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11장-5절] 내가 강문수다!
하계 올림픽이 육상 마라톤으로 시작된다면, 동계 올림픽은 스케이트가 그 역할을 한다.
(동계 올림픽의 뜨거운 감자로 불리는 강문수 선수가 입장 중입니다.)
(마라톤, 수영, 육상, 태권도. 하계 올림픽에서 정말 믿기지 않는 기록을 세운 선수입니다.)
일반인보다 예민한 내 청각에, 경기 생중계를 맡은 해설진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종목만 출전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맞습니다. 하지만 금메달은 자신감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탓에 강문수 선수에게 배팅한 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첫 경기가 될 것 같네요.)
(경기, 시작됩니다.)
“준비...!”
심판의 지시에 따라 빙판의 출발선 위에 선수들이 섰다.
척, 척, 척, 척.
스케이트도 거리, 성별에 따라 종목이 다양하게 나뉘기에 금메달의 숫자도 상당한 편.
‘빠르면 장땡이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남들보다 빨리 달려서 여러 바퀴를 돌면 승리!
스케이트 국가대표 감독과 선수들은 남녀 2인씩, 총 4인으로 구성되는 혼성 릴레이에 나를 끼워 넣어서 금메달을 노려볼 의도겠지만, 나는 개인전도 놓칠 마음이 없었다.
띵-!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가즈아~!’
남들이 천천히 속도를 올릴 때, 나는 스케이트화의 날 옆면으로 빙판을 힘껏 밀면서 폭발적인 힘을 뽐냈다.
빙판이 심하게 손상되면 악의적인 부정행위로 간주하여 실격패 당할 수 있기에 조심, 조심...
쭈욱!
앞으로 치고 나아갔다.
(허업?! 저 속도는 대체 뭔가요?!)
(강문수 선수 선두! 출발부터 빙판 위를 지배합니다...!)
(다른 선수들이랑 거리가 좁혀지긴커녕 점점 벌어져요!)
(어느새 반 바퀴 격차!)
(강문수 선수! 압도적입니다! )
“와아아아!”
“와아아!”
관중석에서 환호와 함성이 터졌다. 나의 금메달을 의심하지 않고 스포츠 토토를 찍은 사람들이리라.
후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스포츠 토토는 올림픽 개막식이 시작된 순간부터 배팅을 변경하거나 환불, 취소가 안 되기에 어쩔 수 없다.
(저건 꼴찌가 아닙니다!)
(한 바퀴 차이! 올림픽에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강문수 선수, 뒤엉키지 않기 위해 속도를 조절합니다.)
(지친 기색이 전혀 없어요.)
(당연합니다. 빙판 위의 모든 종목을 싹쓸이한 후에 검도장으로 곧장 가야 하거든요. 벌써 지칠 수 없습니다.)
삐-
경쟁하는 선수들의 엉덩이를 억지로 보며 계속 돌다가 결승선을 통과했다.
(사고 같은 변수 없이 강문수 선수 1등으로 통과!)
(여러분, 저 숫자가 보이십니까? 예선전부터 세계신기록입니다.)
(압도적입니다. 무려 한 바퀴를 단축했으니까요.)
(저희는 짧은 광고 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 이게 대체...”
지켜보고 있던 스케이트 국가대표 선수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셨죠? 꼴찌 해도 상관없으니 릴레이 도중에 실격패만 조심해주세요.”
“...네.”
“아, 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음을 자각한 선수들은 얌전해졌다.
“잘 부탁합니다, 강문수 선수...”
나에게 3등만 해달라고 부탁한 ‘형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 잘 부탁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괴롭혀주고 싶지만, 심사가 뒤틀려서 고의로 실격패할 수 있기에 참았다.
선배, 보고 계십니까? 그 답답한 후배가 인내와 자비를 배웠습니다!
“...아! 맞다. 형님은 릴레이가 싫다고 하셨으니 제가 대신 나가겠습니다.”
“뭐-?”
“체력도 약한 녀석이 무슨 릴레이야? 네 개인전이나 잘해. 릴레이는 형님 대신 제가 뛰겠습니다.”
“형들, 잊으셨어요? 릴레이는 원래 제가 나가기로 했었잖아요.”
스케이트 릴레이는 총 3종류가 있다.
남성, 여성, 혼성.
하지만 나는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남성 릴레이는 양보. 혼성만 나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1자리를 놓고 선수들끼리 신경전이 벌어졌다.
혼성 릴레이에 나가기만 하면 금메달과 연금 확정이니까.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어흠. 강문수 선수.”
