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221화 (222/232)
  • 221화

    “...로리쿤 씨, 뭐해요?”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는 라누벨 환자가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편지 쓰는 중입니다.”

    “그건 보면 압니다. 제 말은, 평소에 절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 같아서 묻는 겁니다.”

    “옛날이야 잘나가는 함장이고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쥐뿔도 없잖습니까? 이런 정성 점수라도 따야죠.”

    “흠...”

    이 세계의 장르가 공상과학에서 로맨스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네?

    지미 로리쿤은 ‘완벽한 그녀’가 전 약혼녀의 친구란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 바보야...’

    연애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춰준다면, 그건 ‘운명’이 아닌 ‘사기’를 의심해 봐야 한다.

    “헤헤헤.”

    “......”

    하지만 편지를 정성스럽게 쓰는 지미 로리쿤은 행복해 보였다.

    그가 의심하지 않도록 말을 잘한 문화부 장관의 딸이 대단한 걸까?

    예정된 비극.

    엄밀히 따지면, 지미 로리쿤만 불행하고 세계는 평화로워지는 희극이었다.

    (나르시아?)

    가족이 너무 걱정됐던 아가씨가 총리에게 연락했다.

    “아빠! 무사해요?!”

    (그래. 아직 안심하긴 이르지만, 그 괴물들이 갑자기 안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진짜로... 흑!”

    (아직 공표되진 않았지만, 첫째와 셋째가 놈들에게 살해됐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극이었지...)

    “오빠와 언니가... 아...”

    (놈들이 네 약혼자를 생포하라고 난리였는데, 설명해줄 수 있을까?)

    “천적이에요.”

    (과연... 혼자서 모선을 탈취할 수 있는 남자쯤 되어야 그런 터무니없는 괴물들도 무서워하는군.)

    우주가 무대였던 세계가 빠르게 축소되고 있었다.

    로맨스에 우주가 필요할까?

    전혀! 분위기 좋은 데이트 장소와 맛집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동 시간! 데이트 후에 집으로 가는 길이 고달프면 애정도 식을 수밖에...

    아무튼,

    “순조로운 것 같군요. 희생이 따르긴 했지만.”

    “...괜찮아요. 예전에도 식민지 해방군이란 테러리스트들에게 오빠와 언니를 잃은 적이 있으니까요. 언니의 목숨은 무사했지만, 놈들에게 붙잡혀서 입에 담기 힘든 짓을 당한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어요.”

    “저런...”

    “진짜로 괜찮아요. 아빠만 살아 계시면 복수할 수 있으니까요. 그 식민지 행성은 테러리스트를 옹호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죠.”

    “그렇군요.”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수천만 목숨을 빼앗은 1차 세계대전이 총알 한 발로 시작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

    지금부터가 문제.

    세계가 좁아지면 악마들이 더욱 미쳐 날뛸 것이다.

    ‘불필요한 희생을... 벌써?’

    서걱-

    내가 지키는 가게를 향해 겁도 없이 돌진하는 검귀가 있었다.

    “꺅?!”

    “살려- 악?!”

    가로막는 시민들을 2쌍의 팔로 사정없이 베면서 일직선으로.

    푹!

    하지만 놈은 ‘혈신 만세!’를 외치거나 내가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눈깔 촉수가 모기 잡듯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시끄럽게 됐... 허!”

    하늘에서 검귀들이 낙하산도 없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끼기긱-!

    끼긱-!

    세계가 좁아지면서 갈 곳을 잃은 놈들이 한꺼번에 몰려든 탓이리라.

    “이건... 좀 많군.”

    사람처럼 생각할 줄 아는 악마들만 온 게 아니었다. 협상에 불필요한 검귀들이 엄청나게 많았으니!

    P가 세계의 절대적인 숫자를 줄이면서 자연스럽게 몰려든 것 같다.

    물론, 현재는 세계의 벽에 내가 코팅을 해놔서 추가로 난입하거나 탈출은 불가능한 상태.

