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12장-4절] 출구는 없다
검귀들은 P라는 신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세상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할 줄은 알아도,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
모든 것은 P의 의지.
현실에서는 라누벨 환자들이 무더기로 사망하고, P의 적성검사기는 점검이란 명분으로 1년 동안 사용이 중단되면서 대혼란에 빠졌다.
‘이게 가족인가...’
P는 산송장 같은 삶을 살면서도 적성검사기의 가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인류애와 고집이 완고하신 분.
하지만 철부지 후손을 위해 그 고집을 꺾고 도와주셨다.
그 결과,
(검귀입니다! 어? 사라졌- 으악?!)
(지원 요청! 지원 요- 꺅?!)
(동력부가 파괴됐다! 함선을 버리-)
콰광! 쾅! 번쩍! 화륵~!
갈 곳 잃은 악마들이 ‘지미 로리쿤’의 공상과학 세계에 몰려들었는데, 놈들은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유?
놀이터에서 노는 개구쟁이들이 붙잡은 곤충의 다리를 뽑는 것에 뚜렷한 이유가 있던가?
그래도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놈들은 공포에 빠진 약자가 울부짖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강문수 씨! 이게 대체...!”
제국의 모든 식민지 행성에는 신(神)처럼 군림한 함대가 있다.
행성에 반란군이 발견되면 우주에서 폭격해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
그래서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은 1%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용도의 함대가...
(아악?!)
(괴물이다! 악?!)
(사, 살려-)
악마들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동물원에 갇힌 녀석은 방심하다가 인조전사의 예측 사격에 당했지만, 진지한 악마들은 달랐다.
날갯짓 한 번으로 함선의 심장인 동력부로 이동해서 파괴, 곧바로 다시 날갯짓으로 탈출...
이 작업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모선, 함선, 전함 할 것 없이 1초 안에 전부 파괴됐다.
“저게 악마입니다.”
놈들이 공상과학의 세계관을 선택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세계관의 규모와 원주민의 강함에 비해서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날개’에 너무 취약했으니까. 저 날개를 봉인하지 않는 이상, 공상과학의 산물이 놈들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제국이 자랑하는 함대가...”
충격을 심하게 받은 나르시아가 현기증을 호소하듯 비틀거렸다.
“아가씨.”
“아가씨!”
전용기의 인조전사들이 잽싸게 이동해서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 부축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놈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제 주위는 안전합니다.”
팟-
우리의 전용기를 따라다니는 호위함을 파괴한 악마가 폭발을 감상하듯 근처에서 얼쩡거렸다.
“하하핫- 어?!”
“안녕?”
서걱-
폭발하는 공상과학의 산물을 예술품처럼 감상하는 악마에게 한걸음에 접근해서 발렌타인으로 양분해줬다.
방어 불가.
회피 불가.
나의 영역에 들어온 악마는 맨손의 일반인만큼이나 무력했다.
팟-
나는 놈을 잽싸게 죽이고 다시 전용기로 귀환했다.
“아아아악~?!”
“아가씨. 참으십시오. 괜찮습니다. 목숨은 지장이 없습니다.”
“팔, 팔이...!”
“잘린 팔은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십시오.”
“아파! 아파~?!”
그 잠깐 사이에 전용기 내부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인조전사 한 기가 깔끔히 절단되어 파괴되고, 다른 한 기는 왼팔을 잃은 나르시아를 진정시키는 중.
내가 빠진 틈에 악마가 이곳에 침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얍삽하군.”
인조전사의 냉철한 판단력과 터무니없는 반응속도가 아니었다면 나르시아는 팔이 아닌 목이 잘렸으리라.
“강문수 님.”
“병원으로 이동해. 병원에서 오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
“네.”
인조전사가 전용기를 원격으로 조종해서 강문수메다 행성의 가장 큰 병원으로 이동했다.
“아가씨가 다치셨다!”
“어서! 어서 서둘러!”
“오! 맙소사! 신이시여...”
