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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12화 (213/232)
  • 212화

    악마가 정확히 언제, 어디로 오겠다고 시간과 장소를 명시해둔 것은 아니다. 선택은 놈들의 몫이니까, 쥐구멍에서 계속 안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원히 질질 끌 수 없다는 건 놈들도 알고 있으리라.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은 살 수 없으니까.

    ‘서두르지 말자.’

    P의 건강이 악화하고 있지만, 의사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현재의 자리에 충실할 뿐.

    나는 ‘무당’으로서, 내가 가능한 일을 하겠다.

    “감옥에 공간도약을...?”

    “네.”

    “강문수 씨. 어째서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해야 하죠? 공간도약 시스템이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나르시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로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악마를 따돌리려면 공간도약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이 세계에 마법이 존재한다면 좀 더 편했겠지만, ‘공간도약’이란 거창한 판타지 기계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지미 로리쿤을 살리기 위해 전함 1대 가격의 기계를 설치하자는 거네요?”

    “......”

    그 가격은 몰랐는데, 듣고 나니 그녀의 부정적인 태도가 이해됐다.

    “명분이 너무 빈약해서 제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어요.”

    “명분이라면?”

    “가장 쉬운 방법은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거죠.”

    “과연... 정말 쉽네요.”

    악마가 언제 올지 미지수이기에 준비를 서두르기로 했다.

    * * *

    나르시아가 가슴 펴며 당당히 외치기도 했지만, 88개 식민행성을 보유한 제국은 은하계 최강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은하계’에서 최강이란 얘기고, 이웃하는 은하계에는 또 다른 최강자가 있다.

    눈이 조금 큰 인간이랄까?

    그 탓에 3D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인간처럼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별다를 게 없는 외계인.

    그래서 제국에서는 이들을 ‘애니족’이라고 부른다.

    “저는 이 함대의 사령관인...”

    “반갑습니다!”

    총리의 딸이 전쟁터에 남자 한 명 밀어 넣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자기소개는 대충 흘려듣고, 곧바로 전장에 투입을 희망했더니...

    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줄 선임으로 붙은 아저씨가 말했다.

    “자네 같은 젊은이들을 제법 보았지. 죽으려고 전쟁터에 투신하는 바보들.”

    “그런가요?”

    “살다 보면 힘든 일도 있지. 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젊어.”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곧 아빠가 될 예정이라서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결혼? 벌써?”

    “네. 특별히 보여드릴게요.”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척하면서 송선영의 사진을 만들었다.

    스윽-

    “오... 미인이군.”

    “이런 아내를 놔두고 먼저 죽을 리 없잖아요?”

    “그렇군. 그런데... 죽을 생각이 없다면 더욱 말리고 싶군. 여긴 아름다운 아내를 둔 남자가 올 곳이 못 돼.”

    “조언 감사합니다.”

    “젊은 친구가 고집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게.”

    “하하! 물론입니다.”

    기계가 대신 싸워주면 좋겠지만, 애니족에는 인공지능을 무력화하는 강력한 자기장 기술이 존재한다는 설정!

    못 막는 건 아니지만, 그 자기장이 안 통하는 인조전사는 생산 단가가 너무 비싸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고...

    안전한 원격조종은?

    같은 이유로 어려워서 사람이 직접 싸워야 한다.

    “수송선에 얼른 타라!”

    “넋 놓지 말고 서둘러!”

    “우리는 적의 모선에 침투한다!”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버려~!”

    두두두두-

    나를 포함한 병사들이 수송선에 꾸역꾸역 올라탔다.

    우주의 항공모함, 움직이는 소행성으로 불리는 모선(母船).

    그 덩치만큼 화력도 막강하기에 전쟁은 누가 먼저 적의 모선을 무력화하느냐로 결정된다.

    ‘아저씨의 설명이 이해되네!’

    이런 모선을 정공법으로 파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손해가 막심하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그래서 소수정예를 투입하여 내부에서 탈취하는 전략을 취한다.

    파괴가 아닌 탈취.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모선 1기만 빼앗아도 모든 전쟁터의 판도가 크게 바뀌기 때문에 애니족에서도 꾸준히 시도하는 전략이다.

