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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09화 (210/232)

209화

“왔어?”

“네.”

이젠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어제 결혼했는데, 하루도 온전히 못 쉬는구나.”

“그러게요.”

결혼식장에서 만나고 24시간도 안 지나서 또 만난 서혜주 원장. 우리는 짧은 인사만 주고받고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휙~

그녀는 제법 양이 되는 서류를 나에게 내밀었다.

“환자는 30분 정도 지나면 올 거야. 그동안 보고 있어.”

스윽-

대충 훑어봐도 뭔지 알 수 있었다.

“이번 환자의 자료네요? 제국에서 준비해준 건가요?”

“맞아.”

어머니에게 마녀의 기술을 배운 뒤부터 환자의 사정 따위 무시하고 곧바로 찾아낼 수 있게 됐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

내가 당하고, 또 당하고, 지겹게 당하면서 배운 교훈이다.

「이름: 지미 로리쿤(29세)」

「주거지: 신성로마제국 우주과학단지」

「적성: 우주선 정비공」

「취미: 영화 감상(공상과학 선호)」

「이력: 엘몰랑스 공과대학 졸업...」

“...엘리트잖아?”

선조들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자원이 곧 고갈되는 지구.

P의 적성검사기로 뽑힌 ‘올바른 정치인’들이 애쓰고 있지만, 이미 멸종한 동식물과 사라진 빙하 등은 단시간에 복구하는 게 불가능했다.

결론은 우주로!

그래서 적성에 ‘우주’가 들어가면 반쯤은 성공한 인생이란 공식이 생겼다.

“행복은 상대적이니까.”

먼저 읽어본 서혜주 원장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경험담이신가요?”

“음... 맞아. 하지만 원장이 된 지금은 만족하고 있어. 꿈속의 나보다 일찍 성공했고, 마음껏 연구할 수 있잖니?”

“아아, 그쪽에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으셨군요.”

“나의 경쟁자는 나밖에 없더라고.”

“힘들겠네요.”

여자가 거울이랑 누가 더 예쁜지 시합하는 거나 다름없다.

“먼저 읽어본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들어볼래?”

“좋습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여학생을 휘어잡고 살던 잘생긴 남학생이 방송국에 가면 어떻게 될까?”

“흔한 남자가 되버리죠.”

방송국에는 전국의 배우, 가수, 연예인 등의 잘생긴 남자가 다 모이니까.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쁜 미모로 아쉬울 게 없는 그녀들이 굳이 콧대 높은 남자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밖에 나가면 자기를 떠받들어주는 남자가 발에 치일 만큼 넘쳐나니까.

즉, 미남과 미녀도 방송국 안에서만큼은 모두가 평범하다.

“맞아. 우주도 똑같아.”

“흠... 안타깝네요.”

주거지부터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우주과학단지.

이웃들마저 전부 ‘우주’랑 관련된 사람들이다. 이러면 직장 밖에서조차 평범한 기분이 들 터.

중학교에서 전교 1등 하던 학생이 부모의 욕심으로 천재들만 다니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꼴찌로, 급기야 공부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 사연도 있었다.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원장님.)

원장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나요?”

(네. 예정대로 1301호실로 이동하겠습니다.)

“금방 갈게요.”

뚝.

스피커가 조용해졌다.

“30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내비게이션이 틀릴 정도면 우리의 예상보다 상황이 훨씬 위독하다는 거겠지.”

“......”

위독인가?

P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까?”

“네.”

적성검사기 하나로 세상을 지배하는 신(神)이 죽어간다는 소식.

너무 현실성 없이 들려서 내가 안일했던 게 아닐까?

마음을 다잡고 병실로 향했다.

* * *

라누벨라의 본거지가 신성로마제국인 만큼 이번 환자는 그쪽의 병원에서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그런 라누벨라의 보호 아래에 꿈속에서도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내연녀가 죽었어요.)

그를 담당했었던 황녀가 수화기 너머로 한숨 쉬며 말했다.

“어쩌다가요?”

(저 같으면 내연녀가 왜 있는지부터 물어봤을 텐데요. 당신은 내연녀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남자인가요?)

“...왜 생겼는데요?”

어제 유부남이 된 나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황녀!

역시, 이 여자랑 대화하면 나만 매번 손해 본다.

