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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07화 (208/232)
  • 207화

    길고도 길었던 동계 올림픽 일정을 마치고 마침내 귀국!

    비행기에서 내리고, 간단한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나설 때까지 사람의 벽에 막혀서 움직이질 못했다.

    “강문수 씨~!”

    “잠시만 인터뷰 좀...!”

    “비결이 뭡니까?”

    피메달은 상금보다 명예와 인지도가 매우 크다. 다른 나라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피메달 수상자는 아니까.

    그 인지도를 활용해서 광고나 방송 계약을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돈이라면 이미 스포츠토토로 잔뜩 벌었기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나는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우선순위는 송선영이랑 사귀기 시작하면서 한 번 바뀌었고,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듣고 또 바뀌었다.

    “몸은 어때?”

    “걱정도 적당히 해. 이걸로 87번 물어보는 거야.”

    “하지만... 걱정되는걸.”

    그녀의 임신 사실을 전혀 몰랐던 나는 하나뿐인 성검(聖劍)으로 열심히 찔러댔으니까.

    우리나라 여성이 임신 초기에 유산하는 비율이 20%나 된다는 사실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 잘 붙어있어.”

    “하지만...”

    “정 걱정되면 사고나 치지 마. 점점 예민해지는 기분이니까.”

    “네.”

    세상은 나를 ‘피메달 수상자’로만 생각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였기에 솔직히 조금 짜증 났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저들에게 중요할 리 없지.’

    그나마 발 빠른 사업가는 나보다 송선영을 조명하며 ‘임산부 의상 모델’을 제안하기는 했다.

    결국은 돈이 돼야 관심을 보인다는 거겠지.

    이해한다. 이해만!

    “강문수 씨.”

    정부에서 붙여준 수행원이 그런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네. 아무런 일정도 잡지 말아주세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한 나는 듣기도 전에 거절했다.

    “어흠! 아빠가 되는 기분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 주인공이 얼굴을 안 비치는 건 좀...”

    “저에게 금메달을 빼앗기신 분들도 있는데, 굳이 그 불편한 자리에 갈 필요가 있습니까?”

    “짐작되는 분이 한 명 있지만, 안 오실 예정입니다.”

    우리나라는 구시대보다 훨씬 오랜 옛날부터 ‘양궁’이란 종목에 ‘태권도’만큼이나 강했으니까. 그래서 이번 올림픽도 금메달은 확정이나 다름없었는데, 내가 끼어들면서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금메달과 은메달.

    1등과 2등.

    겨우 한 걸음 차이지만, 사람들은 1등만 기억한다.

    “배구 때문에 기분 상해서 가고 싶지 않네요.”

    “그, 그건... 흠...”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돼버린 배구 감독 승부 조작 사건!

    올림픽이 끝나고 스포츠토토의 배당금이 통장에 입금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타오르고 있었다.

    체육부 장관 해임.

    배구 협회장 사임.

    대통령 공식 사과.

    보통은 운이나 실력이 나빠서 졌을 뿐이라고 넘길 수 있지만, 배구 감독의 비이성적인 판단 정황이 너무 뚜렷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안 갑니다.”

    “강문수 씨가 불참하시면 그 일이 더 커집니다...”

    수행원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건 제가 알 바 아니고요. 오늘부터 결혼 준비하려면 바쁩니다. 남을 위해 할애할 시간이 없어요.”

    “다녀 와.”

    우리의 대화를 듣던 송선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핀잔을 줬다.

    “선영아, 들어봐. 출산 후에 결혼할 게 아니면 진짜 시간이 없어.”

    신부의 웨딩드레스는 임산부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건 결혼 경험이 있는 어머니의 조언이었는데, 하루라도 송선영의 배가 덜 부풀었을 때 결혼식을 치르는 편이 좋다.

    “그건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너는 결혼식 전에 잠들지나 마.”

    푹!

    비수처럼 꽂히는 한마디. 지은 죄가 많은 탓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끙...”

    “이해했으면 다녀와.”

