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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16화 (217/232)
  • 216화

    슈슈슈!

    적의 숫자만큼 늘어나는 발렌타인의 칼날이 모선 곳곳에 스며들며 깔끔히 몰살시켰다.

    이전보다 깔끔하게.

    눈깔이 공상과학을 학습하면서 인지의 부조화가 사라진 덕분이다.

    “생체 반응 소실...”

    “방어 체계 무력화 확인...”

    “임무 완료...”

    나를 지원하라는 임무를 받은 인조전사들이 무기를 쥔 팔을 내리며 경계를 해제했다.

    인공지능답게 불필요한 ‘감정 표현’은 없었지만, 빠릿빠릿하지 못한 움직임이 혼란에 빠졌음을 대변해줬다.

    “잘했어.”

    깜빡~

    몰살은 늘 똑같지만, 불필요한 시설물 파손이 확연히 줄어든 게 보였다. 반면에 모선의 방어 체계는 침입자 탐지기까지 깔끔히 파괴...

    단 한 번의 경험으로 ‘혈신 만세!’의 효율이 쭉 상승했다!

    “뒷정리를 부탁합니다.”

    이번에는 모선 사령부를 찾아가서 죽은 애니족 사령관을 조종하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능력을 보여주면 ‘견제’라는 성가신 일에 휘말릴 테니까. 방금 보여준 한 방만으로도 두려워하기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인조전사들은 모선의 중앙시스템에 침투해서 해킹을 시도, 처음에는 방어를 잘하던 모선의 인공지능도 비겁한 수단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톡.

    인공지능의 호흡이나 다름없는 전원을 끊어 버렸네? 보통은 해킹보다 힘든 일이지만, 모든 방어 체계가 무력화된 까닭에 손쉽게 차단했다.

    (시스템... 방어... 백신...)

    “수고했습니다.”

    “수고했다.”

    (...수고.)

    인간과 애니족의 전쟁에 도구로 이용되는 인공지능 사이에 악의(惡意)가 있을 리 없잖은가?

    인조전사들은 모든 기계장치의 동맥이나 다름없는 전선을 뽑으면서 모선 인공지능의 명복을 빌어줬다.

    그리고는,

    (시스템의 복구를 완료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강문수 사령관님.)

    “오!”

    애니족 모선의 인공지능에 새로운 인격을 심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애니족 잔당을 매복 지점으로 유도하고자 합니다. 사령관님께 허가를 요청합니다.)

    “좋아!”

    인공지능이 스스로 작전까지? 기가 막힌 세상이다.

    나에게 경영까지 떠넘기고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를 즐기던 편의점 사장님이 된 기분!

    너무 편했다.

    쾅! 퍼엉! 펑! 번쩍~!

    터무니없는 명령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른 애니족 전투기와 전함들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모선을 빼앗길 위기라는 경고조차 못 보내고 빼앗길 줄.

    사령관과 인공지능의 판단을 신뢰하는 애니족 장병들은 매복에 걸려서 우주의 먼지로 사라졌다.

    (병력 손실 48%...)

    (병력 손실 76%...)

    (병력 손실 81%...)

    (퇴각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병력 손실 99%...)

    공상과학은 총알의 속도만큼 전쟁의 승패도 순식간에 결정됐다.

    모선의 절대적인 명령을 받고, 우르르 몰려간 장소에 행성 파괴 수준의 폭탄이 팡팡 터졌네?

    전멸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놀랍구먼.”

    (선체의 손상률은 28.4%입니다. 정비를 권고합니다.)

    “움직일 순 있나?”

    (파손으로 공간도약은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 외에는 된다는 거지?”

    (네. 가능합니다.)

    “인류의 진영으로 이동해.”

    (이동을 개시합니다.)

    쿠구구구-

    방금까지 아군이었던 애니족 함선들을 지옥으로 보낸 모선이 인류의 진영으로 이동하며 승전을 알렸다.

    * * *

    “굉장해요...”

    “허허!”

    나 대신 일하는 ‘지원팀’ 인조전사의 보고를 들은 나르시아와 사령관은 감탄과 헛웃음을 연발했다.

    완벽한 승리!

    나에게는 별거 아니지만, 꿈의 세계 원주민들에게는 기적으로 보인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다.

    “그 생물의 힘인가요?”

