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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10화 (211/232)
  • 210화

    “저는 나르시아 엘베레스트. 엘베레스트 제국의 총리이신...”

    내 소개가 끝나자마자 소녀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다.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범상치 않은 미모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는데,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규칙이지!’

    여자가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젊고 예뻐야 한다. 아니면 성공한 후에 성형으로 외모를 바꿨던가.

    외모보다 마음씨?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게임...

    남성향이든 여성향이든, 평범한 외모의 여주인공이 전혀 없다는 사실만 봐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지미 로리쿤의 약혼녀, 맞지요?”

    강력한 우주함대로 수많은 행성을 식민지로 만든 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총리의 막내딸!

    제국 내에서 맹활약하며 입지를 탄탄히 쌓고 있는 언니, 오빠들처럼 뛰어난 적성은 아니지만, 외모 하나는 ‘우주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외모는 개인의 취향?

    그건 맞지만, 그녀의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수만 있으면 인생이 바뀐다. 이런 배경이면 자신의 취향은 사소한 반찬 투정밖에 안 된다.

    “25일 8시간 전까지는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는 라누벨 환자랑 파혼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할 만큼 신경 쓰고 있었다.

    “패배한 영웅의 씁쓸한 최후군요.”

    “농담하지 마세요. 패배?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지미 로리쿤이 지금까지 쌓아온 공적과 승전 횟수를 고려하면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흠집이니까요.”

    “그러면 왜...”

    “내연녀.”

    “아!”

    “그건 못 참죠.”

    서민으로 태어난 나하고는 이런 부분에서 사고방식이 전혀 달랐다. 전쟁의 패배로 죽은 수많은 사람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니까.

    따뜻한 객실에 서리가 몰아치는 착각이 들 만큼 냉랭한 어조로 그녀가 계속 말했다.

    “둘이 친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도 영웅의 주위에는 미녀가 꼬이는 법이니 이해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그는 정도를 벗어났어요.”

    그런 상황에서 패배까지! 더는 영웅이 아니게 된 약혼자의 ‘외도’를 이해할 필요가 사라졌다.

    즉,

    ‘내 말이 맞잖아?’

    패배한 영웅은 여러 여자를 가질 권리를 박탈당했다.

    “사람들이 뒤에서 절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얼굴만 예쁜 바보래요. 남자 볼 줄 모른다고.”

    “정말로 바보로군요.”

    “...제 면전에 대고 말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총리의 딸이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소문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당신이 바보라는 겁니다.”

    “당신도 바보로군요. 악담한 사람들을 싹 잡아서 죽이라는 건가요? 머리를 다치셨나요?”

    “...죽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잡으란 말도 안 했고요. 아가씨가 증명해야죠. 남자 보는 눈이 있음을.”

    “바로 다른 남자를 찾으라고요? 저를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창녀 취급하시면 곤란해요.”

    “그건 천성입니까?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시는데, 안 찾아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

    나의 완벽한 반론에 아가씨의 도톰한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나머지는 알아서 생각하시고, 신분증이나 하나 만들어주세요.”

    “제가 왜...”

    “만들어주세요.”

    “...네. 그거야 명령 한마디면 되죠. 잠시만 기다려요.”

    말로 좋게 부탁했는데, 결국에는 최면술을 쓰게 만들었다.

    “직업은 아가씨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호위로 해주세요.”

    “...네. 제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호위로 설명해둘게요.”

    “감사합니다.”

    시작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평범한 마을이나 도시... 하다못해 사막 위에서 시작했다면 가장 가까운 주민센터에서 신분증을 발급받았을 것이다.

    어떻게?

    기억상실이란 설정은 모든 개연성을 이기는 만능이다.

    “끝났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을 곤란하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네.”

    그녀가 나를 신경 쓰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걸었다.

    “이만 가볼게요. 지미 로리쿤보다 멋진 남자를 찾고 오명을 벗길 빕니다.”

    “잠시만요. 신청은 끝났지만, 등록이 아직이에요. 홍채 인식, 지문 인식,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해요.”