    “나를 시기하는 인간이 집에 침투해서 해코지할 수도 있어.”

    “허락 없이는 쥐새끼 한 마리도 못 들어오는 육군사령부 관사에 침투해서 나를 해코지한다고?”

    “......”

    내가 말하고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표정 풀어. 예식장부터 신혼집, 혼수까지 내가 다 준비할 테니까.”

    “송선영 양. 나를 돈으로 매수할 생각이라면 포기해. 이젠 그 정도는 낼 수 있을 만큼 벌었으니까!”

    그녀에게 얻어먹는 날이 많았던 내가 드디어! 어깨를 당당히 펴며 말할 수 있는 위치까지 성공했다.

    올림픽은 종목마다 배당금이 다르고, 승마와 배구에서 돈을 잃는 고배를 들이켜긴 했지만, 올림픽 전보다 재산이 14배 나 불어났다!

    14배...

    나쁜 건 아니지만, 하계 올림픽의 200배 신화가 너무 아쉬웠다.

    “얼마나 벌었는데?”

    “14배.”

    “그러면 앞으로도 내가 너를 먹여 살려야겠네.”

    “음?”

    이건 무슨 소리?

    “이번에 또 돈을 벌었어.”

    “안 걸었다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송선영은 스포츠토토를 하지 않았다.

    “응. 그건 진짜야.”

    “그런데 어떻게 벌었어? 설마... 사설 도박장을...?”

    “그쪽은 배당금이 너무 크면 안 주고 잠적하는 피해 사례가 많잖아. 당연히 아니지.”

    “그러면 어떻게 돈을 벌었어?”

    “옛날에 돈을 좀 걸어뒀어.”

    “옛날?”

    학생 시절에 묻어둔 주식이 대박이라도 났다는 건가?

    “피메달.”

    “음?”

    “너도 알다시피 피메달은 하계 올림픽 개막식 전까지만 돈을 걸 수 있어.”

    “...설마?”

    검귀를 처음 보았을 때도 이처럼 놀라진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너에게 돈을 걸어뒀어.”

    “왜...?”

    나는 하계 올림픽까지만 해도 피메달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돈을 걸었다고?

    “네 이름으로 걸 수 있는 배팅 중에서 배당금이 가장 많았으니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아...”

    도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할 법한 초보적인 생각이었다.

    배당금이 많다는 건?

    가망이 안 보여서 아무도 돈을 걸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화냐?!’

    스포츠토토에 관심이 많은 나이기에 피메달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계 올림픽에 나갈 때만 해도 피메달은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총 12개의 종목 중에서 4가지만 나갔다.

    고작 넷.

    피메달을 노리는 선수들이 하계 올림픽에서 못해도 8종목 이상에 참가자 이름을 올리는 걸 고려하면...

    그 누구도, 심지어 나조차 피메달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 배...?”

    “법적인 최대 한도인 20,000배.”

    “......”

    나는 죽을 때까지 아내에게 용돈 받으며 살 팔자인 것 같다.

    * * *

    여자친구가 스마트폰으로 보여준 통장 잔액에 찍힌 동그라미의 숫자를 본 직후부터였을까? 나는 반쯤 넋을 놓은 채 축하장으로 이동했다.

    “강문수 씨, 같은 남자로서 정말 부럽습니다. 돈 많은 예쁜 아내. 모든 남자의 꿈이잖습니까?”

    내 옆에서 우연히 듣게 된 수행원이 운전하며 말했다.

    “아, 네... 그렇죠. 하하...”

    그녀가 200배를 벌었다고 했을 때도 매우 놀랐었다.

    그런데 20,000배?

    현실감이 너무 떨어졌다. 스포츠토토 규정이 아니었다면 피메달에 걸린 모든 돈을 쓸어 담았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강문수 선수! 사랑합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스포츠카로 바뀌는 마법!」

    「나도 아메리카노 한 잔...」

    「강문수 선수에게 돈을 못 걸게 막았던 내 남편. 진짜 죽이고 싶어요.」

    「내 등짝을 때렸던 마누라가 천사처럼 바뀐 사연.」

    “맙소사...”

