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213화 (214/232)
  • 213화

    “......”

    “......”

    모선 내부는 고요했다.

    간혹,

    (침입자 발견! 침입자 발견! 침입자 발견! 침입자-)

    콰직!

    나를 감지한 장치들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여기에 응해야 할 애니족이 전멸했기에 공허한 메아리였다.

    적의 숫자만큼 칼날을 소환하는 발렌타인답지 않은 잡음이 있었지만, 이런 세세한 것까지 파괴하면 모선이 형태도 남지 못하기에 최소로 잡았다.

    생명체, 인조전사.

    그래서 두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보안장치들은 대부분 작동 중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끝났지.’

    인공지능이 이상한 짓을 할 가능성도 있지만, 공상과학 작품의 단골손님인 ‘인공지능의 배신’이란 소재는 여기에도 위험 요소로 들어있다.

    배신을 막기 위한 최소의 안전장치!

    그래서 인공지능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는 있지만, 중요한 순간의 결정은 무조건 인간의 허가가 필요하도록 해놨다.

    그런데 인간이 전멸했네?

    한두 푼 하는 모선이 아니기에 탈취될 것 같다고 ‘인공지능’이 판단해도 자폭하도록 해놓진 않은 듯했다.

    서걱-

    중앙통제실로 짐작되는 장소를 가로막은 문을 가볍게 썰어줬다.

    “......”

    “......”

    여기도 생존자는 전무(全無).

    고급스러운 의상을 입은 여성이 중앙에 앉아 있었고, 그 주위의 보좌진들은 예외 없이 모두 남성.

    전쟁터에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거야 당연하지만, 젊은 미남들로만 구성된 건 단순한 우연일까?

    “실례할게요.”

    “......”

    툭.

    의자에 앉은 채 꼬치처럼 촉수에 꿰여서 죽은 여성을 옆으로 밀어냈다.

    “의자에 피가 흥건하지만, 계속 입을 옷이 아니니 상관없겠지?”

    일개 병사에서 간부로 단숨에 진급할 예정이니까. 이 모선은 그 재물이다.

    깜빡~

    마음껏 죽인 눈깔이 촉수를 즐겁게 흔들며 동의했다.

    “웃차!”

    의자에 앉았다. 죽은 애니족 여성에게 맞춰져 있었던 탓인지 나에게는 살짝 폭이 좁은 느낌이 있지만, 함장이 된 기분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때,

    (불경합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일어서십시오!)

    정면의 화면에 분노한 애니족 남성의 얼굴이 생성됐다.

    “안녕. 이 모선의 인공지능.”

    (당장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는 친애하는-)

    “적에게 부탁할 때는 공손하게 하라는 상식은 없는 모양이네.”

    (친애하는 함장님을 살해한 하등종에게 차릴 예의는 없습니다.)

    하등종.

    애니족이 인간을 부르는 호칭.

    적대국끼리 서로의 족보를 깎아내리는 건 기본적인 예의다. 내가 이 자리에 앉는 행동도 예의 중 하나고.

    “친애하는 주인도 죽었잖아. 항복하는 게 어때? 하등종의 인공지능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런 일은 내가 삭제되는 순간까지 없을 거다!)

    “아쉽네.”

    최면술이 인공지능에도 통한다면 참 좋을 텐데.

    ‘...아! 방법이 있네.’

    살짝 번거롭긴 하지만, 이 인공지능의 협조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덥석.

    죽은 함장의 머리에 직접 손을 얹으며 가짜 주문을 읊었다.

    “살아나라.”

    “...아으?”

    원리는 예전에 악마에게 살해된 여신을 살릴 때랑 똑같다.

    내 영역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상태.

    그녀가 헛소리할 틈을 안 주고 최면술부터 걸었다.

    “나에게 모선 통제권을 이양해.”

    “...네. 당신에게 모선 알카리온의 모든 지휘권을 넘기겠습니다.”

    (함장님?!)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인공지능이 경악했다.

    “알카리온. 그동안 나를 보필한다고 수고했어요. 앞으로는 이 하등종을 위해? 어째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 살짝 의문이지만, 내 뜻은 확고합니다.”

    (재고를 신청합니다.)

    “확고합니다.”

    (암호를 말씀해주십시오.)

    “모선 알카이온의 빛이 차가운 고향별의 밤하늘을 따뜻하게 채워주기를.”

