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12장-6절] 약속해다오
라누벨라 8세는 범인(凡人)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하기 힘들 만큼 매우 자비로운 신(神)이다.
적성검사기의 연료가 된 사람들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갖고 있어서, 자신을 해코지해도 참고 견뎠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말도 안 되지!’
가족은 근본이다. 행복하기만 했던 내 인생이 어머니가 실종된 뒤부터 잘못되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내 가족을 위해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도 종종 있지만, 그건 방식이 잘못됐을 뿐이다.
“강문수...!”
“무슨 짓을 한 거지?!”
“협상할 마음이 없는 거냐!”
“강문수~!”
악마들이 내 이름을 부르짖으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다 모였네.”
라누벨 환자의 세계가 조금만 더 좁혀지면 내 영역 안에 완전히 들어온다.
지금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놈들을 정신없이 공격하면 몰살 가능.
그만큼 세계는 좁아졌고, 그만큼 악마들은 공포에 빠졌다.
‘사랑은 위대하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
라누벨 환자가 사랑에 빠지면서 이 세계관의 장르가 공상과학에서 로맨스로 바뀐 덕분이다.
“우리를 다 죽일 셈이냐!”
“우리를 속였구나!”
“이 악마 놈!”
악마에게 악마란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너희도 잔뜩 죽여 놓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섭섭하지.”
저 새끼들이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였는지는 뉴스를 통해 실컷 보았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검귀는 주위의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죽이지만, 악마는 행복하게 사는 인간을 굳이 찾아가서 죽이는 악질이다.
“어차피 꿈이잖아!”
“진짜 사람을 죽인 게 아니야!”
“게임이라고 생각해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형 상자의 벽에 바짝 붙은 악마들은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너희는 나를 설득할 시기를 놓쳤어. 아무리 미쳤어도 내 가족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깜빡!
눈깔 촉수가 자연스럽게 칼로 변하면서 내 오른손에 쥐어졌다.
“늦지 않았다! 협상하자!”
“이건 잘못됐어!”
“가족?! 전혀 몰랐어...!”
“강문수~!”
시간을 더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지금이 딱 적기다.
‘환자가 미녀의 간호를 받으면서 세계가 일시적으로 좁혀진 거야.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 조금은 넓어지겠지.’
사람이 진짜로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가 아닌 이상, 세계가 줄어드는 면적에도 한계가 있는 듯했다.
“성불해라.”
깜빡~
어서 하라고 재촉하듯 칼에 박힌 눈깔이 빙글빙글 돌았다.
재촉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만화나 영화에서 꼭 나온다. 대화로 시간이 늘어지면서 역전의 기회를 주는 황당한 상황이.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나는 유부남이고, 아내는 임신 중이니까. 세계의 벽에 코팅한 뒤부터 어머니랑 소통이 안 되면서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른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 강문수 2세가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을 내 눈으로 꼭 보고 싶으니까.
그러니,
“혈신 만세...!”
위대한 선배님이 보우하사. 혈신의 이름으로 몰살해라.
* * *
악마들은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날개를 활용해서 도망쳤다.
하지만 모기장 안에 갇힌 모기처럼 도망칠 수 있는 공간에 한계가 있었고, 에프킬라처럼 광범위로 공격하는 내 영역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놈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댕강!
그리고 이런 놈들은 어김없이 ‘무엇이든 자르는 팔도 자르는 칼날’에 의해 깔끔히 절단됐다.
“아악?!”
“나는 죽기 싫...”
“히이익~?!”
“살려- 커윽?!”
나는 헌터물 의 세계에서, 내 목숨을 노린 정치인의 가족까지 괴물의 아가리에 밀어넣은 전적도 있다.
먼저 나를 죽이려 해놓고, 자기들이 당하니 인간도 아니라는 등의 욕과 저주를 퍼붓는 뻔뻔한 인간들.
이젠 살려달라는 구차한 애원에는 만성이 돼버렸다.
“어림도 없지.”