    즉, 내가 코팅하기 전에 들어와서 실컷 날뛴 놈들이란 뜻이다. 못해도 수천 명씩은 죽였으리라.

    “봐줄 필요 없지.”

    깜빡!

    놈들이 지상에 내려와서 살육전을 벌이기 전에 처리하리라.

    “쏴! 전부 쏴버려!”

    “어디서 나타난 거야?!”

    “공격...!”

    도시의 방공망과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전부 막아내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웠고 숫자도 많았다.

    그러니,

    “혈신 만세.”

    검귀의 숫자만큼 소환된 칼날이 이 일대의 모든 악(惡)을 정화했다.

    서걱!

    푹!

    끼기긱?!

    무엇이든 자르는 팔을 가진 검귀들은 무엇이든 자르는 팔도 자르는 칼에 의해 일방적으로 도륙.

    단 몇 초 만에 다진 고기가 되어 지상에 떨어졌다.

    후두둑, 후둑, 둑...

    ‘성불해라.’

    나에게 죽은 검귀는 다른 세계에서도 부활할 수 없으니까. 내세(來世)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있다면 사회에 잘 적응했으면 좋겠다.

    “와...”

    내가 ‘혈신 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인 나르시아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쉽죠?”

    “모선도 이렇게 정리했군요?”

    “네.”

    검귀들의 대규모 공습을 ‘혈신 만세!’로 정리. 하지만 지금처럼 도시에 계속 머무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밖으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으로!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털썩.

    “강문수 씨! 제발! 제 소원입니다! 여행을 꼭 가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아닌 지미 로리쿤이 무릎 꿇고 부탁하는 모양새로.

    원리는?

    우리에게 지시받은 문화부 장관의 딸이 지미 로리쿤에게 ‘여행 가고 싶다.’라고 말하면, 지미 로리쿤이 즉시 우리에게 ‘여행 가고 싶다.’라고 부탁하는...

    아주 아름다운 상황이다.

    “좋습니다.”

    “오오!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지정한 안전 지역을 벗어나면 바로 살해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지미 로리쿤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생각해둔 여행지가 있습니까?”

    “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으로 갈 계획입니다!”

    “좋군요.”

    문화부 장관의 딸이 그에게 ‘우리의 계획’을 제대로 전달한 것 같았다.

    “여행! 드디어 쉰다!”

    “언제는 안 쉬었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루도 안 쉬고 일했습니다!”

    하루에 6시간이나 자면서 쉬엄쉬엄 아르바이트했으면서 엄살은.

    어이가 없었지만, 여행으로 들뜬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준비하죠.”

    “네! 여행! 여행~!”

    “......”

    그의 기대처럼 정말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다.

    * * *

    동쪽을 봐도 바다, 서쪽을 봐도 바다, 남쪽을, 북쪽을...

    지미 로리쿤의 인지 범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최고의 데이트 장소!

    우리는 총리의 원거리 지원으로 단 4명만을 위한 호화유람선을 대여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승무원은 인조전사.

    요리, 빨래, 청소, 오락...

    잡다한 업무를 전부 대신해주기에 우리는 데이트에만 집중할 수 있다.

    언제까지?

    지미 로리쿤이 바라보는 세계가 이 배로 축소될 때까지!

    “로리쿤 오빠~!”

    “갈게!”

    아무것도 모르는 영혼은 미녀가 부르자 헤벌쭉 웃으며 졸졸 따라갔다.

    “...순조롭군.”

    “저희의 연애는 진전이 없는데요?”

    나르시아가 복어처럼 뺨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이건 우주의 평화가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참으세요.”

    “제 마음이 안 편한데, 우주의 평화가 무슨 소용이에요?”

    오늘의 그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흠. 어젯밤에 여자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궁금해요?”

    “네.”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미 로리쿤은 ‘여자친구’가 불편하게 헤어진 전 약혼녀를 만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하지만 이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건 본인도 안다.

    단둘이 여행은 불가.

    죽지 않으려면 내가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데, 나만 동행하면 나르시아가 위험해진다. 팔이 잘린 적도 있기에 아니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으니!

