온종일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4일만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아이는 매우 건강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가 뭘 했겠습니까, 아이의 건강은 산모가 만드는 거죠.”

    의사가 맞는 말을 했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거 참... 아! 강문수 씨,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네.”

    의사가 나에게?

    “내년에 국내에서 치러지는 하계 올림픽에도 참가하실 겁니까?”

    의사가 내 올림픽을 신경 쓰는 이유가 신기했지만, 내 인지도를 고려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건 예정대로 갑니다.”

    “아아, 네.”

    태어난 아이의 성별로 참가를 결정하겠다는 공식 발표.

    나의 유치하면서도 이기적인 생각이겠지만, 나보다 내 아이가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끝났습니까?”

    “네. 초음파 영상은 저장해서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저에게 진찰을 맡겨주셔서.”

    “......”

    산부인과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에 막 나온 시점이라서 그러려니 넘어갔다. 뭐가 고마운지는 상황 파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게다가,

    ‘4일...’

    그것보다는 4일 뒤에 태어날 아이가 더 중요했다.

    * * *

    “아들이야.”

    초음파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길에 만삭의 송선영이 가르쳐줬다.

    “아...”

    “실망한 것 같네.”

    “흠흠. 우리 집안은 늘 여자가 미인이었고, 남자는 평범했으니까. 그래서 딸이길 원한 건 맞아.”

    정확히 말하면, 집안의 남자들이 평범한 얼굴로 미녀들을 잘 낚아챘다!

    아! 그 반대인가?

    모계(母系)로 보면, 집안의 예쁜 마녀(魔女)들이 쥐뿔도 없는 평범한 얼굴의 남자들에게 계속 낚였다!

    “네가 어때서?”

    “평범하지.”

    “너무 잘생겨도 문제야. 여자들이 계속 꼬일 것 같아서 걱정되니까. 너는 그런 걱정 안 해?”

    “당연히 합니다. 하지만 걱정까지 하진 않아. 내가 그 건방진 새끼의 목을 바로 그어버릴 거니까.”

    “흐응~ 정말로 목을 긋는지 시험해보고 싶은데.”

    “해봐.”

    올림픽 해설위원이 우스갯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내 양궁 실력이면 감시카메라의 사정권 밖에서 사람을 저격할 수 있다고...

    그건 농담이 아니다. 내가 목을 긋진 못해도 머리에 구멍을 뚫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아빠를 살인자로 만들 순 없으니 참을게.”

    “그래...”

    내가 아빠가 된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송선영의 빵빵한 배를 보니 더 실감이 됐다.

    “일은?”

    “잘 풀렸어.”

    나는 솔직하게 ‘공상과학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풀어놨다.

    인조전사, 모선, 공간도약, 악마...

    그리고 내가 ‘총리의 딸’의 유혹을 뿌리친 믿음직스러운 남자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또 여자가 꼬였네.”

    “하지만 내가...”

    “그건 잘했어.”

    “...끝?”

    좀 더 기뻐하며 칭찬할 줄 알았는데, 내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당연한 걸 했을 뿐이잖아. 하지만 그 여자애, 진짜 괘씸하네. 유부남이라고 설명해도 달라붙다니!”

    “원하는 것을 못 가져본 적이 없는 여자였으니까.”

    총리의 막내딸, 나르시아 엘베레스트는 그런 여자였다.

    나는 꿈의 세계에서 만난 인연들의 이름은 금방 잊거나 무관심한 편인데, 이토록 선명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 것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문화부 장관의 딸은?”

    “...그쪽은 취향이 특이하다고 본인이 직접 말했어.”

    “그러면 나는 특이한 남자랑 결혼한 셈이네.”

    “어? 어... 그렇게 되나...?”

    “너는 지금 얼굴이 딱 좋아. 더 잘생겨지면 여자들이 더 달라붙어서 나만 피곤해져. 솔직히 말해서, 불 끄면 너의 미친 체력 빼고 아무것도 안 보여.”

    “흠흠!”

    이건 칭찬이 맞겠지? 칭찬이 맞으니 나랑 결혼했을 거다.

    위이잉-

    호주머니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누구 전화야?”

    “최강훈.”

    “그 음흉한 녀석, 네가 깨어난 걸 귀신같이 눈치챘네.”

    “우연이겠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후배의 통화를 받았다.

    * * *

    “아들이라네요.”

    강문수랑 통화를 마친 최강훈은 송선영이 음흉하다고 표현했던,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바로 시작합니까?”

    “네. 저희가 꾸준히 매입한 스포츠 토토의 모든 주식을 매각하세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4일 안에만 전부 매각하면 됩니다.”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아들.

    강문수의 바람대로 모두가 그의 2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남긴 한마디 때문에.

    아들이면 올림픽에 또 출전!

    딸이면 본업에만 충실!

    거대한 자본이 흐르는 ‘스포츠토토’라는 자본주의 괴물이 한 아이의 성별로 운명이 결정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왜?

    “스포츠토토는 은메달을 맞추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해야 할 겁니다. 금메달 확정인 경기에 누가 돈을 걸겠어요? 세금 떼면 맞춰도 적자일 텐데.”

    “그렇습니다.”

    “시스템을 바꿔도 피메달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망했고...”

    현재, 스포츠토토의 영업 이익은 역대 최고조였다.

    이유는?

    피메달의 유력한 후보들이 전부 떨어지고 뜬금없이 ‘강문수’가 된 덕분이다.

    송선영이 상당한 거액의 20,000배를 가져가긴 했지만, 그러고도 어마어마한 돈이 남았으니까. 이 돈은 고스란히 회사의 뱃속에 들어갔다.

    “아들... 무슨 선물이 좋을까요?”

    “아들이면 인형보다는 장난감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평범한 선물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네요. 저희가 형의 아들 덕분에 얼마를 버는데.”

    하지만 좋았던 가을이 가고 끔찍한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음... 아! 도시 한복판에 동물을 키울 수 있는 공원이 어떨까요? 애완동물이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좋다는 이야기도 있고.”

    “정보의 가치를 고려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적당한 부지의 후보를 한 번 뽑아주세요. 싹 밀고 공원을 조성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네. 회장님.”

    “...아! 그리고 전에 성별이 진짜 궁금하다는 친구가 하나 있었죠?”

    “네. 건설사의...”

    “맞아요. 그 나이 많은 친구요.”

    피메달의 중요한 이유.

    다음 올림픽은 피메달을 가져간 선수의 국가에서 치러진다.

    관광, 건설, 문화, 홍보...

    전염병 같은 재난만 없다면, 개최국이 얻는 이득이 엄청나리란 건 굳이 계산기를 두들겨볼 필요도 없다.

    “조기 출산의 가능성도 있으니 너무 질질 끌면 좋지 않고... 이틀 뒤로 약속을 한 번 잡아주세요.”

    “네.”

    최강훈은 엘몰랑스 병원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며 웃었다.

    “형도 참...”

    간웅(奸雄)은 거인(巨人)이 흘리는 금덩이들을 편하게 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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