“아, 네. 감독님.”
혼성 릴레이에 나가면 된다고 통보식으로 대화 한 번 해본 게 전부인 스케이트 감독이 다가왔다.
“시간이 된다면, 남성 릴레이에 참가해줄 수 있습니까?”
“제가 참가하면 다른 선수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흠흠.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가가 예정된 선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부탁하게 됐습니다.”
“......”
나는 감독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부, 부탁합니다...”
자기도 너무 뻔뻔하다는 걸 인지한 감독이 항복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얼굴이 된 스케이트 감독. 나도 메달의 숫자가 늘면 연금이 더 풍성해지기에 내심은 좋았다.
이후,
딸랑~ 딸랑~
나는 스케이트 금메달 5개를 목에 걸고 검도장으로 향했다!
* * *
(여기는 올림픽 검도장입니다.)
(분위기가 매우 무겁네요.)
(그가 왔기 때문입니다. 태권도의 전설이 된 남자가 이번에는 검도를 제패하러 왔습니다.)
(검도는 태권도랑 다르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었는데요.)
(그 전문가의 예상이 맞길 기대해봅시다. 아니라면 태권도에 이어 검도도 초토화될 겁니다.)
어허! 초토화라니? 해설진들의 표현이 너무 지나치네!
나는 선배 같은 천재가 아니라서 선수들이 자신의 재능을 비하하는 정신병까지 몰아붙일 순 없다.
힘으로 찍어 누를 뿐!
“시작.”
탁!
예선전 첫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상대의 정수리를 죽도(竹刀)로 내리쳤다.
“아...?”
나의 움직임에 전혀 반응하지 못한 선수가 보호구 안쪽에서 황망해 하는 소리를 냈다.
“살살 했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내리치면 보호구가 있어도 무조건 뇌진탕! 꿈속에서 검도를 연습하며 확인한 사항이다.
“얕보지 마라...!”
탁!
얕보진 않는다. 사람을 죽이면 실격패라서 최대한 살살할 뿐.
“물론입니다.”
“......”
선배가 태권도에서 보여준 신묘한 몸놀림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나보다 한참 느린 선수들을 상대로 압승을 못 거둘 정도는 아니다.
탁!
점수가 가장 높은 정수리만 노골적으로 노렸다.
“제, 젠장!”
“진정하세요. 아무리 분해도 욕은 안 됩니다.”
“나를 놀리나...!”
“진심으로 하고 싶으시면 나중에 각서 쓰고 찾아오세요. 진검으로 상대해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목을 여러 번 잘라본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대나무로 만든 검은 어른용 장난감이다.
죽도로 어딜 때리면 몇 점?
기가 막힌다. 중세의 기사처럼 온몸에 철판을 두르지 않는 이상, 진검이었으면 어딜 맞든 치명상이다.
“얕보지-”
탁!
“......”
흥분하지 말고 빨리 끝냅시다!
(강문수 선수를 상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습니다...)
(속도가 너무 달라요!)
(지난 태권도 올림픽에서 선수들의 마음을 죽였다는 비난을 인식한 걸까요? 기교 없이 단순하게 찍어 누릅니다.)
(그게 더 잔인한 것 아닐까요?)
탁! 탁! 탁!
(강문수 선수. 고집스럽게 상대 선수의 머리만 노립니다.)
(알아도 못 막고 있어요. 머리가 남아나질 않아요!)
(강문수 선수의 일방적인 공격이 계속됩니다. 학대 같은 광경이에요. 지켜보는 저희가 괴로울 지경입니다...)
(심판도 어느새 놀고 있습니다. 심판할 게 없거든요!)
삑-!
사람을 좀 베어본 나에게 검도는 스케이트보다 힘들었다.
‘쓰레기 같은 규칙 때문에...’
한 방씩 주고받는다거나 점수가 인정되지 않는 신체 부위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은 탓이다.
진검으로 베이면?
팔꿈치든 허벅지든 전부 치명상이다. 누가 더 고득점의 부위를 때리느냐는 의미가 없다. 상대의 목을 자른 대가로 가슴이 베여서 내장이 줄줄 샌다면 결과적으로 무승부니까.
탁!
“...시합 종료. 강문수 선수 승리.”
살짝 졸려 보이기까지 한 심판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아아, 급기야 선수가 웁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일방적으로 맞았으니까요.)
(머리를 방어한 자세로 시작해도 소용없습니다. 순식간에 뒤로 돌아가서 뒤통수를 때립니다!)
