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12장-2절]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 공상과학 세계는 우주의 면적만큼 정복과 식민지 확장이 무한히 계속되는 군국주의 시대.
그래서 최고의 직업은 군인이고, 최고의 재능은 폭력이며, 최고의 가치는 전쟁의 승리다!
다만,
“강문수 씨, 이쪽이에요.”
“네.”
공상과학답게 개인의 무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함대, 모함, 전함, 폭격기, 전투기...
광활한 우주에서 지휘하거나 직접 조종해서 활약할 수 있어야 한다. 행성에서 깔짝대는 검사와 마법사 등은 이 세계에서 큰 힘이 안 됐다.
“우주선을 한 번도 조종해보신 적이 없으세요?”
“네. 자동차도 최근에 배웠습니다.”
“끄응...”
이 소녀는 나를 어떻게든 활용하고 싶은 듯했다.
최면술로 포기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소녀에게 최면술을 남용하는 바람에 만성이 돼버렸다.
「괜찮은 남자를 찾아라.」
「강문수(남자)는 포기해라.」
앞서 걸었던 최면술이랑 충돌하는 바람에 걸리질 않았다.
‘앞으로는 주의해야지.’
이번에는 내 실수이기에 고스란히 감수하기로 했다.
“특채로 사관학교에 입학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싫습니다.”
“왜요? 남들은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어서 목숨도 거는데.”
“저는 현재에 만족하니까요.”
“귀신 잡는 무당이요?”
“네.”
“강문수 씨. 좁은 행성에서만 사셔서 세상 물정에 어두우신 듯한데, 귀신 500마리를 잡는 것보다 전투기 1기를 격추하는 쪽이 훨씬 인정받아요.”
“그러면 전투기를 잔뜩 격추하고 인정받은 남자를 찾아보세요. 저는 귀신이나 잡겠습니다.”
“고집이 세시네요.”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내가 그녀에게 건 최면술은 ‘괜찮은 남자를 찾아라.’라는 것이다. 콕 찍어서 ‘강문수를 찾아라.’가 아니었다.
즉, 이 행동은 그녀의 개인적인 판단과 집착이리라.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저는 살면서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못 넣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잘됐네요. 이 기회에 포기하는 법을 배우세요.”
“얕보지 마세요. 저는 약혼자의 외도를 눈치챈 뒤에도 1년 넘게 참았어요.”
“...그건 대단하네요.”
송선영이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나였다면 1초도 참지 못하고 폭주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네요. 사관학교는 포기할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졸업하려면 시간도 걸리고...”
“저를 포기하세요. 얼마 전에 결혼한 유부남입니다. 속도위반해서 아이도 곧 태어나고요.”
“아이요? 그건... 확실히 곤란하네요.”
강문수 2세가 곧 태어난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던 걸까. 유부남을 끈질기게 설득하던 소녀가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삑- 철컹.
그때, 면회실의 문이 열리면서 방탄유리 너머로 지미 로리쿤이 들어왔다. 그는 소녀를 보자마자,
“나르시아! 용서해줘!”
사형 선고가 떨어져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의 얼굴은 마음고생으로 반쪽이 되어 있었다.
검귀들이 꿈의 세계에 침투하기 딱 좋은 상태.
질 수도 있는 전쟁에서 패배한 탓이 아니고, 겁도 없이 외도하다가 걸려서 죽게 생긴... 이유가 너무 병신 같아서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는 당신에게 볼일이 없어요. 아! 하루라도 빨리 총살형 당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긴 해요.”
“용서해줘!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강문수 씨. 저는 이 남자가 징징거리는 게 듣기 싫으니 잠시 나가 있을게요.”
휙~
안 그래도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알아서 면회실 밖으로 나갔다.
“...당신은 뭐야? 변호사인가?”
라누벨 환자는 약혼녀가 떠난 뒤에야 포기하고 나를 돌아봤다.
“무당입니다.”
“무당...?”
“신성로마제국에서 당신을 치료해달라는 의뢰를-”
탕!
너무 놀란 지미 로리쿤이 방탄유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어떻게 그걸 알지?!”
“최고의 천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엘몰랑스 공과대학 졸업. 이후에 적성에 맞춰서 우주선 정비공으로 활동...”
“어떻게 아냐고...!”
“진정하세요, 로리쿤 씨. 흥분해서 난동 부리면 면회가 취소됩니다.”
“......”
털썩.
내가 지금까지 상대한 라누벨 환자 중에서 객관적으로 가장 똑똑한 그가 이해하고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P의 목숨으로 협박하는 익귀들이랑 이 세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여기서 꿈이 깨져버리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가 사라지면서 백지가 돼버린다. 그리고 위협을 느낀 익귀들은 다시 숨어버리겠지.
그건 곤란하다.
“최강의 전함이 갑자기 폭발해서 패배했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지만.”
자기 목숨이 이 대화에 걸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지미 로리쿤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당신에게 승리만을 안겨줬던 전함은 그냥 폭발한 게 아닙니다. 검귀... 당신이 절망하길 원하는 악마의 소행입니다.”
“악마...?”
“의심하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당신의 비밀을 전부 아는 저를.”
“......”
“......”
나는 서두르지 않고, 라누벨 환자가 생각할 시간을 줬다.
‘귀찮네.’
면회실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전부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번거롭더라도 살짝 왜곡했다.
소리는 음파니까.
그리고 이 일대는 나의 세계.
음파를 조작하는 건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지금도,
(무당입니다.)
(무당...?)
(신성한 제국에서 당신을 치료해달라는 의뢰를-)
(어, 어떻게 그걸 알지?!)
