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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19화 (220/232)
  • 219화

    “강문수 씨... 이러다가 다 죽어요...”

    “사람이 같은 음식만 먹는다고 죽진 않습니다.”

    “잠깐일 때의 얘기죠! 우리가 벌써 며칠째 보존식만 먹은 줄 아세요?!”

    절단된 어깨를 완벽히 회복한 나르시아가 건강한 비명을 질렀다.

    폐쇄 공포증? 공황 장애?

    그녀에게 어떤 병명을 붙여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멀쩡했던 정신에 이상이 생긴 건 확실했다.

    “나르시아. 조금만 힘내세요. 목적지까지 이젠 얼마 안 남았으니...”

    “짐승은 빠져!”

    “......”

    감옥 생활에 익숙해진 라누벨 환자는 호화로운 전용기 생활에 매우 만족하는 것 같았다.

    물론, 하녀 2호는 그의 편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불편할 순 있다. 그러나 그는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인간이 됐다.

    ‘허! 기가 막히네.’

    모두가 선망하는 ‘우주선 정비공’이 됐음에도 만족할 줄 몰랐던 지미 로리쿤.

    그랬던 그가 작은 것에도 행복할 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났다!

    “로리쿤 씨, 보기 좋네요.”

    “약혼녀에게 무조건 욕먹는 모습이요?”

    “그거 말고. 뛰어난 적성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르던 당신이 보존식에도 웃을 수 있게 돼서요.”

    “하, 하... 그러게요. 그때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지미 로리쿤이 지나간 현실을 회상하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괜찮습니까?”

    “제 부모님은 결혼할 때부터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P의 적성검사에서 우주선 정비공이 나온 날, 얼싸안으며 기뻐하셨죠. 배우신 분들은 아니었지만, 우주랑 관련된 적성은 돈을 잘 번다는 걸 아셨으니까요.”

    “흠.”

    덕분에 그의 부모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매우 잘 지내고 있다.

    시골이긴 해도 건물주라니!

    적성에 귀천이 없다지만, 우주랑 관련된 적성은 ‘무당’ 못지않은 반칙이다. 돈을 쓸어 담으니까.

    “친구들도 절 부러워하고 축하해줬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 엘몰랑스 공과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문제없었죠...”

    “거기도 우주과학단지처럼 천재만 있는데, 뭐가 다릅니까?”

    라누벨라 13세가 나에게 보내준 자료에 따르면, 라누벨 환자 ‘지미 로리쿤’이 꿈에 빠져든 원인은 상대적 박탈감.

    천재인 줄 알았고, 천재가 맞지만, 천재들만 모아놓은 장소에서 평범해진 자신을 견디지 못했다...

    대충 이런 것이다.

    “신(神)처럼 전부 아시는 건 아니군요.”

    “사람이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엘몰랑스 공과대학과 신성로마제국 우주과학단지. 둘의 차이는 여자입니다.”

    “아아.”

    여자 문제!

    같은 남자로서 이해하고 말았다.

    “대학에도 예쁘고 성격 좋은 여자애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에는 과외 아르바이트하고, 낮에는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공부하느라 연애를 생각할 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졸업 후에 달라졌군요?”

    “네. 취업하고 살만해지면서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직장과 주거지에는 ‘우주선 정비공’을 평범한 인간으로 보는 여자들만 살고 있었으리라.

    “뜻대로 안 됐군요.”

    “네. 제 눈이 너무 높았다면 억울하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주에 외모는 필요 없잖아요? 예쁜 여자 곁에는 이미 남자가 다 있었기에 저는 다 포기하고 정말 평범한 여자만...”

    “이웃집에 살던 2살 연하의 대학 후배가 평범한 외모는 아니죠.”

    “헉!”

    억울한 비운의 주인공 흉내를 내던 지미 로리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보고서에는 그가 그녀를 짝사랑했다는 내용은 없었지만, 만나면 인사하는 정도의 이웃들 신상정보가 있었으니까.

    그때는 왜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과중한 업무로 휴업 중인 라누벨라의 경험이 묻어난 결정이었다.

    “사진도 있습니다.”

    슥-

    보고서에서 보았던 이웃의 얼굴 사진을 즉석에서 만든 후에 호주머니 안에서 꺼내 보여줬다.

    “마,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제가 P는 아니지만, P의 대리자 정도는 됩니다.”

