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98화 (199/232)
  • 198화

    [11장-4절] 당했다!

    여기서부터는 현실의 문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동계 올림픽 준비는 어머니가 해주실 것이다. 귀찮은 일을 전부 떠넘기는 것 같지만, 애초에 올림픽 전 종목을 아들이랑 상의하지 않고 등록했으니 억울하진 않으실 것이다.

    ‘하필이면!’

    송선영이 공범이라서 어머니에게 불평 한마디 못 하고 있다.

    어쩌겠는가? 내 남자친구를 깔보는 왕자 새끼를 혼내주고 싶어서 동계 올림픽 12종목을 전부 등록했다는데!

    어서 칭찬해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여자친구에게 왜 등록했냐고 말할 용기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늑대랑 야생마요...”

    “네.”

    “지구를 열심히 뒤져보면 괜찮은 녀석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찾을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지만.”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엄마만 믿어요~”

    뿅!

    어린 송선영의 엉뚱한 제안은 검증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어떻게든 되겠지!’

    곧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미뤄둔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선영아.”

    “네, 오빠.”

    “오빠네 외가에 한번 가볼래?”

    “헛?!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외가란 말에 송선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바짝 긴장했다.

    “미안. 말을 잘못했네. 외가가 있는 신성로마제국으로 놀러 간다는 거였어. 잠시 용무가 있거든.”

    “아... 그거라면 좋아요.”

    “결정됐네.”

    이제, 어린 강문수가 있는 신성로마제국으로 가보자!

    * * *

    “새근새근...”

    시차 적응에 실패한 어린 송선영은 신성로마제국 제2 공항 근처 호텔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쉬고 있어.”

    일반인이랑 비교하면 적성이 ‘선수’인 그녀의 체력도 월등히 좋은 편이지만, 체력이 아예 감소하지 않는 나랑 함께하면 지칠 수밖에 없다.

    탁.

    한 걸음 내딛자마자 나의 세계가 사방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선배가 지금의 나를 봤어야 했는데...’

    어머니의 기술을 모조리 훔쳐 배우면서 이젠 어엿한 무당이 됐으니까. 답답하다는 소리를 안 들을 자신 있다.

    뚝.

    레이더망처럼 흩어진 나의 감각에 어린 강문수가 걸렸다.

    저항감이 있는 검귀나 환자보다 훨씬 찾기 힘들었지만, 나보다 ‘강문수’를 잘 아는 사람이 지구에 있을까?

    ‘이상하군.’

    마녀들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는 황궁에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휙~

    일단은 택시를 잡았다. 두 발로 뛰어서 가기엔 멀었으니까.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흠... 지명은 잘 모르겠는데, 여기서 북쪽에 있는 호수로 가주세요.”

    “혹시, 신성한 라누벨라 호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맞아요.”

    신성한 라누벨라 호수.

    호수의 이름은 처음 듣지만, 저 이름이 맞는 것 같다!

    “거긴 황실 직할령이라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런...”

    “근처까지라도 괜찮으십니까?”

    “네. 부탁합니다.”

    황실 직할령.

    일반인 출입 금지.

    택시 운전기사에게 그 단어들을 듣자마자 음모의 냄새가 짙게 났다.

    “갑니다.”

    “네.”

    부우우웅~

    지금은 택시를 이용하지만, 나의 세계에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이마저도 필요 없는 날이 온다.

    연속 공간도약이랄까!

    익귀처럼 날갯짓 한 번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의 영역 안에선 어디든 이동이 가능...

    날개는 인간에게 없는 기관이라서 흉내가 쉽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도움으로 결국 해냈다.

    ‘조금 빡세단 말이지.’

    단거리 공간도약을 짧은 시간에 연속으로 해야 하니까.

    무슨 말이냐?

    익귀가 날갯짓 한 번으로 지구 반대편까지 이동할 때, 나는 같은 시간 동안 공간도약을 23,125번 해서 따라잡는다는 무식한 계획!

    현재로선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숙달될수록 연속으로 쓸 수 있는 횟수와 도약 거리가 조금씩 늘고 있다.

    끼이익-

    “도착했습니다.”

    내가 무식한 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황실 직할령 근처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짤랑!

    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린 내 앞에 아름다운 호수가 보였다.

    “무단침입하다가 걸리면 벌금이 장난 아니니 주의하세요.”

    “네.”

    “그리고... 아! 언제 돌아가십니까? 여긴 사람이 없어서 택시와 버스가 다니질 않아요.”

    “아직 기약이 없네요.”