연락받고 대기 중이던 병원의 관계자들이 나르시아를 중환자실로 데려갔다.
나는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치료받는 것을...
철컥!
철칵!
수많은 총구가 나를 겨눴다.
“...이건 무슨 뜻이지?”
“강문수 씨. 당신을 붙잡으라는 총리 각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흥분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제법이잖아.”
내가 악마의 머리 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놈들은 이 세계의 권력구조를 이해한 후에 나를 초대한 거였다.
상식적으로 그게 맞지.
공평하게 모르는 장소를 약속 장소로 잡을 이유가 없다.
‘총리가 협박에 굴복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악마는 자신들보다 공상과학의 원주민들이 나에게 위협적이라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죽이라는 명령이 아닌 건, 협상할 의지가 있다는 뜻이고.
다만, 내 팔다리가 멀쩡히 붙은 상태에서 협상하고 싶은 것 같진 않았다.
“싫다면?”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어?”
푹!
아무리 명령이었다고 해도, 내 목숨을 노린 자들을 살려둘 만큼 나는 이해심 넘치는 인간이 아니다.
“쏴!”
“쏴라!”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자들이 붙잡으라는 명령을 어기고 마구잡이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안타깝지만.’
나를 노리면 죽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해줘야 귀찮은 상황을 최대한 피할 수 있다.
팟- 푹! 서걱!
한걸음에 모든 총알과 포위망을 뚫고 깔끔히 몰살. 예측 사격을 할 수 있는 인조전사가 아닌 이상, 나에게 위협을 줄 수 없다.
“...불리하네.”
전투력의 문제가 아니다.
기동력!
세계의 면적이 지구 정도라면 어디든지 10초 안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여긴 배경이 우주.
수십, 수백 광년을 아무렇지 않게 이동하는 세계관이다.
내가 공상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 1광년을 이동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못해도 수개월은 소요되리라.
반면에 악마는 날갯짓 한 번.
전투력은 내가 압도적이지만, 기동력에서 놈들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잡아야 죽이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그 기동력을 극복하기 위해 제국이랑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거고.
하지만 총리가 협박에 굴복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저기 있다!”
“잡아!”
도리어 나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일단은 이 병원에서 빠져나간 후에 하나씩 풀어가기로 했다.
팟-
전용기까지 한걸음에 이동.
그 안에서 대기 중이던 인조전사, 하녀 2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오셨습니까.”
2호는 부서진 동료 1호기의 잔해를 정리하고 있었다.
“너는 아무런 명령도 못 받았나?”
“병원의 소란은 도청으로 이미 확인했습니다.”
“이륙해.”
“아가씨는 놔두고 가시는 겁니까?”
“수술 중이잖아.”
“수술이라면 이미 끝났습니다. 혈관부터 신경 하나까지 거의 무사할 만큼 절단면이 깔끔한 덕분입니다. 당장은 움직일 수 없지만, 꾸준히 재활치료를-”
“설명은 거기까지. 이륙 준비해.”
“네.”
나는 한걸음에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간 후,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있는 나르시아를 찾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곤히 잠든 그녀 주위를 간호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실례할게.”
“꺅?!”
“침입자?!”
허공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간호사들.
나는 그녀들을 깔끔히 무시하고 침대로 걸어갔다.
“......”
“...미안. 휘말리게 했네.”
붙인 팔을 신경 쓰면서 양팔로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휙.
나의 세계에 포함되지 않는 그녀를 안은 채로는 이동이 안 된다.
“부탁할게.”
깜빡!
그래서 내 오른팔에 감겨 있는 눈깔 촉수에게 호위를 부탁했다.
“저기 있다! 잡아!”
“아가씨가 납치됐다!”
“미쳤어?! 총을 내려!”
발렌타인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려면 무조건 ‘혈신 만세!’를 써야 하지만, 이 정도는 SSS급 괴물의 기초체력만으로도 충분하다.
휘릭~!