(국가원수의 여식인 약혼녀를 전쟁터까지 데려올 순 없으니까요.)

“...그게 이유입니까?”

(불륜에 거창한 이유를 예상했나요? 제국의 광장에 알몸으로 매달리는 자들에게 물어보면 99%는 이유가 하찮아요.)

“아, 네.”

애초에 시시한 이유였으면 나에게 ‘내연녀’에 대해 더 아나 물어보느냐는 식으로 말하질 말던가.

억울했다.

(그 내연녀는 적국에서도 인정한 천재 전투기 조종사. 하지만 그의 정비 실수로 그녀가 죽고 말아요.)

“적성이 정비공인데도요?”

(꿈속에서의 그의 직업은 우주전함의 함장입니다.)

“아!”

(정비는 손도 대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연녀에게 점수 따려고 잘난 척하다가 사고가 난 거죠.)

“...최악이네요.”

검귀는 주인공(환자가)이 안정된 꿈속에는 침투할 수 없다. 파고들 균열이 생기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어떤 사건을 계기로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면, 한두 마리 정도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

(평범한 검귀가 침투했다면 금방 처리됐을 거예요. 놈들은 순수한 총화기에 매우 취약하니까요.)

“아니었군요.”

(네. 지혜를 가진 검귀. 7세와 8세는 악마라고 불러요.)

악마.

내가 붙인 ‘익귀’보다는 훨씬 직관적이고 대중적인 용어로군.

아무튼,

“놈들이 거기서 판을 키운 후에 저를 초대했다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흠...”

(구국의 영웅이었던 주인공은 악마의 훼방으로 최강의 전함을 잃고 연전연패한 끝에 국제재판소에 수감됐어요.)

“그 규칙은 어디나 똑같군요. 이기면 영웅, 지면 살인마.”

(보안을 위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제가 당신에게 따로 해줄 수 있는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강문수 씨, 무운을 빌어요.)

“네? 아, 네!”

뚝.

황녀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서 깜짝 놀랐다.

‘자... 그러면...’

침대에 곤히 누워있는 라누벨 환자 ‘지미 로리쿤’을 힐끔 보았다.

배우나 가수만큼의 조각 미남은 아니었지만, 정비공에게 불필요한 잘생긴 얼굴과 체형이 돋보였다.

여기에 머리도 좋단 말이지?

그가 자신의 적성에 만족 못한 이유가 조금은 이해됐다.

톡.

지미 로리쿤의 얼굴을 내 머릿속에 담아둔 후, 그의 손등을 가볍게 건드리며 꿈속에 난입했다.

* * *

어머니에게도 들었지만, 꿈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모형 상자다.

현실처럼 광속으로 수백만 년을 날아가도 끝에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우주를 전부 표현하고 있진 않으니까.

다만,

“와우?”

장르가 우주를 소재로 한 공상과학이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말도 안 되게 넓은 배경.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판타지나, 괴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헌터물 등은 소꿉놀이로 보일 만큼 통이 컸다.

‘시작부터 우주네?’

황녀는 여기가 재판을 기다리는 지미 로리쿤이 수감된 국제재판소라고 했다.

즉, 교도소인 셈인데...

흉악한 범죄자가 득실거리는 살벌한 장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구처럼 생긴 행성 위에 떠 있는 우주정거장 느낌.

익귀랑 예고한 약속 시간은 세계가 붕괴될 만큼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 직후라고 했다.

“일단은 평화롭단 말이지.”

안 보이는 행성 뒤편에서 치열하게 전쟁 중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서두르지 말고 상황부터 파악하자.

탁.

한 걸음 내디디며 나의 세계를 넓게 확장했다.

‘진짜로 있네?’

환자의 위치가 바로 파악돼서 허탈했다.

너무 편리하잖아!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격언. 그것을 지금까지 몸소 실천한 나로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허허... 거참...”

“누구냐!”

“무시하고 지나가세요.”

“...네.”

나를 수상하게 쳐다보며 심문하려던 행인A가 얌전히 지나갔다.

“최면술도 편리하고.”

내가 이 세계의 신(神)이 된 기분이다.

“누구십니까?”

“무시하고 지나가세요.”

하지만 일일이 최면술을 걸기 번거롭기에 신분증을 발급받아야 할 것 같다.