    “그렇군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부우우웅~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라고 생각한 택시 운전기사가 친절하게 이것저것 조언해준 후에 떠났다.

    ‘...가볼까.’

    이 정도 거리라면 ‘한 걸음’에 이동할 수 있으리라.

    팟-!

    * * *

    라누벨라 13세의 최면술에 빠져서 신성로마제국까지 자기 발로 끌려간 어린 강문수.

    내가 송선영을 만나지 못했으면 벌어졌을 미래이기도 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 능력으로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게 뭔 상황이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에서 가까운 호수 앞에 세워진 커다란 별장. 사방이 쇠창살처럼 생긴 살벌한 담장으로 막혔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해 보이는 그곳에 어린 강문수가 있었는데...

    “문수 님.”

    “강문수 씨.”

    아랫배가 불룩해서 누가 봐도 임산부임을 알 수 있는 젊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내가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오! 맙소사!

    어린 강문수를 따라서 정원으로 산책 나온 그녀들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별장 안에는 훨씬 많았으니까.

    아직 소식이 없는 여성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뱃속에 새 생명이 떡하니 깃들어 있었다.

    “일하실 시간이에요.”

    “일... 그렇지, 일.”

    털레털레 별장 안으로 들어간 어린 강문수는 여인들의 인도를 받아서 곧바로 침실까지 들어갔다.

    “문수 님.”

    그리고 방에는 알몸의 여인이 침대에 요염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실화냐?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훤히 노출한 여인이 팔을 벌리며 엄중히 말했다.

    “오늘은 실패하지 마세요.”

    “네. 오늘은 실패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겠다.

    저건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도중에 실수하면 습관처럼 했던 말이다.

    “오세요.”

    “네.”

    곧바로 옷을 벗은 어린 강문수가 없는 의욕을 쥐어짜며 침대로 향했다.

    스윽-

    더 봐주기 힘들었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별장을 벗어났다.

    “......”

    “......”

    담장처럼 생긴 쇠창살로 둘러싸인 감옥의 유일한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원들을 지나쳐서 호수까지 쭉.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게 나라고?’

    나랑 너무 다른 삶을 사는 어린 강문수가 남처럼 느껴졌다.

    “실력이 늘었네요. 이젠 환자 외의 사람도 잘 찾겠는데요?”

    “...엄마는 알고 계셨어요?”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온 어머니에게 질문했다.

    “그럼요~!”

    전혀 신경 안 쓰는 것 같은 시원시원한 답변에 맥이 쭉 빠졌다.

    “저건...”

    “모든 남자가 꿈꾸는 하렘이죠.”

    “저랑 생각이 전혀 다르시네요. 제 눈에는 종마로 보이는데요.”

    종마(種馬).

    시베리아의 마구간들을 돌아다니면서 종마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전직 경주마들을 지겹도록 봤다.

    그런데 아직 젊은 나이에 종마처럼 사는 ‘나’를 보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저는 냉정합니다.”

    “시조인 라누벨과 라누벨라 1세께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아들을 원하셨어요. 여자의 몸으로는 부지런히 낳아도 2년에 1명, 이조차도 몸이 힘들어서 몇 번 못 낳으니까요.”

    “뭐...”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고생하는 건 생물 시간에 배워서 잘 알고 있다.

    “반면에 남자는 달라요. 마음만 먹으면 1년에 500명도 가능해요. 여자의 몸에 씨만 뿌리면 끝나니까.”

    “1년에 500번은 남자가 아니라 괴물인데요?”

    임신 성공률까지 고려하면 1년에 500명은 절대 무리다.

    “하여간 2년에 1명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잖아요? 성병(性病)과 복상사만 조심하면 위험 부담도 전혀 없고.”

    “그건... 그렇죠.”

    로맨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들으면 경련을 일으킬 만큼 냉혹한 평가였다.

    “모든 라누벨라는 기술을 속성으로 배우기 위해 전대의 꿈으로 지식과 경험을 계승한다고 설명해준 적 있죠?”

    “네.”

    “거기에는 사상도 포함되어 있어요.”

    “......”

    “모든 라누벨라는 시조와 1세의 영향을 받아서 아들을 간절히 원해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엄마도요?”

    “물론이죠! 엄마는 아들을 닮은 손자를 잔뜩 보고 싶어요.”

    “끙...”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송선영이 ‘체력 좋은 아이를 잔뜩 낳아주겠다.’라고 말한 이유를 방금 눈치챘다.

    원흉은 어머니!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친구는 벌써 시집살이를 앓고 있었다.

