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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20화 (221/232)
  • 220화

    내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악마를 잡겠다고 무작정 달려든 게 아니다. 의지만으로 안 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철저한 준비와 검토.

    조상님(가족)의 목숨이 걸린 이번 일은 특히 더 그랬다.

    “점원 오빠, 이거 얼마에요?”

    “잠시만요, 손님.”

    “가격은 됐어요. 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어... 네. 옆구리살만 좀 빼면-”

    “사장님은 어디에 계세요?”

    “네?”

    “사장님이요. 민원 넣을 게 있어서요.”

    “저쪽에...”

    내가 라누벨 환자를 처음부터 보호하지 않고, 스스로 탈출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아르바이트시키는 그 일련의 과정들.

    이 모두가 계획이다.

    “잘하고 있네요. 하지만 손님은 왕이란 사실을 또 잊으셨네요.”

    “강문수 씨!”

    “여왕님의 옆구리살을 지적하다니... 사형감입니다.”

    “이건 저에게 안 맞는 것 같아요! 적성을 살려서 우주선 정비공을...”

    “안 됩니다.”

    “제발요! 우주선 정비라면 잘할 자신 있습니다!”

    “총리의 딸을 누추한 정비실에 온종일 머물게 할 겁니까?”

    “그, 그건... 으으...”

    악마들은 라누벨 환자를 죽이고 세계를 파괴해도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지 않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빠르게 줄어드는 꿈의 세계.

    숙주인 P가 얌전히 당해주지 않음을 깨달은 기생충들은 협상을 질질 끄는 추잡한 짓을 멈추고 이곳으로 몰려왔다.

    ‘그 병신 때문이겠지.’

    협상하라고 보낸 악마가 방심하다가 원주민들에게 붙잡힌 탓이다.

    그래서 협상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보복한 셈인데...

    결과적으로 잘 됐다고 생각한다. 1대1 협상이 진행됐다면 악마들을 이 세계에 모을 수 없었을 테니까.

    “잡담은 여기까지. 어서 일해요. 왕들이 기다리잖아요?”

    “네...”

    내가 처음부터 라누벨 환자를 보호했다면 악마들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이 세계에 침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상과학의 ‘공간도약’이란 기술을 활용해서 멋지게 성공!

    악마들을 잔뜩 끌어들인 후에 환자랑 접촉할 수 있었다.

    (애니족이 휴전에 동의하면서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실종된 나르시아 엘베레스트 영애를 보신 분을 찾습니다. 조심스럽게 사망이 언급되고 있으나...)

    (검귀의 습격으로 누적된 인명피해가 8,000만을 돌파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총리 각하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뉴스에선 휴전 전보다 암울한 이야기가 온종일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참.’

    전쟁이 이래서 무섭다. 한 번 시작된 원한은 대대손손 이어지기에 쉽사리 끝낼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용서’라는 말도 있잖은가?

    내 가족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는 정부와 정치인들을 신뢰하는 국민은 없으리라.

    “큰일이네요.”

    갑갑한 전용기 안에서 생활할 때보다는 한결 나아진 나르시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폐의 끝판왕인 총리에게 퇴진 요구?

    최고 권력자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물러나야 할 만큼 제국의 사정이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지미 로리쿤을 믿으세요.”

    “저 쓰레기를요?”

    “쓰레기가 맞지만, 저 쓰레기가 이 우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저는 강문수 씨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자는 주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무리인 것 같아요.”

    “이해합니다.”

    이 세계는 ‘지미 로리쿤’의 꿈이다. 그리고 그 면적은 주체가 얼마만큼 세계를 인지하고 있느냐로 결정된다.

    예를 들자면?

    영화 세트장은 촬영비 절약을 위해 전체를 만들진 않는다. 드라마와 영화를 찍기 위해 도시를 통째로 설계하거나 꾸미진 않는다는 의미.

    액션영화에 등장하는 영웅들도 마찬가지다. 고작 도시 하나를 지키면서 ‘인류를 지키는 영웅’으로 포장한다.

    이상한 것 같으면서도 아무도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는 건, 사람마다 ‘세계’를 보는 기준이 다른 탓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세계고, 우주인에게는 우주가 세계고, 장사꾼은 가게 주변이 세계...

    내가 노리는 부분이다.

    ‘문제는 그 세계의 범위가 언제쯤 바뀌냐는 건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지미 로리쿤의 적성은 ‘우주선 정비공’이다. 꿈속에서는 우주선 함장이었고.

    보는 눈이 우주까지 확장된 그를 도시 미만의 규모로 쪼그라트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흐음... 좀 더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해볼까.”