    “P가 실존합니까?”

    “신성로마제국에서 태어난 분답지 않은 질문이네요.”

    “P를 전혀 모르는 외계인들을 계속 보면, 투철했던 신앙심도 사그라들기 마련입니다. P가 해준 일은 적성검사기, 그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

    “여기가 신성로마제국이었다면 진짜 큰일 날 발언이지만, 한 세대를 앞선 뛰어난 과학자를 신(神)으로 숭배하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흠...”

    내 조상님을 모독하는 이 새끼의 면상을 짓뭉개고 싶지만, 그가 현실에서 눈을 떴을 때를 상상하며 놔두기로 했다.

    한 세대를 앞선 과학 기술?

    고작 그 정도라면, 구시대의 모든 종교가 쇠퇴한 현대 사회에서 P를 신(神)으로 숭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신론자인 당신의 해답은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P를 볼 기회가 생깁니까?”

    “비밀입니다.”

    “......”

    “그래도 조금만 알려주자면, 보이는 것만 믿는 당신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벌써 궁금해지네요.”

    결론은?

    짝사랑하는 이웃집 아가씨의 마음을 얻지 못해서 꿈속으로 도주!

    처음에 사귄 여자랑 결혼한 내가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는 조언을 한다는 건 우습고, 우주과학단지를 나오라는 정도로만 진단하면 될 것 같았다.

    “남자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그리 오래 해요?”

    내가 자기보다 불륜남이랑 더 오래 대화한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던 나르시아가 툴툴댔다.

    “지미 로리쿤이 내연녀를 두게 된 원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원인이요? 쓰레기가 쓰레기 짓을 한 거잖아요?”

    “그래서 분리수거 중이었습니다.”

    “시간 낭비에요. 여기가 아무리 한가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아가씨는 ‘내연녀’의 이야기만 나오면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제국 최고의 여자라고 자부하는 ‘나르시아 엘베레스트’가 변변찮은 비행기 조종사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걸까?

    그녀를 이해한다. 나도 송선영이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 ‘그 남자를 찾아가서 죽이라는 건가?’라는 생각부터 하기 때문이다.

    “강문수 님. 목적지까지 24시간 남았습니다.”

    “오! 정말로 거의 다 왔네!”

    지루한 우주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 * *

    공간도약을 사용하면 뇌진탕으로 내가 기절해서 쓸 수 없다.

    그래서 공간도약 같은 공상과학 요소 없이 순수하게 추진기를 활용해서 광년 단위로 떨어진 행성까지 이동...

    편의점 심야 아르바이트로 ‘지루한 시간 보내기’에 숙련되지 않았다면 나도 나르시아처럼 이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와아! 와아아!”

    행성에 발을 내딛자마자 그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탄성을 연발했다.

    “이제 좀 살겠네요.”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한 지미 로리쿤도 미소 지었다.

    “짐을 챙기십시오.”

    “무슨 짐이요?”

    기뻐하던 나르시아가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깝지만, 전용기는 포기합니다. 저랑 떨어지는 순간, 악마가 이걸 가만 놔둘 리 없으니까요.”

    “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놈들이랑 결판을 낼 겁니다.”

    “어떻게요? 불리해지면 우주 끝까지 달아나는 비겁자들을 상대로.”

    비겁자.

    총리인 아버지가 협박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르시아는 악마를 ‘비겁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날개.

    그건 다시 말해, 어디에 숨든 찾아가서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영업 비밀입니다.”

    “......”

    “하지만 일이 잘 풀리면 총리 각하도 무사할 겁니다.”

    “정말요?! 구하러 가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부터는 보안이 생명입니다. 놈들이 눈치채면 총리 각하의 목숨도 없습니다.”

    “...네.”

    비밀이 새면 죽는다는 말에 수긍하는 나르시아.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강문수 님. 짐을 전부 챙겼습니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최소한의 짐을 우리 대신 챙긴 하녀 2호가 담담한 어조로 출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면 갑시다.”

    “네.”

    “네에.”

    우리는 당당히 비행장을 가로질러서 시내로 들어갔다.

    “강문수 씨.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어째서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죠?”

    “그게 이상합니까?”

    나르시아의 당연한 질문에 이상하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네. 우리를 찾고 있어야 맞잖아요. 그리고 제국의 정보망이면 벌써 찾아도 이상하지 않은데.”