    “라누벨라에게 아들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에요.”

    “보물치고는 막 다루시던데요.”

    “엄마처럼 물리적으로 붙잡혀서 지하에 감금당하진 않았잖아요?”

    “아하!”

    추기경께서 나를 소중히 다루었음을 방금 깨달았다!

    “지금도 보세요. 아들은 종마라고 비하했지만, 저 별장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엄선한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어요. 젊고 아름다우며 총명하죠. 능력 좋은 남자도 얻기 힘든 최고의 여성들이에요.”

    “강제잖아요.”

    “어머! 그건 P를 향한 모독인데요. 강제일 리 없잖아요?”

    “진짜로요?”

    “누차 얘기하지만, 아들은 P의 자손입니다. 국민의 99.99%가 태어난 순간부터 신도(信徒)였던 신성로마제국에서 아들의 위치는 0순위 신랑감이에요. 거절? 사양? 그런 불경한 단어는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아요.”

    “.......”

    이 나라가 P를 신(神)으로 추앙하는 종교국가라는 걸 깜빡했다.

    P의 자손을 낳기 싫어?

    어머니의 말씀처럼 신성로마제국에서만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맨스 판타지처럼 사랑의 도피나 가출했다가 붙잡히면 공주라도 신성모독으로 화형당하리라.

    여긴 그런 나라다.

    “어머! 7세는 역시 7세네요.”

    “음?”

    “그녀가 왔어요.”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가 있는 곳으로 라누벨라 7세가 시녀와 경호원들을 물리고 혼자 걸어왔다. 보이지 않는 우리를 향해.

    “여기 있는 것을 압니다, 10세. 모습을 드러내세요.”

    “...엄마가 들켰네요.”

    “그건 오해예요. 엄마의 고유파장을 아는 탓이에요. 들킨 건 아들도 똑같다고요. 우리가 검귀를 찾는 방식이랑 원리는 같아서 숨기는 건 불가능해요.”

    “아...”

    저항감.

    나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이물질.

    환자나 검귀가 아니라면 라누벨라일 수밖에 없다.

    “그렇죠, 7세?”

    “10세... 당신은 다른 10세로군요? 제가 아는 10세는 가상현실게임 중독 말기니까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괜히 힘 빼지 마세요. 7세가 우리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가짜라서, 말이죠?”

    “네.”

    “......”

    “......”

    친한 모습만 봐온 두 라누벨라 사이에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여긴 무슨 일로 왔나요? 너희는 가짜라고 놀리러?”

    “어머!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불편한 진실을 굳이 확인하러 오신 건 7세시잖아요?”

    “여긴 제 소관이니까요.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면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저도 아들을 보러 왔어요.”

    “역시... 아들이 맞았군요.”

    “확신도 없으면서 저렇게 여자들을 잔뜩 붙이셨어요?”

    “실험해볼 가치는 있으니까요.”

    “실험?! 내 아들로 실험?! 가짜 7세! 나에게 혼나-”

    뿅!

    실험이란 말에 발끈한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뭐지?”

    “잘난 현실로 추방했습니다.”

    “아!”

    현실 동화.

    선배가 나를 탈출시키고 어머니를 살리며 사용했던 최상급 기술. 라누벨라 중에는 7세만 가능하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을 건가요?”

    어머니의 짐작대로 나의 존재는 눈치챘지만, 누군지는 모르고 있었다.

    스으윽-

    그녀가 정확히 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온다.

    “항복입니다.”

    떠보는 게 아님을 확인한 나는 쓴웃음을 흘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10세 앞에선 의연했던 7세가 처음으로 소녀 같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7세.”

    “이건... 너무 예상 밖이군요. P가 알면 기뻐하겠어요.”

    “그렇습니까.”

    “자손이 방송에 출연해서 광대처럼 춤추는 영상을 본 뒤부터 P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니까요.”

    “...저는 안 그랬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후후후!”

    “......”

    라누벨라 7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현실이랑 다르지 않았다. 사람 좋은 추기경 누나 같달까.

    이렇게 차별한다고?

    그녀들이 ‘아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고 집착하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당신이랑 비교하면 이 세계의 강문수는 실패로군요.”

    “저 방법밖에 없었습니까?”

    “비난하고 싶나요?”

    7세가 야릇한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뺨을 쓰다듬었다.

    “아뇨.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이란 건가요?”

    “네.”

    “그렇다면... 당신의 7세에게 물어보세요.”

    “네?”

    뿅!

    당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