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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15화 (216/232)
  • 215화

    [12장-3절] 이건 기회일지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한데...’

    악마는 날갯짓 한 번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그것도 어디로 갈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게 중요한 이유?

    악마가 순식간에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할 수 있다면, 날갯짓을 또 하기 전에 죽이거나 붙잡는 것도 가능하다.

    “놀랍군요.”

    이건 악마의 행동 패턴을 확률과 통계로 계산할 수 있는 인공지능만 가능한 기예였다. 아니면 선배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지고의 천재이거나!

    나에게는 무리다.

    “저야말로 놀랐어요. 강문수 씨가 인조전사들을 쓰러트릴 때랑 비슷한 움직임이에요. 우연인가요?”

    “우주는 넓으니까요.”

    “......”

    “...라고, 어영부영 넘어가고 싶지만, 제 얼굴에 또 쓰여 있는 모양이군요.”

    “네.”

    편법 없이 피메달을 따면서 ‘초인’으로 불리는 나지만, 표정 관리를 못 해서 배우는 절대 무리일 것 같다.

    “녀석이 제가 찾던 악마입니다.”

    “어머! 인조전사에게 당할 정도면 생각보다 아주 약한데요?”

    “그건 이 녀석이 방심한 탓입니다. 악마도 개인차가 있으니까요.”

    예측 사격!

    사기 같지만, 행동 패턴을 완전히 읽히기 전에 인공지능을 끝장내면 된다.

    ‘방심하는 건 인간이랑 똑같네.’

    전투 영상을 보니, 이 녀석은 인조전사를 농락하며 가지고 놀다가 예측 사격 한 방에 당해버렸다.

    이건 예상 밖의 성과.

    그리고 기회였다.

    “악마에게도 유대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다면 구하러 올 겁니다.”

    “어머! 기쁜 소식이네요. 표본을 더 모을 기회니까요.”

    “뭐...”

    놈들을 얕잡아 보는 건 자유지만, 내 계획에 차질을 주면 곤란하다.

    ‘현재까지는 기회일지도?’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 아니었다면 라누벨 환자는 진즉 놈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서 검귀로 다시 태어났으리라.

    그뿐만이 아니다.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소장을 돌아보며 가까이서 면회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대, 대화요? 검귀에게도 언어가 있었습니까?!”

    놈의 번식에만 관심이 있는 소장은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보고 싶군요.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탁.

    한 걸음.

    나는 불가사리 같은 몰골의 악마 앞까지 단숨에 이동했다.

    * * *

    “안녕?”

    “......”

    “기다려도 안 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마녀 흉내라도 내는 거야?”

    “...네가 강문수인가?”

    꾹 다물어져 있던 악마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맞아.”

    “나를 풀어줘라.”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우리가 서로를 도울 만큼 친하다고 생각해?”

    “우리의 협상안을 거부하겠다는 거냐?”

    “이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나는 방심하다가 깡통에 당한 네 뒤치다꺼리하는 졸개가 아니야.”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P가 죽는다.”

    “그때는 너희도 죽지.”

    “......”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살 수 없다. 게다가 놈들은 실제 생태계의 기생충들처럼 숙주를 바꿀 수도 없다.

    “너희가 P의 목숨을 들먹이며 나의 배제를 요구하듯, 우리도 P의 목숨으로 너희에게 요구할 게 있어.”

    “말해라.”

    “쯧쯧. 협상의 기본도 안 되어 있네. 이게 입으로만 대충 약속하면 끝날 문제라고 생각해?”

    “우리의 손에 P의 목숨이 달렸다. 뭐가 더 필요하지?”

    P를 들먹이는 이 새끼들의 대갈통을 전부 으깨주고 싶다.

    제정신인가?

    악마 중에 P를 모르는 구시대의 인간은 없다. 인간이던 시절에 P의 적성검사기의 혜택을 누렸다는 의미.

    그런데도 이런 태도를 보고 있으면 열불이 난다!