    “악마가 난동을 부리면서 정보망에 이상이 생긴 모양입니다.”

    이건 순전히 내 최면술 때문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 위기네요. 애니족이 침공해도 모를 만큼 정보망이 뚫렸다는 소리니...”

    총리의 딸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이 상황에서도 전쟁을 걱정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때는 제가 진심으로 움직일 겁니다.”

    “진심이요?”

    “네. 진심.”

    소행성 크기의 ‘모선’은 혈신의 위대함을 품기에는 너무 작았다.

    쾅! 콰광~!

    우리가 공항을 빠져나갈 때쯤에 비행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신호가 끊겼습니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하녀 2호가 전용기의 사망을 담담히 알렸다.

    “진짜로 파괴됐네요...”

    “놈들도 진심이니까요.”

    광활한 꿈의 세계를 창조한 신(神)을 협박한 놈들이다. 진심이 아니기가 훨씬 힘들지 않을까?

    상대는 봉급을 인상해달라는 노동자 단체가 아닌 테러리스트!

    그렇기에 본인들도 이 협박이 실패하면 몰살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쪽입니다.”

    하녀 2호의 안내로, 공항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택시를 이용. 공항에서 조금 떨어진 인조전사 판매점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놈들이 얌전했느냐?

    절대 아니다.

    ‘어쭈? 잘 피하네!’

    엿가락처럼 길게 뻗을 수 있는 영역으로 놈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날개만 봉인하면 처리는 쉬우니까.

    펄럭~

    하지만 우리를 감시하는 악마가 쉽사리 붙잡혀주지 않았다.

    무의미한 술래잡기.

    그렇다고 이걸 안 할 순 없다. 감시자 녀석에게 우리를 관찰하고 도청할 여유와 시간을 주면 안 되기에.

    딸랑~♪

    “어서 오십시- 헉! 아가씨?!”

    안드로이드를 판매하는 가게의 주인장이 나르시아를 보자마자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한 기가 파괴돼서요. 여분의 인조전사가 있나요?”

    “납치되셨다고... 죄,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짝 긴장한 주인장은 그녀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인조전사는 군용(軍用).

    민간기업이나 민간인에게 팔아도 되는 평범한 안드로이드가 아니다. 그녀가 총리의 딸이라서 예외로 뒀을 뿐.

    “그래서 없다는 건가요?”

    “네. 저 같은 민간인이 인조전사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기에...”

    주인장이 무척 송구하다는 듯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답했다.

    “인조전사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게를 둘러본 후에 넌지시 질문하자 다르게 대답했다.

    “뭐가 맞는 거예요?”

    “헉!”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요.”

    이상함을 눈치챈 나르시아가 쌍심지를 켜며 주인장에게 따졌다.

    “으으...”

    “솔직하게 말하십시오.”

    질질 끄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나는 최면술을 활용했다.

    “...있습니다. 아가씨의 이름으로 3기를 주문해서 1기가 남았습니다.”

    “당신, 조용해지면 1기를 민간에 팔려고 했군요.”

    “살려주십시오...!”

    넙죽!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주인장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애원했다.

    민간에 인조전사 판매는 불법.

    하지만 암거래는 어디에나 성행하고, 나르시아가 주문한 ‘하녀’는 특제품이기에 그 상징성과 희소성 또한 남다르다. 팔 수만 있다면 몇 배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으리라.

    팔 수만 있다면.

    “총살당하기 싫으면 당장 내놔요.”

    “네네!”

    우리는 주인장이 꿍쳐둔 인조전사에 ‘하녀 1호’의 기록을 이식.

    “...다시 모실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강문수 님.”

    부활한 하녀 1호가 전혀 기쁘지 않은 표정과 말투로 인사했다.

    “나도 기뻐.”

    이걸로 안전 확보 완료!

    하녀 1호와 2호가 힘을 합친다면 내가 자리를 비워도 1초쯤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할 일은?

    “로리쿤 씨.”

    “네.”

    “과외 말고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봤습니까?”

    “어... 그건 왜요?”

    “이 세계를 구하려면 당신의 시야가 좁아져야 합니다.”

    “예?”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오늘부터 ‘우주’를 잊고 ‘도시’에서 정신없이 일만 하면 된다.

    “모르면 제가 가르쳐주겠습니다.”

    내가 학벌에선 그에게 한참 밀려도 이 분야만큼은 대선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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