    지미 로리쿤은 너무 똑똑했다.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이랑 나누는 대화만 들어 봐도...

    “진짜 멀리서 오셨네요. 발깐 행성은 항상 춥죠?”

    “어? 제 고향별을 아세요? 작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물론입니다. 새하얀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연인이랑 어깨를 맞대고 있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눈이 안 내리는 행성에서 사는 게 꿈이에요.”

    “그러시면 여기서 451광년쯤 떨어진 아뿌니카 행성을 추천합니다.”

    이런 식이다. 아르바이트로 정신없이 몰아붙여도, 한 번 확장된 시야와 지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바보가 될 때까지 머리를 때려?

    진지하게 고민했다.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마음껏 돌아다니진 못하지만, 배달이란 훌륭한 서비스를 활용해서 문화생활을 만끽 중인 나르시아.

    그녀가 속옷 차림으로 사장실 소파에 누운 채 하녀 1호의 마사지를 받으며 나에게 질문했다.

    “...있습니다.”

    “뭔데요? 한 번 이야기해봐요. 저는 지미 로리쿤에게 아르바이트시키는 이유도 모르겠어요.”

    “......”

    “강문수 씨, 저를 한 번 믿어봐요.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사람보다 계산이 빠른 인공지능도 있고.”

    그녀의 말이 옳다. 나 혼자서 전부 끌어안을 필요는 없다.

    ‘맞아.’

    나는 늘 선배에게 의지해왔다. 인제 와서 누군가의 도움과 조건을 안 받는다는 건 우습지 않은가?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했다.

    “악마들은 지미 로리쿤이 만들어낸 악몽이랑 비슷합니다.”

    “설마, 그 쓰레기가 검귀를 만들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악몽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듯이...”

    “만들 수 있습니다.”

    눈치 없는 인공지능이 내 설명을 단칼에 부정했다.

    “...결론만 짧게 설명하면, 지미 로리쿤이 아주 작은 일에 몰두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게 아르바이트?”

    “우주를 활보하는 함장보다는 훨씬 작은 일이죠.”

    마사지를 받는 나르시아가 파릇나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그 쓰레기를 보호하는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네요.”

    “그렇습니까.”

    “그가 죽으면 어떻게 돼요? 검귀도 악몽처럼 사라지나요?”

    “아니요. 그때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껏 날뛸 겁니다.”

    “지금보다 더 날뛴다고요?”

    “네. 지금은 제가 그를 보호하고 있어서 그나마 얌전한 겁니다.”

    “음... 질문해도 돼요?”

    “네. 하십시오.”

    “쓰레기가 작은 일에 몰두하면 뭐가 달라져요?”

    예리한 질문이군.

    “좋은 질문입니다. 지미 로리쿤이 작은 일에 몰두할수록 악마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도 축소됩니다.”

    “왜요?”

    “원리는 저도 모릅니다. 현상의 결과만 알 뿐이죠.”

    “또 거짓말.”

    “.......”

    현실로 돌아가면 연기 학원부터 다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해했어요. 지미 로리쿤이 작은 일에 몰두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악마들이 새장 속에 갇힌 독수리 신세가 된다는 거죠?”

    “정확합니다.”

    “좁은 새장에 갇혀서 도망치지 못하게 된 독수리들을 강문수 사냥꾼이 때려잡을 거고요.”

    “설명이 더 필요 없겠네요.”

    짝짝!

    감탄의 박수가 절로 나왔다.

    “아르바이트는 오래 걸릴 거예요. 저 쓰레기는 일이 힘들수록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것 같거든요.”

    “아...”

    그건 생각 못 했네?

    “이 일, 저를 믿고 맡겨주실 수 있을까요? 이대로 시간이 지체되면 아빠가 위험해질 것 같거든요.”

    아빠를 걱정하는 딸치고는 너무 파릇나릇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가족을 직접 구하고 싶다는 그녀의 청을 무시할 명분이 없었다.

    “후후! 들었지? 좀 도와줘.”

    “네, 아가씨.”

    나르시아가 음흉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하녀 1호에게 지시를 내렸다.

    * * *

    매우 폭력적인 나는 지미 로리쿤의 뇌세포를 파괴해서 바보로 만들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나르시아 엘베레스트의 방식은 확실히 달랐다.

    “점원 오빠, 이거 얼마에요?”

    “잠시만요, 손님.”

    “가격은 됐어요. 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손님은 뭘 입어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옷을 파는 점원으로선 잘 쳐줘도 100점 만점 중에 20점.