(검도에서 뒤를 내주는 일이 흔한가요?)
(아닙니다! 보통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탁! 탁! 탁!
(죽도에 머리가 깨지는 소리만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감독이 심판에게 항의해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머리를 때리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으니까요.)
(급기야 반칙마저 나왔습니다!)
(머리를 안 당하려고 조바심 내다가 실수한 것 같네요.)
(중요한 결승전에서 황당한 실수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먼저 움직이고도 머리를 내준 선수, 충격으로 말을 잃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강문수 선수 승리!”
나의 7번째 금메달의 제물이 된 검도선수가 건성으로 인사한 후, 고개를 푹 숙인 채 비틀비틀 떠나갔다.
(현재, 올림픽 검도장은 숨 막히는 적막에 휩싸였습니다.)
(강문수 선수, 스케이트에 이어 금메달을 추가로 획득했습니다.)
(검도 20대, 전체연령 금메달! 유명한 도장의 고수들과 금메달리스트들도 그에게 정수리를 내줬습니다!)
(머리에 원수라도 진 걸까요?)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가 벌써 금메달 7개란 사실입니다!)
(시상식을 마친 강문수 선수가 급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이제 겨우 2종목 끝났으니까요. 갈 길이 멉니다.)
“강문수 선수! 소감 한말씀만...!”
“머리만 고집스럽게 노린 이유가 있으십니까?”
뚝.
스케이트 때처럼 무시하고 그냥 가려고 했는데, 기자가 좋은 질문을 해줬다.
이건 못 참지.
“머리의 점수가 가장 높으니까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내일도 자신 있으십니까?”
내 발걸음을 멈추는 데 성공한 기자가 기세를 타서 추가로 질문했다.
자신 있냐고?
“물론입니다. 양궁은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종목 중 하나입니다.”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에서, 흙먼지로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전쟁터를 질주하며 수많은 미남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그런 나에게 가만히 있는 과녁?
사격장에 태풍이 몰아쳐도 10점 정중앙에 맞힐 자신 있다.
(소감을 마친 강문수 선수가 사격장으로 향합니다.)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라는데요. 짚이는 바가 있나요?)
(없습니다. 강문수 선수의 집에 활이 있는지도... 오! 여자친구와 짙은 포옹을 나눕니다.)
(동행하는 모습을 자주 비췄지만, 공개석상에서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은 공항 이후로 처음 같네요.)
(올림픽 검도장을 초토화한 남자같지 않은 다정한 태도입니다.)
“수고했어.”
“예상대로지!”
부우웅~
송선영과 내가 준비된 차량의 뒷좌석에 타자 수행원이 출발했다.
“...나보다 토토 앱이 중요해?”
“아, 아냐!”
죄송합니다! 제가 몹쓸 놈입니다!
“이번에는 돈 좀 걸었어?”
“어. 본전은 방금 회수했어.”
금메달이 무려 7개다. 보통은 하나만 맞춰도 본전 회수가 되야 하는데, 나에게 배팅한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배당금이 매우 저조했다.
“분산해서 걸었구나?”
“너는?”
“안 걸었어.”
“어?”
의외의 대답이었다. 돈을 쓸어 담을 기회를 그냥 보냈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해.”
“어, 응.”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본인이 안 걸었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려니 넘어갔다.
“...아! 맞다. 엄마와 아빠는 너에게 돈을 걸었어. 특히, 아빠는 개인 병원을 차리고 싶다면서 좀 무리했어.”
“부담되는데?!”
내가 잘못하면 예비 장인어른이 파산한다는 소리였으니까.
“두 분도 분산하긴 했는데, 엄마는 기사도에 주로 투자했고, 아빠는 내가 귀띔해줘서 피구와 하키. 어머님의 말씀으로는 검도보다 심하다던데?”
“심하다니... 이런 건 멋지다고 표현하는 거야.”
홀로 상대편을 쓸어버리는 것!
남자의 로망 아니던가?
“무당이랑 사귄다고 뭐라 하던 아빠의 태세 전환이 얄밉긴 하지만, 지금은 엄마에게 잘하니까.”
“그러면 됐지.”
어머니에게 잘한 걸로만 따지면 내 아버지는 최고의 남편이었는데...
빈자리가 아쉬울 때가 종종 있다. 지금은 선배가 거기에 해당하고.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내 말은, 호텔에서 안 쉬고 힘써도 내일 경기에 지장 없냐고 묻는 거야.”
“전혀 없습니다!”
그거라면 밤새도록 달려도 절대 안 지칠 자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