    “유전자 검사?”

    “피를 뽑아야 해요.”

    “아하!”

    갑자기 내 유전자를 검사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네.

    “곧 사람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

    “그동안 저는 샤워를...”

    스윽-

    이 아가씨가 내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요! 저를 너무 신경을 안 쓰시는데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남자로는 생각해주세요.”

    “...꺅?! 얼른 고개 돌려요!”

    “네. 죄송합니다.”

    안일하게 최면술을 걸면 안 된다는 교훈을 기분 좋게 배웠다!

    ‘우주 최고로 불릴 만하네.’

    물론, 나에게 아양 떨던 여신(女神)을 능가할 순 없었다. 상대는 신(神)이니까. 하지만 여신은 비굴한 노예 같은 태도 때문에 ‘이성’으로 보이진 않았었다.

    반면에 이쪽은?

    손끝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순도 100% 소녀!

    ‘거참.’

    유부남이 되자마자 이런 시련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촤아아-

    그녀가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물에 촉촉하게 젖은 송선영을 떠올린 건 내가 음란마귀 중증이기 때문일까?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다.

    “음?”

    그녀가 머무는 고급스러운 객실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 아니군.

    그 모두가 안드로이드, 인간의 탈을 쓴 기계였다.

    ‘곤란한걸.’

    익귀들을 몰살시키고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는데, 최면술이 안 통하는 저것들 때문에 힘들 것 같다.

    끼잉-

    안쪽에서 잠근 문이 기습적으로 열리면서 중무장한 안드로이드들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꼼짝 마라!”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순순히 항복해라!”

    순식간에 포위망을 짜고 총화기의 총구를 나에게 조준한 기계들.

    명령권자만 제어하면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상대는 명령만 따르는 평범한 기계장치가 아니었다.

    인공지능.

    의지를 가진 사람처럼 자율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편의점 사장님의 말씀이 떠오르네.’

    현실의 육체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말은 절반만 맞다. 이 인공지능들은 인간에게 ‘자율적인 판단’을 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거니까. 태어난 순간부터 자유로운 의지가 있었던 인간이랑 시작점이 다르다.

    아무튼,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여러분은 아가씨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했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십시오.”

    “마지막 경고다. 10초 안에 머리 위로 손을 들어라.”

    “이 경고를 무시하면...”

    댕강!

    빽빽한 포위망을 한걸음에 빠져나온 후에 발렌타인으로 머리를 벴다.

    “공격!”

    “쏴!”

    기계답게 당황하지 않고 나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두두두! 두두!

    과거의 나였다면 피하지 못했겠지만,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배운 지금의 나에게는 가소로웠다.

    ‘안 되지.’

    익귀처럼 어디든지 순식간에 이동할 순 없지만, 나의 세계에 잠식된 영역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다만,

    “큭?!”

    내가 다음에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하고 허공에 총질하는 인공지능!

    놈들의 그 미친 계산력과 빠른 대응에 살짝 질려 버렸다.

    스르륵-

    내 내장을 휘저으며 옆구리에 박힌 총알이 서서히 빠져나왔다. 일반인이었다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상!

    그러나 나를 죽이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했다.

    ‘화력이 약하네.’

    여기가 우주이기 때문이리라. 잘못 쏴서 벽에 구멍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스치기만 해도 사람을 가루로 만드는 공상과학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 그건 더 위협이 안 되려나?

    순수한 과학의 산물이 아니면 나에게 통하지 않으니까. 평범한 기관총이나 미사일이 훨씬 위협적일 것이다.

    댕강! 댕강! 댕강...!

    기계라서 조심했었는데, 폭발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부터는 발렌타인으로 거침없이 베어줬다.

    “당장 열어!”

    “아가씨. 밖은 위험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댕강!

    샤워실의 문을 점거한 녀석까지 깔끔히 처리했다.

    “당장 문을 열- 꺅?!”

    안 열리는 샤워실 문을 향해 힘껏 돌진한 소녀.

    이젠 열린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문을 통과해서 내 품에 깊숙이 안겼다.