P의 자유와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놈들은 사라져야 한다.
댕강! 푹! 서걱...!
행운의 여신도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밖에서 비명이 들려와요.)
(내가 목숨 걸고 지켜줄게.)
(로리쿤 오빠...)
(나를 믿어!)
(멀미로 고생하는 사람이요?)
(어흠! 그래도 지켜줄게!)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면서 라누벨 환자가 청춘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사랑의 힘에 비례해서 줄어드는 세계관!
악마들은 더욱 수세에 몰렸고, 상대적으로 제법 잘 도망 다니던 놈들도 버티지 못하고 다진 고기로 변했다.
다만,
‘이건 좀 아쉽네.’
적의 숫자만큼 소환되는 칼날.
그건 다시 말해, 적의 숫자가 적으면 칼날도 적어진다.
수많은 칼날이 정신없이 하늘과 바다를 휘젓고 다닐 때는 악마들도 우왕좌왕하다가 실수로 당했는데, 칼날이 줄어들면서 요리조리 잘 피하고 있었다.
‘허! 요것들 봐라?’
막거나 흘릴 수 없고 빨라서 위협적이긴 하지만, 칼날의 움직임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추적한다.」
「절단한다!」
그렇기에 예측이 쉽고, 요령이 생긴 악마들은 칼날이 건드리지 못하는 유람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유람선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악마가 유람선의 좌우를 왕복만 해도 잡을 방법이 없었다!
“흠. 마지막 2마리가 안 잡히네.”
깜빡깜빡!
감정 기복이 적은 눈깔도 열받아서 촉수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도 악마의 날개보다 빠를 순 없었는데...
“강문수 님.”
“강문수 님.”
이 호화유람선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딸을 사랑하는 총리가 보낸 인조전사들이 하녀 옷의 치마폭 아래에 숨겨둔 최첨단 무기를 꺼냈다.
찰칵.
그 모두가 재래식 기관총. 판타지가 통하지 않는 악마와 나를 상대로 가장 효과적인 무기 중 하나였다.
“지원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런데 어째서 이제야...”
“강문수 님의 사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사냥... 그래, 사냥이지. 내가 사냥이라고 했으니까. 악마는 사냥감이고.
인공지능이 정말 쓸데없는 배려를 하고 있었다.
“지원해. 하지만 죽이진 마.”
“네. 지원합니다.”
두두두두!
유람선 갑판에 선 인조전사들이 치마폭 아래에 숨겨둔 기관총을 꺼내서 바다에 쏘기 시작했다.
“아...”
“이런...”
상황을 주시하면서 악마들의 움직임을 수학식으로 계산을 마친 인공지능.
사냥에 투입되자마자 ‘예측 사격’을 했고, 요리조리 잘 피하던 두 악마는 단 몇 초 만에 날개를 잃고 바다에 추락했다.
풍덩! 풍덩!
처음부터 이들의 지원을 받으면 수월했을 것 같지만, 내 손에 죽어야만 또 부활하지 못하기에 안 된다.
‘안 되지, 안 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켜야 한다. 불안한 요소를 남기긴 싫으니까.
불안한 요소란?
이 세계에 모든 악마가 왔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분명히 게으르거나 겁이 많은 녀석 한둘은 안 왔을 테니까.
그것들이 ‘내 수법’을 알게 된다면 또 쓸 수 없다.
‘코팅도 확신이 없고.’
내 손에 죽지 않은 악마의 영혼은 어디로 갈까? 코팅에 막혀서 부활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코팅을 뚫고 다른 세계에서 눈을 뜰 가능성도 있다.
이건 이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라누벨라도 모른다고 답했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 내 손에!
내 손에 죽으면 부활하지 못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인 셈.
푹!
날개를 잃고 바다에 추락한 악마를 칼날 촉수가 토막 냈다.
“이제 남은 건...”
갑판 위로 추락한 최후의 한 마리.
유람선이 파괴될 수 있어서 아직 죽이진 않았지만, 이 정도 거리면 내가 직접 해도 된다.