    (......)

    “안 틀렸지?”

    (...암호를 확인했습니다. 지금부터 모선 알카이온의 모든 통제권을 하등종에게 이양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어.”

    “감사합니다. 다시 쉬세요.”

    털썩!

    용무가 끝난 애니족 여성의 생명을 곧바로 거뒀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인공지능이 바로 발끈했다.

    “죽은 애니족이 다시 죽었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죽은 생명을 가지고 놀다니! 하등종은 대체 무슨 기술을 개발한 거냐?)

    “방금 본 기록은 전부 삭제. 항복 의사를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삭제하라는 나의 명령에 바로 차분해진 인공지능.

    내가 편의점 사장님의 가상현실게임 철학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다.

    ‘수정하면 끝이지.’

    가상현실게임 <몰랑 판타지>의 개발자가 버튼 한두 번만 누르면 ‘사랑’이란 감정도 만들 수 있다.

    이 꿈의 세계도 마찬가지.

    어머니에게 최면술을 배운 뒤부터 이들이 인간처럼, 나랑 똑같은 하나의 생명체로 보이지 않게 됐다.

    “무서운 일이야...”

    내 최면술에 송선영이 복종한다면,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랑 달리, 현실에서도 최면술을 쓸 수 있는 마녀들은 ‘사랑’이란 감정 자체가 있을지 의문이다.

    깜빡?

    “...아니야. 아무것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해서 나를 낳았다. 여기에 의문을 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리라.

    (믿음이 부족한 하등종 사령관이 통신을 요청합니다.)

    “연결해.”

    (네.)

    나는 확실히 강해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 들었다.

    * * *

    내가 애니족 모선을 상당히 부수긴 했지만, 팽팽했던 전선에 큰 구멍을 만든 건 틀림없었다.

    그만큼 매우 큰 업적!

    높으신 분이 찾아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강문수 씨! 당신의 승전보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내 소식을 듣자마자 전장으로, 전쟁의 뒷수습 중인 이곳까지 단숨에 날아온 나르시아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예상대로입니다.”

    “해킹 같은 지식도 없이 어떻게 모선의 지휘권까지...”

    “영업 비밀입니다.”

    “칫.”

    모선은 분해해서 고철을 재활용만 해도 국방비를 아낄 수 있고, 애니족의 기술력이 집대성된 모선은 연구만으로도 그 가치는 무궁무진!

    그래서 애니족도, 인간도 서로의 모선을 훔치려고 애쓰는 것이다.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는 쉬운 일입니다.”

    “농담하지 말란 말이 안 나오네요. 인조전사들을 물처럼 쏟아부어도 실패한 일을 혼자서 해내셨으니...”

    “이젠 아가씨가 약속을 지키실 차례입니다.”

    “악마에게 위협받는 지미 로리쿤이 감옥에서 당신 근처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달라는 거죠?”

    “정확합니다.”

    “바로 착수할게요.”

    “흠.”

    이젠 탈출기를 감옥에 설치하는 도중에 악마가 찾아와서 환자를 죽이지 않기만을 빌 수밖에.

    이것만은 나도 방법이 없다. 설치하는 동안만 환자 옆에 붙어있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혹여나 그 모습을 악마가 보면 의심을 사게 되리라.

    “모선에서 싸우시는 영상을 봤어요.”

    “그랬습니까.”

    “사람이란 게 믿기지 않는 움직임이시던데요?”

    “이 정도는 돼야 악마가 무서워합니다.”

    “악마요...”

    “모르는 편이 낫습니다.”

    나도 포함해서.

    탈취한 애니족 모선의 조사가 진행될수록 나를 찾는 인간도 많아졌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다 죽였나?

    벽을 관통한 촉수는 무엇인가?

    모선의 통제권을 어떻게 빼앗았나?

    ......

    과학과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결과들의 과정이나 원인을 질문했다.

    나는 그때마다 최면술을 써서 회피하기 바빴고!

    이 질문 공세는 내가 높으신 분에게 최면술을 걸어서 ‘1급 기밀’이란 방패를 만들 때까지 계속됐다.

    “강문수 씨 덕분에 전장에 숨통이 조금 트이겠네요. 어렵긴 마찬가지지만.”

    “그렇습니까.”

    애니족에게 밀리는 중이었어?