    덜컹, 덜컹, 덜컹...!

    외부 상황을 살펴볼 창문 하나 없는 수송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저씨.”

    “지금은 병장님이라고 불러라.”

    “병장 아저씨.”

    “킁. 왜?”

    “이 수송선이 모선에 무사히 침투할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95% 정도.”

    “오! 진짜 높네요.”

    “폭발물이 들어있지 않으니까. 모든 모선은 미사일 같은 직접적인 위협부터 처리하기에 수송선은 가장 나중에 노리지. 기초적인 상식이다. 그게 아니면 누가 지원하겠냐?”

    “하하...”

    그 말이 맞네.

    “운이 정말 나쁘면 5%에 걸릴 수도 있지만, 머리 나쁜 보병이 출세할 길은 이 방법밖에 없으니.”

    “정말 서럽네요.”

    “서러우면 사관학교에 가란 말이 괜히 나왔겠냐?”

    “하핫!”

    우주를 헤엄치는 상황만은 없길 빌며 기다리니...

    지휘관으로 짐작되는 남자가 말했다.

    “충격에 대비! 약 10초 뒤에 적의 격납고에 불시착-”

    콰당! 쿵! 쿠구구구...!

    말하는 도중에 수송선이 격납고에 충돌한 듯했다.

    안전띠 덕분에 큰 사고는 없었지만, 가벼운 뇌진탕을 호소하는 병사가 몇몇 보였다.

    그러나,

    “밖으로! 어서! 서둘러...!”

    “죽기 싫으면 수송선을 엄호해!”

    “모선의 수비대가 온다!”

    여기는 적진의 심장부이기에 아프다고 투정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포로를 교환하기도 하지만, 교환할 포로가 부족하면 가장 먼저 버려지는 게 보병!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

    “수송선을 부탁합니다.”

    “네! 소령님!”

    모선을 탈취하기 위해 전 병력이 우르르 몰려갈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침투하는 인원은 단 3명.

    아니. 3기라는 표현이 맞으리라.

    인조전사들은 영화에 나올 법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적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아악?!”

    “컥?!”

    “으아악?!”

    애니족 병사들이 인간이랑 똑같은 비명을 지르며 무더기로 쓰러졌다.

    ...강하네?

    나에게는 두부처럼 간단히 썰렸지만, 인조전사 1기가 사단급 전력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뭐해?”

    “아! 죄송합니다. 저 녀석이 너무 잘 싸워서 넋 놓고 있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저 녀석이 소령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어... 맞는 것 같아요.”

    인공지능도 사람처럼 계급을 단다는 사실이 놀랍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엄호해!”

    “......”

    나는 보급받은 최첨단 총을 들고 방어선 앞으로 돌진했다.

    “뭐해?!”

    뒤편에서 경악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적의 방어선을 향해 질주했다.

    두두두두! 두두!

    내가 객실에서 보았던 총탄보다는 확실히 강력한 화력.

    그러나 총기로 무장한 건 나도 마찬가지이며, 올림픽 사격에서 금메달을 쓸어담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으악?!”

    “악?!”

    인조전사는 모선의 심장부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지만, 모선을 탈취하는 방법을 모르는 나는 차근차근 격납고를 점령해갔다.

    깜빡?

    “기다려. 곧 놀게 해줄게.”

    발렌타인이 눈알을 깜빡이며 ‘몰살’을 제안했다.

    녀석을 사용한다면 ‘모든 적’이 순식간에 정리되겠지.

    하지만 여긴 흙바닥이 아니다. 촉수가 예민한 기계장치를 꿰뚫으면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위험이 있다.

    깜빡~

    이해하고 얌전해진 눈알이 다시 내 소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아저씨. 다행히 무사하셨네요.”

    “자, 자네는 대체...?”

    격납고에 더는 죽일 ‘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본진으로 돌아갔다.

    “몸풀기로 나쁘지 않네요.”

    “인조전사였나...?”

    “아뇨. 순수한 인간입니다. 직업이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그때, 수송선의 지휘관이 새빨개진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너! 감히, 내 명령을 어기고...”

    “괜찮습니다.”

    “...그래! 어겨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는 없다.”