“또 만나는군.”
“아아, 너였구나?”
아름다운 여신의 머리를 잘라서 나에게 선물해줬던 악마.
나를 꿈의 세계에 가둔다는 무시무시한 계획도 이 녀석의 머리에서 나왔다.
‘무슨 꿍꿍이지?’
갑판 위로 추락한 것도 우연이 아닌 계획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시간을 끌 셈?”
“그랬다면 이 팔과 다리로 유람선에 구멍을 냈겠지.”
“...맞는 말이네.”
악마는 손발의 칼날이 갑판에 닿지 않도록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무방비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우리도 좋아서 이런 몸이 된 게 아니다.”
“그랬겠지.”
아니라면 이토록 개성 없지 않았을 테니까.
얼굴과 체형은 차이가 있지만, 완전히 하나의 종으로 분류된 것처럼 똑같은 특징을 가졌다.
“조물주는 잔혹하다. 우리가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없도록 손발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건 조물주랑 말이 다르네. 너희의 형태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진짜 싫었던 모양이군.”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얌전히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다.”
악마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넋두리하듯 말했다.
“조물주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약속하지. 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준다면.”
“뭐지?”
“살아남은 동료가 몇이나 되지?”
“......”
이건 너무 노골적인 질문이었나?
“내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죽일 거다.”
“내가 알려주면, 찾아가서 죽일 셈인가?”
“대답하기에 따라 달렸지.”
“무슨 대답? 내 동료를 팔라는 거냐?”
“이 자리에 안 나왔다는 건, 너희에게 동참하지 않았다는 뜻이잖아. 칼을 내려놓고 제대로 대화해볼 생각이다.”
“그 반대다.”
악마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라고?”
“우리는 동료 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중도(中道)였다.”
“호옹...”
이들에게도 그리스의 의회 제도 같은 원시적인 사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네 말대로 평화를 원하는 녀석들이 있지. 이성이 없었던 검귀 시절에 벌인 무분별한 살인에 죄책감을 짊어지고, 정의의 사도 행세하는 녀석들.”
“호오~”
그런 악마도 있다고?
“도와줘도 우리의 외모 때문에 늘 결과가 좋지 못한데, 바보처럼 계속 봉사하는 바보들. 우리 다음으로 많다. 인원은 총 다섯.”
“좋네.”
그런 착한 악마라면 안 죽여도 되지 않을까?
“문제는 한 녀석이다.”
“......”
“우리를 통틀어서 가장 힘이 센 녀석이 지. 녀석이랑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13대1로 싸워서 이겼다.”
“강하네.”
검귀 사이에서도 개인차가 있었듯, 악마도 개인차가 있는 건 당연하지만, 그 차이가 훨씬 컸다.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날개 때문에 포위가 힘든 탓일까?
일단은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이름은 없다.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녀석을 아싸라고 불렀다.”
아싸.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줄임말.
그 구시대의 유행어를 듣자마자 ‘아싸’가 어떤 악마인지, 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래서?”
“그나마 머릿수로 통제하던 우리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면 아싸는 마음껏 날뛸 것이다.”
“무슨 수로?”
날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다. 놈은 내 손바닥에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는 사냥감일 뿐.
“놈은 주인공을 죽인다.”
“너희도 죽이잖아.”
“조금 다르다. 녀석은 반감을 살 만큼 잔인하게 죽인다. 가족의 팔다리를 조금씩 자르며 고문하고, 실컷 즐긴 후에 주인공을 죽인다.”
“그래도 죽인다는 건 똑같잖아.”
무슨 말을 하나 했네.
“그랬다면 녀석도 이 자리에서 우리랑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겠지.”
“......”
“녀석은 협상에 관심 없다. 죽을 때까지 죽일 뿐이지.”
“미친놈이네.”
“내가 할 말은 끝났다. 약속은?”
“지키지. 성실하게 대답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그래...”
댕강!
나는 가차 없이 마지막 악마의 목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