    “내가 현실에서 좀 잘나가서 말이야. 최근에 피메달을 땄고, 아내는 예쁘고 돈도 많아. 아이도 곧 태어날 예정이지. 그런 내가 별것도 아닌 녀석들에게 수그릴 것 같아?”

    “허! 우리가 별것도 아니라고? 너야말로 피메달과 여자 하나로 우쭐대지 마라.”

    악마가 내 말을 듣고도 코웃음 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상의 삶을 꿈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꿈으로.

    정말 같잖은 허세였지만, 너무 도발하면 협상 자체가 깨질 수 있기에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자기들의 의사를 전달할 한 마리만 보낼 줄이야...’

    이 협박범들을 깡그리 몰살시킬 계획인데, 겨우 한 마리? 나의 위험성을 잘 아는 놈들은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거 아니야? 아니면 P의 목숨으로 협박하자는 주장은 소수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마음대로 생각해라.”

    “마음대로 생각 중이야. 너무 한심한 모습이라.”

    “......”

    내 비아냥에 반박하지 못한 악마가 표정을 더욱 일그러트렸다.

    “나는 이 세계에서 영웅 놀이나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릴 테니, 준비되면 언제든 찾아와라.”

    “......”

    놈에게선 대답이 없었으나,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충분히 알아들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걸로 끝?

    아니다.

    “떠나기 전에, 약속을 어기고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선물이야.”

    “...커억?!”

    퍽!

    놈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진심으로 했으면 죽었겠지만, 그러면 모든 계획이 일그러지기에 참았다.

    “아프지? 아플 거야. 나는 꿈이 아닌 진짜니까.”

    우리가 물리적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조물주의 장난이나 잘못된 진화가 아니다.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려주는 안전장치.

    통각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발바닥에 못이 박히고, 장기가 썩어가도 죽을 때까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크으으윽...”

    검귀는 통각이 없다. 죽어도 금방 되살아나고, 아메바 같은 재생력 때문에 고통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세계’로, 놈에게 잊고 살았던 통각을 심어줬다.

    깜빡~

    물론, 진짜 목적은 놈의 몸에 자연스럽게 추적기를 달기 위함이다.

    ‘성공했으면 좋겠네.’

    나의 세계에도 꿈쩍하지 않는 눈깔의 촉수 일부를 심었으니까.

    [발렌타인]

    혈신 소운현이 답답한 후배를 위해 솔로늄으로 제작한 신화급 마검.

    힘차게 ‘혈신 만세!’를 외치면 적의 숫자만큼 칼날이 소환된다.

    동료나 연인이 주위에 없으면 효과 범위가 대폭 상승한다!

    ※선배를 능가해야 수정 가능.

    선배가 이런 용도까지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세계에서 분리돼도 사라지지 않는 건 확실했다.

    선배를 능가해야 수정 가능...

    뛰어난 ‘라누벨라’인 어머니조차 엄두를 못 내는 수정을 악마 따위가 어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걸로 정말 끝.

    “나중에 보자. 탈출할 수 있다면.”

    “가, 감히 나에게...!”

    꿈속에서 대단한 인생을 살다가 검귀가 된 악마가 부들부들 떨며 굴욕과 분노를 표출했지만, 팔다리와 날개까지 꽁꽁 묶인 놈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탁.

    다시 한 걸음 내디뎌서 자연스럽게 유리창 너머로 이동했다.

    “아...”

    그녀는 내가 공간을 넘나드는 모습이 신기한 듯했다.

    “별거 아닙니다.”

    “강문수 씨가 쓰러트린 인조전사들이 남긴 영상으로는 봤지만, 그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악마를 잡으려면 악마의 능력도 쓸 수 있어야 하니까요.”

    “우주 끝까지 갈 수 있으세요?”

    “그건 무리입니다. 저에게는 악마 같은 날개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진짜 놀라워요.”

    “그런 혈통입니다. 제가 잘나서 할 줄 아는 건 절대 아닙니다.”