    꿈의 세계 정세에 전혀 관심 없어서 몰랐다.

    “지미 로리쿤이 제국 최강의 모선을 부숴버린 탓에요. 구형과 신형 둘 다!”

    “와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투기 조종사부터 시작한 라누벨 환자.

    그는 전투기, 구축함, 순양함, 전함 순서로 차근차근 밟으며,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모든 함대의 심장인 모선!

    시작은 건조된 지 100년 가까이 된 구형 모선이었다. 그러다가 공적을 쌓아서 최신형 모선으로 옮겼는데...

    “그는 7개월밖에 안 된 최신형 모선과 우수한 승무원들을 허무하게 잃은 후, 구형 모선에 다시 올라서 재기를 시도했어요. 첫 전투에서부터 실패했지만.”

    “모선 2대면 타격이 크겠네요.”

    “네. 갑자기 부족해진 모선 숫자를 맞추기 위해 예산을 쥐어짜고 있어요. 세금도 올리면서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고. 인권이 상대적으로 낮은 식민지 원주민들은 못 죽어서 살 만큼 삶이 팍팍하죠.”

    “잘 아시네요.”

    “언니, 오빠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요.”

    “아하!”

    서민의 고충은 잘 알지만, 해결할 의지나 방법은 없는 듯했다. 전쟁에서 지면 가파르게 올라간 세금이 애교로 보일 만큼 힘들어지니까.

    “그런 상황에서 강문수 씨가 큰일을 해주신 거예요.”

    “숨통이 트였다는 거군요.”

    “모선을 잃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될 만큼 힘들었어요. 일부 전장은 3대2 혹은 2대1 같은 불리한 모선 숫자로 간신히 버티고 있어요. 이건 저도 출발하기 전에 국방부 장관인 오빠에게 처음 들은 거예요.”

    “과연... 이해했습니다.”

    지미 로리쿤이 잃은 모선 숫자만큼 불리한 전장도 늘어난다. 그리고 패배해서 모선을 또 잃으면 더욱 힘들어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거대한 제국도 망할 수밖에 없다.

    “아빠와 오빠들은 강문수 씨가 모선을 또 탈취해주길 원하고 있어요.”

    “힘든 일은 아니죠. 하지만 공짜로 일하진 않습니다.”

    “공짜라뇨? 저를 가지는데요?”

    “그 전략은 사랑에 빠진 유부남에게는 안 통합니다.”

    “...당신 같은 남자에게 사랑받은 여자는 행복하겠네요.”

    “하핫!”

    질투 섞인 날카로운 말투였지만, 멋쩍으면서도 기분 좋게 들렸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지미 로리쿤의 감옥이 완성되면 모선 하나를 또 탈취해드리겠습니다.”

    “빨리 만들라는 소리네요.”

    “강요는 아닙니다.”

    “지미 로리쿤이 모선 2대를 부순 뒤부터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진 오빠에게 말해볼게요.”

    “네.”

    하지만 가족에게 말한다던 소녀는 떠나지 않고 내 옆에 바짝 붙었다.

    “에스코트해주세요.”

    “여긴 남녀의 데이트 장소가 아닌 신성한 전장입니다만?”

    “공과 사가 철저하신 건 좋은데, 벌써 잊으신 거예요? 밀착해서 호위해주시기로 했잖아요.”

    “저는 밀착해서 호위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만?”

    “숙녀의 침실까지 들어와서 호위한다는 게 밀착이 아니면 뭔가요?”

    “......”

    최면술의 맹점.

    상대가 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의도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어서요.”

    “...좋습니다. 가죠.”

    악마가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말씀처럼 여긴 신성한 전장. 데이트 장소로 좋지 않죠. 그래서 가까운 곳을 알아뒀어요.”

    “그렇습니까.”

    “네. 여기서 3광년밖에 안 돼요.”

    “......”

    가깝다는 기준이 아픈 것 같다.

    “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동물원이에요. 애니족부터 박테리아까지 없는 게 없어요.”

    “흠.”

    외계 생명체로 가득한 동물원이라?

    이건 조금 흥미로웠다.

    “최근에 팔다리가 칼처럼 생긴 외계인을 붙잡았데요. 인조전사도 당할 만큼 위협적이라고...”

    “...정말 흥미롭네요.”

    깜빡~

    붙잡았다는 외계인을 꼭 구경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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