    끝으로...

    좁은 배에서 대화할 수 있는 여자가 한 명뿐이다. 좋든 싫든 가까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이것도 좋아.’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르시아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여자친구랑 관계가 틀어질 것을 걱정하는 지미 로리쿤.

    그의 머릿속에 ‘우주’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건 알지만... 네.”

    이게 여자의 감이란 걸까? 목적에 가까워질수록 나르시아는 이후의 약혼식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불안해했다.

    ‘내가 나쁜 인간이지.’

    유부남이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단호하게 그녀를 쳐내지 못했다. 일 때문이란 변명으로 충분할까?

    ...충분할 리 없다.

    “강문수 씨~!”

    지미 로리쿤이 나를 애타게 찾았다.

    “다녀올게요.”

    “네.”

    나는 표정이 매우 불편한 아가씨에게 양해를 구한 후, 안절부절 못하는 사랑의 노예에게 갔다.

    “무슨 일입니까?”

    “어젯밤에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하고, 불안해서 미치겠습니다.”

    “흠.”

    “부탁합니다! 이러다가 진짜로 미칠 것 같아요!”

    털썩!

    이 인간은 나날이 무릎 꿇는 날이 많아지네.

    “연애가 잘 안 풀립니까?”

    “그건 아니지만, 강문수 씨도 남자니 이해하실 겁니다. 여행지에 숙소까지 잡았으면... 해야죠.”

    “저는 연애 시절에 아내가 먼저 하자고 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정말로요?”

    “네. 그 뒤에는 제가 짐승처럼 날마다 보채긴 했지만, 시작만큼은 아내가 했습니다.”

    “아...”

    “진정한 신사는 숙녀가 준비될 때까지 한없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연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깜빡~

    소매 안에서 듣던 눈깔 촉수가 슬그머니 나오더니, 나에게 양심을 묻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봤다.

    ...진정한 신사의 길은 참 어렵다.

    “조바심을 내는 건 이해하지만, 로리쿤 씨의 연애는 걸음마 단계이지 않습니까? 같이 잠은커녕 입맞춤조차 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멀리 여행을 와서 숙소를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중간 단계를 싹 생략하고 짝짓기부터 생각한다고?

    내가 여자였더라도 이 인간은 사절이었을 것 같다.

    “여긴 바다 한복판입니다. 도망갈 곳도 없어요.”

    “아...”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그녀를 기다려주세요.”

    “바다... 그렇죠. 여긴 바다...”

    내가 엘몰랑스 공과대학 졸업생(천재)에게 조언하는 날이 올 줄이야?

    사랑은 똑똑한 사람도 바보로 만드는 것 같다. 그러니 백마 탄 왕자님이 변변찮은 시골 여자에게 구애하는 비이성적인 로맨스가 잘 팔리는 거겠지!

    “오늘은 아프다는 핑계로 좀 쉬세요.”

    “저는 멀쩡합니다. 그녀에게 허약한 남자란 인상은 줄 순 없습니다.”

    “침실의 용도를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생각하지 마세요. 간호도 여자의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아아...”

    “직접 말하면 엄살처럼 모양새가 안 좋으니 제가 대신 멀미가 매우 심하다고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에 들어가서 앓는 시늉이라도 하고 계세요.”

    “네!”

    바보에 더해 발정기란 성가신 속성이 추가된 지미 로리쿤이 떠나갔다.

    “거참.”

    그게 그렇게 좋을까?

    ...그렇게 좋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시기를 봐가면서 해야지.

    깜빡? 깜빡~

    “어흠!”

    나도 올림픽 중에 참지 않고 사정없이 하긴 했었군.

    성가신 속성이 많은 나랑 결혼해준 송선영에게 감사를... 음?

    “왔군.”

    깜빡~

    내 사정권에서 살짝 벗어나 있지만, 이 세계에 침투한 모든 악마와 검귀가 바다 위에 있었다.

    “유언을 들으러 가볼까?”

    깜빡!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확의 시기가 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