    “혈통이군요...?”

    내 하체를 힐끔 쳐다보는 나르시아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아가씨. 슬슬 장소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에 계속 있으면 일 생각이 날 것 같아서.”

    “후후! 좋아요!”

    절대 안 놓치겠다는 듯이 연인처럼 바짝 붙어서 팔짱을 낀 나르시아.

    우리는 잠시 멈췄던 동물원 데이트를 이어서 계속했다.

    * * *

    우주는 무한에 가깝게 넓고, 자원도 무한에 가깝다. 철광석 혹은 다이아몬드로만 이루어진 행성이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도 인조전사가 비싼 이유는?

    자기장이 통하지 않으면서 외부 충격에 강하고, 전투도 잘하는 고성능을 조그마한 몸체에 전부 욱여넣는 공정이 오래 걸리는 탓이다.

    그건 다시 말해,

    “진짜 빠르네.”

    자기장에 취약하고, 성능도 변변찮은 안드로이드는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무한한 노동력을 활용하면 어떤 공사든 며칠이면 뚝딱!

    사형이 연기되면서 수많은 과부의 탄식을 자아낸 지미 로리쿤의 감옥에 공간이동 장치가 단 하루 만에 설치됐다.

    쉬운 작업이었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들어간 공정비용만 웬만한 전함에 맞먹는다고 하니까. 내가 모선을 기부하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은하계의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애니족에 정의의 심판을! 제국은 여러분의 헌신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총리의 대변인, 나르시아 엘베레스트의 이름으로 엄숙히 약속합니다!”

    “와아아아!”

    “와아아!”

    짝짝! 짝짝짝!

    신성한 전장까지 따라온 아가씨가 장병들 앞에서 연설했다.

    군(軍)의 기강과 보안을 위해 민간인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지만, 총리의 딸이 장병들을 응원하기 위해 공적으로 방문한다는 걸 비난할 장군은 없었다. 오라버니가 국방부 장관이기도 하고...

    적폐 가문이다.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예쁘고 착한 여자를 지켜주고 싶은 남자의 본능 덕분이죠. 제가 말을 잘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내가 아는 어떤 ‘황녀’보다는 말을 잘하는 편이다. 이쪽은 남의 심장을 후벼파는 말만 하니까.

    아! 꼭 그렇지도 않군?

    라누벨라 부족으로 발생한 업무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면서 최근에는 눈에 띄게 사람이 부드러워졌다.

    “무운을 빌어요.”

    “가볍게 다녀오겠습니다.”

    툭.

    나에겐 필요가 없는 우주복의 헬멧을 인간처럼 쓰고 수송선에 탑승했다.

    “지원팀입니다.”

    “경호팀입니다.”

    “수색팀입니다.”

    혼자서 ‘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조전사 셋이 간략하게 자기소개했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무당팀입니다.”

    이 수송선 안에 순수한 인간은 나밖에 없었다. 지난 전투를 분석한 분들이 수송선을 호위하는 일반 병사들을 ‘불필요한 전력’이라고 판단한 모양.

    부우웅~

    자기소개를 마치고, 수송선이 수많은 미사일 틈에 섞인 채 적의 모선을 향해 날아갔다.

    ‘호옹...’

    이 수송선에는 창문이 있었다.

    아니, 내가 조종석 옆자리에 앉은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쾅! 콰광! 펑! 번쩍...!

    애니족 모선과 호위함들이 신속하게 우리의 미사일을 격추했다.

    “지난 침투에서 시스템 해킹에 성공한 517번 활주로로 침투합니다.”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인 지원팀이 모선의 활주로 안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위이잉-

    이제야 안 건데, 이 수송선은 애니족의 것이랑 외형이 완벽히 똑같았다.

    내용물만 빼고!

    “지금부터는 무당팀의 판단과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

    “혈신 만세!”

    깜빡!

    위대한 혈신의 이름으로 이 모선을 압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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