    깜빡? 깜빡~

    나르시아는 내 오른팔에 감겨 있는 눈깔 촉수를 관찰하며 질문했다.

    “영업 비밀입니다.”

    “칫.”

    명백한 거절 의사에 불쾌감과 불만을 드러낼 법도 한데,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애교 섞인 투정으로 어영부영 넘겼다.

    총리의 딸?

    여기에 여자의 무기인 출중한 외모까지 곁들어져서 콧대가 우주까지 닿은 건 사실이지만, 이 전란의 시대에는 싸움 잘하는 정신병자가 최고다.

    모선 2대와 총리의 어여쁜 여식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총리가 가정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딸을 고르겠지만, 대부분은 모선을 선택할 것이다.

    미녀? 재산? 명예?

    모선 2대면 수많은 행성을 보이는 족족 점령하고, 식민지 출신의 절세가인으로 꾸려진 하렘을 만들 수 있으니까. 총리의 딸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비슷한 이유로...

    “강문수 씨. 약혼식을 하고 싶어요.”

    인류 최고의 여성이란 자부심이 있었던 나르시아의 표정과 말투에서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안 도망갑니다.”

    “아내가 불러도요?”

    “그건... 조금 어렵겠네요.”

    강문수 2세를 뱃속에 품은 송선영이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달려갈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하고 있다.

    “그러니 약혼식이라도 하고 싶어요.”

    “약혼하기에는 연애 기간이 지나치게 짧은 것 같은데요.”

    악마들이 이 세계로 몰려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나로선 뭐든 최대한 늦추는 편이 좋았다.

    결혼은 당연히 안 될 말이고!

    나르시아가 ‘약혼자’랑 밤을 함께한 적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약혼식도 매우 위험했다. 내 아이라도 생기면 떠나기가 쉽지 않으니까.

    “...약혼식까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시는데요?”

    자기주장이 강했던 그녀답지 않게 저자세를 보이며 양보했다.

    주도권이 그녀에서 나에게로 완전히 넘어왔다는 의미!

    그렇다고 너무 내 주장만 하면 안 만들어도 되는 적이 늘어날 것이다.

    “못해도  1년은 해야죠.”

    “1년...”

    너무 길다고 생각한 나르시아가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하지만 악마를 잡으면 그 기간이 더 짧아집니다.”

    “왜요?”

    “악마가 제 가족을 노리니까요.”

    P의 목숨으로 나를 협박하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당신이 곁에 있잖아요?”

    “놈들은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기에 제가 곁에서 멀어지는 순간, 목숨이 위험해집니다.”

    “인조전사들이 호위해주면...”

    “동물원에 있는 놈은 바보라서 붙잡힌 겁니다.”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날개와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팔다리.

    이런 사기적인 조합을 갖고도 생포됐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음...”

    “간단히 설명하자면.”

    탁.

    나는 한걸음에 나르시아의 등 뒤로 이동해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제가 악마였으면 아가씨는 이미 죽었습니다.”

    “아...”

    “놈들이 제 가족을 암살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보안 체계로도 저지할 수 없습니다.”

    “...이해했어요.”

    자기 목숨이 걸린 현실적인 이야기에 드디어 수긍하는 아가씨.

    협상을 원하는 악마들이 그녀를 죽여서 나를 자극할 것 같진 않지만, 약혼식 날짜를 늦추는 변명으로는 적당했다.

    “오래는 안 걸릴 겁니다. 지미 로리쿤을 노리던 악마가 붙잡혔으니까요. 동료에게 이상이 생겼음을 눈치챈 악마들이 곧 움직일 겁니다.”

    “악마가 얼마나 되는데요?”

    “저도 궁금합니다.”

    하지만 팔이 날개처럼 바뀐 검귀가 흔할 것 같진 않다. 흔했다면 ‘마법소년 최강훈’은 마법이 일절 안 통하는 악마에게 진즉 토막 났을 테니까!

    “장소를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외계인이라니... 우주는 정말 넓네요.”

    “맞습니- 잠시만요.”

    최면술로 모습을 감춘 어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네?”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강문수 2세의 출산일이 가까워졌다는 소식만 아니길 빌었다.

    * * *

    “아들~!”

    “무슨 일이세요?”

    “엄마가 자기 아들을 보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흠... 네.”