(최고의 천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사관학교를 졸업. 이후에 적성에 맞춰서 우주선 함장으로 활동...)
(어떻게 아냐고...!)
(진정하세요, 로리쿤 씨. 흥분해서 난동 부리면 면회가 취소됩니다.)
(......)
외부에는 이런 식으로 살짝 왜곡된 소리가 출력되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내가 소녀를 신경 쓴 이유는?
말하는 입 모양의 불일치까지는 어찌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제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그는 이성적으로 살 궁리부터 했다.
“현재로선 없습니다.”
“그런...!”
“하지만 저에게 호감이 있는 아가씨에게 부탁할 순 있습니다. 사형만은 보류해달라고. 면회실까지 동행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겠죠?”
“사귀는 사이입니까?”
“아뇨. 당신을 돕기 위해 오는 길에 처음 마주쳤습니다. 2시간쯤 전에.”
“2시간...?”
“네.”
“...능력이 좋으시네요. 나르시아는 남성을 고르는 기준이 굉장히 까다로운데.”
“그런 것 같더군요.”
하지만 자기가 고른 남자를 바꾸지 않는 고집과 집착도 있었다.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구질구질하게라도 살고 싶었던 그는 묻거나 따지지 않고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보냈다.
나로선 잘된 일!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우리는 날갯짓 한 번이면 우주 끝까지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악마를 잡을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못 잡으면 당신은 사형입니다.”
“꼭 잡아야겠군요!”
똑똑한 사람은 대화가 편하군.
“하지만 이 악마들은 똑똑합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천적인 제 앞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잡습니까? 순식간에 우주 끝까지 도망칠 수 있는 악마를...”
“악마가 노리는 것은 절망에 빠진 당신의 영혼입니다.”
악마!
앞으로는 나도 ‘익귀’가 아닌 ‘악마’라는 표현을 써야겠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악마’가 라누벨 환자에게 설명하기 편하니까.
“...미끼?”
“정답. 당신은 악마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될 겁니다.”
“위험합니까?”
“지금처럼 사망 확정은 아닙니다.”
“그러면 할 수밖에 없군요.”
비굴하기만 했던 지미 로리쿤의 얼굴에 강렬한 의지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라누벨 환자가 된 게 이상할 정도로 멀쩡한 인간이랄까?
상대평가가 참으로 무섭다.
* * *
환자가 악마의 습격으로 살해되지 않으려면 내 옆에 붙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악마가 눈치채고 달아나기 때문에 그를 옆에 둘 수 없다.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
그래서 예쁜 원주민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제가 왜 돕죠?”
면회실 밖에서 왜곡된 정보를 듣고 대략적인 계획을 짐작한 나르시아.
내 부탁에 그녀는 바로 삐딱한 태도를 보였다.
“그가 풀려나는 게 싫습니까?”
“당연하죠. 그가 제 은밀한 부위를 만진 소감을 떠벌리거나, 다른 여자랑 비교한다고 상상해보세요. 강문수 씨라면 견딜 수 있겠어요?”
“어... 어렵겠네요.”
나도 ‘내 성검(聖劍)’이 못났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비교당하고 싶진 않다.
‘어떻게 설득하지...?’
내가 역으로 그녀에게 설득돼서 지미 로리쿤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경의 변화랄까?
나도 유부남이 되면서 이런 부분에 민감해진 것 같다.
“지미 로리쿤은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인간으로 만들 거예요. 제 인생에서 확실하게 지워버리기 위해!”
“......”
그녀는 황제보다 발언권이 강한 총리의 딸이다. 그녀가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
지미 로리쿤에게 죄가 없다면 또 모르겠는데, 죄가 너무 명백해서 구해낼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소녀가 도둑고양이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운을 뗐다.
“하지만?”
“강문수 씨가 제 불명예를 지워준다면 그 쓰레기를 살려줄 의향은 있어요.”
“아하!”
나르시아 엘베레스트가 불륜을 저지른 약혼자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
조금 유명한 전투기 조종사(여성)에게 밀렸다는 불명예 때문이다.
그 불명예만 지워주면 용서하겠다고?
내가 판사는 아니지만, 그녀가 상당히 양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흠...”
지금까지 나는 이 소녀에게 약점 잡힌 게 없었다.
하지만 ‘지미 로리쿤’이 문제!
다른 꿈이었다면 이 제안을 깔끔히 무시했겠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기회가 또 올까?’
여기서 그 기생충들을 놓치면 P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나의 기분만으로 그런 도박을 할 순 없었다.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드릴까요?”
“...아뇨. 이미 결정했습니다.”
“어머! 빠르시네요.”
이미 내 결정을 안다는 듯이, 소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불명예를 씻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어떻게요? 곧 아빠가 되시잖아요?”
소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영웅의 주위에는 미녀가 꼬이는 법이라고.”
영웅?
나에게는 유부남이 되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다.
“후후! 맞아요. 영웅의 여자! 제가 바라는 미래에요.”
악마의 간섭으로 몰락하기 전의 지미 로리쿤은 그녀가 바라는 영웅에 가장 근접했으리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뭘요?”
“저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머! 농담이시죠? 내 이름은 나르시아 엘베레스트. 88개 식민행성을 둔 제국의 보석입니다. 강문수 씨야말로 저에게 망신 주지 마세요.”
“그러면 됐습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고, 백 명을 죽이면 정신병자다. 그리고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고...
그렇다면 1억 명 이상은?
그런 ‘의지가 있는 재앙’은 신(神)이라고 칭해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