“등록되지 않은 홍채입니다. 신분증을 제시해주십시오.”

“음?”

내 최면술이 안 통해?

나는 조금 전까지 엑스트라로 취급한 행인B를 돌아봤다.

‘...아!’

바로 눈치챘다.

“마지막 권고입니다. 신분증을 제시해주십시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와 표정. 그리고 심장의 고동 대신 미세하게 들리는 기계음이 결정적이었다.

사람의 탈을 쓴 인공지능!

순수한 기계였기에 내 최면술이 통하지 않았다.

‘아아, 그랬군.’

익귀들이 이 세계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를 방금 깨달았다.

무력화.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이곳은 검귀에게 위협적인 만큼, 나에게도 불편함 이상의 제약이 걸렸다.

“나의 신분은...”

이 인공지능이랑 싸우는 건 하책이다.

여긴 우주니까!

웬만한 소행성 크기의 이 우주정거장이 파괴되면 나도 무사하기 힘들다. 도망칠 곳도 없고!

“10초 안에 답변해주십시오.”

“보채지 마세요.”

“6초 남았습니다.”

인내심 없는 인공지능이네!

“...저기! 저 숙녀분이 제 신분을 보장해줄 겁니다.”

우리의 근처를 지나가는 소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름? 나이?

성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것으로 보아선 평범한 신분은 절대 아닐 터.

그녀라면 내 신분을 대신 보증해줄 수 있을 것이다.

“확인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네.”

나는 얌전히 인공지능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나르시아 아가씨. 아주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죠?”

그녀가 멈추자 앞뒤로 호위 중인 모두가 발걸음을 세웠다.

“이 남자를 아십니까?”

“...네. 알아요.”

“기록을 남겨야 하기에 간략하게 설명해주실 수...”

“아가씨는 바쁩니다.”

꼬리가 길면 밟힐 수 있기에 나는 슬쩍 끼어들었다.

“...네. 저는 지금 바빠요. 그러니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나의 최면술에 걸린 소녀는 앵무새처럼 내 말을 따라 했다.

이것이 나의 한계.

어머니에게 배운 마녀의 최면술을 흉내 낼 순 있지만, 숙련도가 부족해서 섬세한 조종은 불가능하다.

“알겠습니다. 바쁜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꾸벅.

인간의 탈을 쓴 인공지능이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고는 떠났다.

그 뒤에는?

“아가씨. 호위로 동행하겠습니다.”

“...네. 호위해주세요.”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소녀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

“......”

당연한 얘기지만, 나를 수상하게 생각해야 하는 다른 호위들도 최면술에 걸려서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명부를 작성해주십시오.”

호위병 중에 섞인 인공지능만은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봤다.

첨단기술! 인공지능!

최면술이 안 통해서 번거롭다.

“아가씨. 정말로 바쁘십니까?”

“...조금 전까지는요. 지금부터는 방에 들어가서 쉴 생각이에요.”

“저만 마지막까지 호위하겠습니다.”

최면술의 단점.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 탓에 지금 흐지부지 헤어지면 이상함을 눈치채고 신고할 터. 숨을 곳도 없는 우주 한복판에서 그건 곤란하다.

‘망할 익귀 녀석!’

장소 하나는 제대로 골랐군!

나를 힘들게 할 생각이었다면 성공한 셈이다.

“...네. 당신만 마지막까지 절 호위해주세요.”

이번에도 소녀가 앵무새처럼 대답하며 호위들을 하나둘 물렸다.

“아가씨, 편히 쉬십시오.”

“외출하실 때는 꼭 말씀해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숙녀의 방까지 따라가는 나를 수상하게 바라보는 인공지능 호위병들!

그러나 명령권자인 소녀가 허락한 일이라서 제지하진 않았다.

찰칵.

귀빈을 위한 객실처럼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에 단둘이 남았다.

“아가씨는 누구세요?”

“...질문이 너무 포괄적인데요. 당신이야말로 누구시죠? 아는 것 같은데, 전혀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당연하다. 안다고 내가 착각하도록 최면술을 걸었을 뿐이니까.

내가 누구냐고?

그거야 쉽지!

“강문수. 직업은 무당입니다. 최근에 추가된 특성은 유부남이고요.”

정말 완벽한 자기소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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