    최면술 치료를 받은 그는 평온해진 얼굴로 돌아갔다.

    “허! 신기하군. 저 장교는 저렇게 간단히 물러날 인간이 아닌데.”

    “제 활약에 감명받은 모양이죠.”

    “뭐... 그건 그렇군...”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이 풀린 아저씨가 멋쩍게 웃었다.

    “아저씨. 저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여, 여기서? 이 상황에?”

    “이 격납고에 제가 왔었다는 흔적을 남겨도 좋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노상 방뇨를 못 합니다.”

    “허! 우주는 참 넓군! 그런 교리가 있는 종교가 있다니...”

    “다녀올게요.”

    휙휙~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후에 나는 정말로 모선에서 화장실 찾아다녔다.

    “헉! 침입자-”

    탕!

    가는 길에 마주친 외계인들의 머리에 살포시 총알을 박아주고.

    “이젠 나와도 돼.”

    깜빡깜빡!

    소매에서 나온 눈깔도 새로운 외계 문물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부지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간이랑 똑같네.”

    지미 로리쿤의 상상력이 부족했거나, 그가 읽은 공상과학 작품이 그다지 창의성이 없었던가.

    외계인이 사용하는 화장실은 소변기까지 인간의 것이랑 똑같이 생겼다.

    유일한 차이라면?

    화장실이 남녀공용이다. 전쟁이란 특수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모선은 화장실부터 숙소까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꺅! 침입-”

    탕!

    나도 놀라서 방아쇠부터 당겼다.

    “...적성이 성악가인가?”

    애니족의 남성은 죽으면서 비명을 지를 때도 굉장한 중저음이었는데, 여성은 반대로 엄청난 고음!

    그 목소리에 예민한 내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깜빡~

    “보채지 마. 다 부수기 전에 침실까지만 구경하자. 알겠지?”

    깜빡!

    외계인의 생활문화가 인간이랑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벌써 실망한 눈깔.

    녀석이 원하는 파괴는, 이 혼란스러운 전시 상황을 이용해서 사랑을 나누는 애니족 커플부터 심판한 후에.

    탕! 탕!

    “......”

    “......”

    “남들은 목숨 걸고 싸우는데, 자기들은 방에서 불 끄고 짝짓기라니.”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깜빡깜빡?

    “어허! 전혀 달라. 나도 신성한 올림픽 중에 하긴 했지만, 경기 도중에 하진 않았어.”

    스윽-

    내 총보다 좋아 보였던 애니족 여성 간부에게 선물 받은 권총을 호주머니에 기념품으로 넣었다.

    “외계인 구경은 다 했고, 드디어 네 차례야.”

    깜빡!

    파괴할 생각으로 벌써 흥분한 눈깔이 촉수를 흔들며 기뻐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똥을 만들고 있냐!? 얼른 돌아와!)

    아저씨의 무전이었다.

    “벌써요?”

    (소령님이 모선 탈취에 실패했다! 애니족의 인조전사에게 당했어!)

    “아하!”

    눈에는 눈, 인조전사에는 인조전사!

    작전이 실패했기에 지금부터는 무사히 이곳을 탈출해서 돌아가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됐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느냐?

    그건 아닌 듯했다.

    (빨리 와!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진급 확정이야!)

    “그래요?”

    (소령님이 당하기 직전까지 찍은 영상자료가 있으니까.)

    모선의 내부구조를 극단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오늘 확보한 정보는 다음 침투 작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

    “다음은 없어요.”

    (뭐?)

    “화장실이 남녀공용인 이 모선은 오늘부터 제 소유니까요.”

    푹!

    칼로 변한 발렌타인의 칼끝에서 확장된 촉수가 수천 갈래로 나뉘면서 모선 전역에 바늘처럼 침투했다.

    “아악?!”

    “컥?!”

    “꺄악?!”

    쾅! 콰광! 펑! 퍼엉...!

    여기저기서 폭발음이 들리고 벽과 바닥이 흔들렸지만, 모선 내부를 구경하면서 가장 위험한 동력부의 위치를 파악해뒀기에 문제없다.

    “...쉽군. 동의하지?”

    깜빡? 깜빡!

    영화처럼 자폭 장치가 작동하는 전개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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