    “...아가씨. 유부남에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깜빡? 깜빡!

    내 눈짓을 받은 SSS급 눈깔이 촉수를 활용해서 벽에 걸려 있는 마른 수건을 잽싸게 건넸다.

    휘리릭~

    나는 수건으로 소녀의 알몸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감싸줬다.

    “가, 감사합니다.”

    “멍청한 기계가 오작동한 모양이네요.”

    “...네.”

    너무 똑똑해서 생긴 오작동이랄까!

    거실은 인공지능들이 사정없이 쏜 총탄에 다 부서져서 멀쩡한 물건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가 나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도록 최면술로 깔끔히 마무리!

    완벽하다.

    “아가씨! 무사하- 헉!”

    “무슨 일- 헙! 죄송합니다!”

    “저는 못 봤습니다!”

    소란을 듣고 뒤늦게 몰려온 인간 호위병들이 식겁하며 도망쳤다.

    막 샤워한 소녀의 무방비한 모습을 계속 구경할 만큼 배짱이 두둑한 자는 이곳에 없었다.

    총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암살당할 수도 있다!

    “거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피해자가 더 늘지 않도록 소녀의 복장부터 바꾸기로 했다.

    * * *

    “세상에...”

    거실에 부서진 채 널브러져 있는 기계들을 본 소녀가 경악했다.

    “오작동한 모양입니다.”

    이미 최면술을 걸어두긴 했지만, 불안해서 한 번 더 했다.

    “이 많은 호위병을 혼자서 다 쓰러트리신 건가요?”

    “네. 다짜고짜 침입해서 적의를 보이기에 싹 처리했습니다.”

    “...1기가 보병사단 전투력을 보유한 인공전사 십여 기를 일방적으로요?”

    “네.”

    이 안드로이드들을 ‘인공전사’라고 부르는군?

    이 세계에서 머무는 동안, 자주 마주칠 것 같다는 예감을 진하게 받았기에 기억해두기로 했다.

    깜빡~

    물론,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이 녀석에게 걸리면 인공전사의 단단한 몸도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지만.

    “당신은 누구죠?”

    “무당입니다.”

    “무당... 모든 무당은 당신처럼 이렇게 강한가요?”

    “네. 진짜 무당이라면. 저는 정말 약한 편입니다. 제 선배는 정말로 못 하는 게 없으니까요.”

    선배에게 성장한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아쉽다.

    “저를 호위하는 것 말고도 목적이 있으신 거죠?”

    최면술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정확히 짚어냈다.

    나의 목적.

    최면술이 안 통하는 인공지능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본 이상, 그녀의 도움을 좀 더 받기로 했다.

    “네. 지미 로리쿤의 몸에 숨어있는 귀신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에게?”

    “귀신 때문이 아니면 무당이 우주에 올 이유가 없잖습니까?”

    “제 호위는요?”

    “...그것도 당연히 중요하죠.”

    내가 걸어둔 최면술에 내가 발목 잡힌 기분이 들었다.

    “강문수 씨. 조금 전에 저에게 다른 남자를 찾아보라고 하셨죠?”

    “네.”

    “괜찮은 무당을 소개해주세요.”

    “여자라면 제법 아는데, 남자 무당은 제가 유일합니다.”

    “그래요? 정말 아쉽네요. 괜찮은 남자가 당신뿐이란 말이죠?”

    “......”

    앞으로 최면술을 쓸 때는 최소 3번은 생각하리라.

    명령을 덮어씌우면 될 것 같지만, 내 최면술을 내가 이겨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빠져서 어렵다.

    “제가 도와줄게요.”

    “오! 정말요?”

    하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곧 사형될 지미 로리쿤을 만나게 해주면 되나요?”

    “사형입니까?”

    “네. 전쟁 패배의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하니까요.”

    “그간 쌓은 공적은요?”

    “...라는 건 명분이고, 제 알몸을 남편도 아닌 남자가 보고 만졌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요.”

    “아, 네.”

    그러면 나는?

    내가 의도해서 보고 만진 건 아니었지만, 매우 찜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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