    송선영처럼 진지하게 거액을 건 사람은 없었지만, 워낙 배당률이 높았던 까닭에 소액도 크게 돌려받았다.

    더 놀라운 점은?

    스포츠토토나 복권 등은 당첨돼도 세금으로 크게 뜯기는데, 송선영이 나랑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국가유공자 신혼부부 세금 면제’ 혜택을 받는다.

    언제까지?

    평생!

    연금 외에도 동메달은 1년, 은메달은 2년, 금메달은 3년, 피메달 수상자는 30년 동안 결혼 직후부터 세금 면제 혜택을 받는데, 이 기간은 누적되니까. 금메달을 집에 쌓아둔 나는 200년 가까이 세금 면제를 받는다.

    “강문수 선수?”

    “...아, 네.”

    머릿속으로 송선영의 예쁜 다리와 통장 잔액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올림픽 축하연의 사회자 부탁에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편하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면 됩니다.”

    내가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번에 눈치챈 사회자가 마이크를 떼고 소곤소곤 말했다.

    “아무거나요?”

    “올림픽이랑 관련된 이야기라면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흠...”

    올림픽이랑 관련된 이야기라?

    내 머릿속에는 ‘강문수 2세’로 가득했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 쥐어짜자면...

    “제 적성은 무당입니다.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저를 바라보는 바람에 취업은커녕 아르바이트조차 안 됐습니다. 정말 힘든 시기였죠.”

    “......”

    “......”

    내가 무슨 이야기 할지 예상한 몇몇은 벌써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 불편하시겠지.

    “P의 적성검사기는 인류사회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우리의 인생을 단정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는 건 바보죠. 그러나 적성을 응용할 순 있습니다. 기사도에서 귀신 대신 사람을 잡았던 저처럼.”

    “......”

    “......”

    나에게 귀신 대신 얻어맞으신 분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P는 여러분의 인생을 단정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P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나침판입니다.”

    나는 인류애가 넘쳐나는 조상님의 노력과 희생이 왜곡되는 현실이 싫다.

    P의 적성검사.

    그 의도는 좋았지만, 신분제도처럼 적성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가 돼버린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흠... 좋아.’

    내 말이 불편하신 분들도 있지만, 애초에 그들의 눈치를 볼 만큼 내 위치가 이젠 낮지 않았다.

    당당하게!

    가까운 미래에 ‘강문수 2세’가 인터넷에 박제된 아버지를 보며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상입니다.”

    “강문수 선수.”

    “네.”

    할 말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나를 사회자가 불렀다.

    또 뭐가 있나?

    “다음 올림픽 계획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를 이 자리에 세운 진짜 목적은 틀림없이 이것이리라.

    스윽-

    승낙의 의미로 다시 마이크를 쥐었다.

    “피메달 수상식에서 이미 예고했었는데요. 아들이 태어나면 또 나가고, 딸이면 본업인 무당에 집중할 겁니다.”

    “자녀의 성별로 미래를 설계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있습니다.”

    “현재, 근거 없는 소문이 커뮤니티에 떠돌고 있는데요. 이 기회에 속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요!”

    이 자리에서 P도 연관된 ‘마녀’를 언급할 순 없다.

    그러니,

    “제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아들에게는 멋진 운동선수로, 딸에게는 멋진 무당으로 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젠 끝났지?

    내 무언의 압력에 사회자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마지막입니다. 피메달을 수상한 국가 영웅이 아닌 인간 강문수로서 하고 싶은 말씀을 짧게 부탁합니다.”

    오! 그거라면 환영이지.

    송선영 덕분에 돈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무당’으로서 내 방침도 상당히 바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중한 가족이 귀신에 사로잡혀서 깨어나질 않으면 저를 찾아오십시오. 저렴하게 모시겠습니다.”

    “여기서 광고는...”

    “감사합니다!”

    올림픽도 끝났으니 이젠 내 본업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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