    이유가 필요했다. 아들의 얼굴이 궁금하면 현실에서 바로 보면 되니까. 굳이 꿈속까지 찾아올 필요가 없다.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거라면 이미...”

    “조금 달라요. 협상은커녕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꿈속에서 잘 지내는 환자들을 학살하고 있어요.”

    학살.

    헌터물 <나만  SSS급 헌터>의 세계에서 SSS급 괴물을 만난 뒤부터 나에게는 친숙한 단어였다.

    “그게 어째서 문제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 그건 꿈속이라도 마찬가지고.

    “자연적인 죽음은 괜찮아요. 하지만 다른 세계에 속한 검귀나 우리에게 환자가 살해되면 달라요.”

    “......”

    어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영혼이 원료로 바뀌지 않고 파괴된다고 한다.

    그게 안 좋은 이유?

    내가 적금을 든 은행이 망하면서 수익은커녕 원금조차 회수하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이랄까!

    듣기만 해도 최악이다.

    “살해돼서 줄어든 만큼 새로운 환자로 대처하면 될 것 같지만, 대가를 받아내지 못한 영혼이 늘어날수록 8세의 부담도 커져요.”

    “먼저 협상을 깰 줄이야...”

    악마들을 욕할 생각은 없다. 나도 협상하는 척하면서 유인한 놈들을 몰살할 계획 중이었으니까!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협상하기로 하고 간 악마가 돌아오질 않아서 오해한 것 같아요.”

    “아아.”

    방심하다가 공상과학에 붙잡히는 멍청이에게 중책을 맡기다니?

    이놈들은 괴물이 되면서 뇌까지 굳어버린 걸까.

    어이가 없다.

    “가장 위험한 일을 가장 멍청한 동족에게 떠넘긴 거예요.”

    “아하!”

    경험이 풍부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해했다.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나를 만나서 협상하는 위험한 일을 똑똑한 녀석이 맡을 리 없다는 소리.

    쥐새끼처럼 조심성이 많았다.

    ‘곤란한걸.’

    이 공상과학 세계에 모아서 한꺼번에 처리하고 싶은데, 놈들은 한꺼번에 나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끝낼까요?”

    아내의 2세 출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남편으로서 그녀 곁을 지켜줘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참이다.

    “8세는?”

    “완전히 끝내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건 놈들도 바라지 않을 테고요. 함께 죽고 싶을 리 없잖아요?”

    “8세를 이토록 힘들게 해놓고 뻔뻔하게 협상을 또 시도할까요?”

    “...아마도요.”

    나도 어머니처럼 짜증 나긴 하지만, 쥐새끼가 쥐구멍을 통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 붙잡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아들을 외부에서 지원하기로 했어요.”

    “현실에서 어떻게요?”

    “적성검사기 메인 서버 점검이란 명분으로 1년 정도 쉬기로 했어요. 그러면 놈들이 환자를 죽여도 새로운 환자가 생기지 않을 거예요.”

    “오...”

    그런 기막힌 방법이?

    쥐새끼를 잡기 힘들면, 쥐구멍의 숫자를 줄이면 된다.

    아주 당연한 이치!

    “아들의 말대로, 우리가 놈들의 협박에 굴복하면 영원히 끌려다닌다는 것이 7세의 결론이에요.”

    “제가 할 일은 뭡니까?”

    “후후! 남자는 역시 힘이죠~”

    “그거야 뭐...”

    이미 절대적인 힘으로 공상과학을 찍어 누르는 중이다.

    “현실은 지금 P의 적성검사기를 쓸 수 없다는 말에 대혼란에 빠졌어요.”

    “...상상이 안 되네요.”

    “그래서 두 번은 힘들 거예요. 8세의 건강 상태로도 두 번은 힘들고요.”

    “......”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몰이는 우리가 해주지만, 잡는 건 온전히 아들의 몫이에요. 한 마리라도 놓치면 실패라는 점, 꼭 명심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몰이는 출산예정일 전에 끝나니 걱정하지 말고요.”

    “그건 진짜 다행이네요.”

    “며느리에게 안부 전해줄게요. 아들이 다른 여자랑 연애 중-”

    “엄마?!”

    “농담이에요~ 뿅!”

    뿅!

    내 심장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어머니가 도망치듯 떠났다.

    “몰이라...”

    그렇다면 나도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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