    하지만 지미 로리쿤이 손님의 미모에 홀딱 넘어간 건 확실해 보였다.

    “점원 오빠를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 같아요.”

    “자, 잘못 보셨습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제 취향의 남자 얼굴은 오래 기억해요.”

    “아...”

    처음으로 자기를 알아본 손님을 발견한 지미 로리쿤이 감동했다.

    그는 제국의 ‘전쟁 영웅’이지만, 전쟁이 늘어지면서 만성이 된 민중들은 그 결과에만 관심 있게 변했는데...

    즉, 민간인은 ‘지미 로리쿤’의 얼굴을 코앞에서 봐도 ‘제법 잘생긴 점원’이란 감상 외에는 받지 못했다.

    그런데 진짜 최초로 그를 알아보는 손님이 등장했다. 심지어 굉장한 미녀! 이게 중요하다.

    “모선 1기로 애니족 모선 2기를 반파한 전설적인 명장, 지미 로리쿤, 맞죠?”

    “흠흠! 명장까지야... 흠흠!”

    “겸손하실 필요 없어요. 정말 굉장한 업적이니까요.”

    “그렇죠? 하하하!”

    그동안 칭찬에 굶주렸던 걸까? 대화 몇 마디에 의심 없이 홀라당 넘어갈 줄은 몰랐다.

    가게의 다른 손님이 불러도 대답조차 못 할 만큼!

    “...저 처자는 누굽니까?”

    “문화부 장관의 늦둥이요. 저랑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게 인연이 돼서 어릴 적부터 친구였어요.”

    “아하!”

    “제가 도와달라고 하자마자 283광년을 날아와 줬어요.”

    “감동적이네요.”

    나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283광년을 날아갈 자신이 없다.

    “그녀에게는 복수하고 싶다는 정도로만 설명해뒀어요. 그러니 보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잘하셨습니다.”

    “다 끝난 후에 저 쓰레기를 시원하게 차버릴 거예요.”

    “...훌륭한 계획이네요.”

    같은 남자로서 약간의 연민이 들긴 하지만, 자초한 업보였기에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기로 했다.

    드라마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면?

    친구의 복수를 돕기 위해 283광년을 날아온 저 처자가 지미 로리쿤에게 진심으로 연애 감정을 품는 것이다.

    ‘하지만 확실하긴 하겠네.’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시야가 얼마나 좁아지는지는 내가 경험자라서 잘 안다.

    우정? 세계 평화? 출세?

    그 여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다 필요 없다.

    “어머! 지금, 이쪽으로 온대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지미 로리쿤은 바보가 아니다. 우리가 만난 사실을 알게 되면 눈치챌 터.

    그러나 이쪽이 한 수 위였다.

    “쓰레기가 사장실에 못 들어오게 감시해줘. 또 민원이 들어왔으니 열심히 일하라고.”

    “네. 아가씨.”

    나르시아의 명령을 받은 하녀 2호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사장실을 나섰다.

    딸각-

    그리고 동시에 문화부 장관의 딸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르시아~!”

    “오랜만이야.”

    “실종된 애의 통화를 받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그런데 마사지 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었네!”

    “설명하자면 길어. 수다는 나중에. 이쪽은 내가 입술이 닳도록 설명했던 약혼자인 강문수 씨야.”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일을 돕기 위해 283광년을 날아온 처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정중히 인사했다.

    “아...”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넋을 살짝 놔버렸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뇨. 나르시아는 평범한 얼굴이라고 했는데, 진짜 미남이시네요.”

    “제가요?”

    그건 송선영도 하지 않는 말이었다.

    “제가 남자 보는 눈이 좀 유별나거든요. 잘못 접근하면 죽을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의 남자를 좋아해요. 지금도 등골이 오싹한 게 짜릿해서 좋네요.”

    “......”

    욕 같은 칭찬인가? 칭찬 같은 욕인가?

    매우 헷갈렸다.

    “너, 복수를 도와달라고 불렀더니 이상한 생각을 하네?”

    나르시아가 경계의 눈빛으로 친구를 살포시 노려봤다.

    “손만 잡을게.”

    “안 돼! 절대로!”

    “돈도 많은 애가 깐깐하게.”

    “세상에는 돈으로 안 되는 일도 있어!”

    “친구끼리 나눠 쓰자.”

    “남자는 못 나눠...!”

    283광년을 날아온 친구 때문에 혼돈의 도가니가 됐다.

    “흠.”

    다른 건 몰라도, 지미 로리쿤에게 꿈과 희망이 없는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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