끝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촉수가 뻗어나가서 장애물들을 처리했다.
“아악?!”
“악?!”
눈깔 촉수 괴물이 사람의 목숨을 아껴줄 리 없잖은가?
보이는 족족 죽였다.
...솔직히 나보다 잘 싸운다.
“벽을 뚫어.”
깜빡!
내가 전용기로 탈출할 것을 눈치챈 병사들보다 먼저 비행장에 도착하려면 지름길을 만들어야 했다.
서걱- 콰르르!
칼날 촉수에 병원의 단단한 벽이 두부처럼 썰리고, 그 구멍을 통해서 병원 밖으로 나온 나는 수직의 외벽을 평지처럼 밟으며 이동했다.
“아으으...”
가벼운 흔들림조차 고통스러운 나르시아가 잠든 채로 신음을 흘렸다.
“조금만 참으세요.”
달리기에 방해되는 공기저항까지 지우며 최대한 빨리 전용기로 이동했다.
“오셨습니까.”
이륙 준비를 마친 하녀 2호가 나르시아를 넘겨받으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이제 불만 없지? 가자.”
“네.”
위이잉~
총리의 딸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제국군은 대공포로 전용기를 격추하지 않고 얌전히 보내줬다.
하녀 2호의 판단이 옳았던 셈!
지금부터가 문제다.
“2호. 사람보다 100배 이상 빠른 네 생각을 말해봐.”
멍청한 내 머리는 잠시 내려두고 인공지능의 의견을 들어보자!
“1호를 수리해야 합니다.”
“동료라서?”
“아가씨가 원치 않으셔서 감정 프로그램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료애는 없습니다.”
“그래?”
인공지능이라서 냉철한 줄 알았는데, 아예 감정이 없었군?
“같은 습격을 받으면 저 혼자서는 대처할 수 없습니다.”
“아아.”
그런 이유라면 ‘하녀 1호’를 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인조전사 생산공장은 극비에 해당해서 모르지만, 판매처는 아가씨가 저희를 구매한 장소라서 알고 있습니다. 거기라면 같은 모델이 있을 겁니다.”
“훔치자는 소리군?”
“......”
범죄를 저지를 수 없도록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하녀 2호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여기서 가까워?”
“대략 38광년 거리에 있습니다.”
“흠...”
너무 멀었다.
공간도약을 쓰면 순식간이지만, 거리에 비례해서 내가 기절하는 시간도 길어진다는 걸 고려하면 너무 위험했다.
바로 그때,
번쩍-!
“우아아앗~?!”
칠칠치 못한 남자의 비명이 전용기 후미에서 들려 왔다.
“...잊고 있었네.”
양손에 칼을 든(?) 악마가 찾아오면 고민하지 말고 작동하라는 내 경고를 무시하지 않은 모양이다.
“강문수 님. 지미 로리쿤의 탑승을 확인했습니다.”
“몸이 분리되지 않아서 다행이네.”
악마가 눈치챘다면 공간도약 직전에 몸이 절단됐을 것이다.
“어서 와.”
“가, 강문수 씨?! 그 괴물은 대체...!”
죄수복 차림의 라누벨 환자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건 알겠는데, 일단은 급한 용무부터 끝내도 될까?”
“아! 네!”
“가만히 있어.”
“예?”
덥석!
지미 로리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좋아.”
“저기... 제 머리에 뭘 하신 건가요?”
“코팅.”
“네?”
“악마들이 이 세계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벽에 코팅했어.”
미리 설치하면 좋을 것 같지만, 그러면 코팅에 막혀서 이 꿈의 세계에 들어오질 못해서 안 된다.
“코팅이란 게 대체...?”
“로리쿤 씨. 전부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살 궁리만 하세요.”
“네...”
“당신이나 내가 죽기 전까지 코팅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악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을 노릴 거야.”
“네에?!”
“나보다는 당신이 훨씬 만만하잖아? 죽이기에는.”
“헉!”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길 따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