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96화 (197/232)

196화

[11장-3절] 해냈다!

신성로마제국은 ‘라누벨라’의 혈통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굉장히 경계한다.

이 와중에 등장한 무당.

이상함을 눈치챈 마녀들이 조금만 조사해보면 적성 무당이 ‘제사장’의 오역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현실이랑 다른 점은?

(강문수 씨. 이쪽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누벨라 13세의 최면술에 일반인처럼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지배당했다.

(짐은 잘 쌌나요?)

(네. 아직 이름도 모르는 당신에게 주의받은 대로,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공항까지 조용히 왔습니다.)

(잘했어요. 우리는 곧바로 신성로마제국으로 갈 거예요. 이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따라오세요.)

(알겠습니다.)

어린 강문수는 말 잘 듣는 가축처럼 라누벨라 13세에게 끌려갔다.

“허...”

두 사람이 공항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내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게 맞는 건가?

결과만 놓고 보면 신성로마제국으로 향하는 건 현실이랑 똑같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닌 타의에 의해 내 운명이 정해졌다.

“아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감도 안 오네요.”

“모르는 편이 나을 거예요.”

“......”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까지 따라갈 게 아니면 알 수 없다.

어머니는 모르는 편이 낫다고 경고했지만, 나는 꼭 확인하고 싶다. 그것이 부질없다고 해도.

“오빠~!”

“...보고 있어!”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감독과 다른 선수들은 그런 송선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는데, 수영장 앞 주차장에 세워둔 내 스포츠카를 본 뒤부터 그녀의 태도를 수긍해버렸다.

(부자 남자친구라니...)

(부러워라~)

(메달보다 중요하겠지!)

(선수도 얼굴이야...)

나는 말한 적이 없지만, 여자친구의 수영복 복장을 보기 위해 매일 찾아온다는 변태 같은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괜찮겠지?’

뒷담화를 엿들은 것이기에 따지기도 뭐하고, 내 시선은 여자친구의 늘씬한 다리에 자주 고정되어 있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근거 있는 소문이랄까!

그보다는 부잣집 도련님(백수)이라는 오해가 훨씬 부담스러웠다.

“흠.”

라누벨 환자는 눈치챘을까?

나의 세계를 우주까지 광범위하게 퍼트려서 환자의 위치를 찾았다. 공연 중이더라도 이 나라의 어딘가에 있겠지만, 연습을 겸해서 넓게.

(내 통화를 안 받네...)

(누가?)

(내 남자친구.)

(아아, 유일암의 제자 2호? 국민 여동생이 전화해주면 1초 안에 받아야지, 못생긴 게 건방지네!)

내가 건방지긴 해도 못생겼다고 불릴 정도는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뒤로 잘 받았었는데.)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야? 너 좋다는 남자가 줄을 섰잖아.)

(남자는 얼굴보다 능력이 중요해.)

(그건 맞지만, 무당은 아니야. 방송을 본 적 있는데 진짜... 네 남자친구라서 별말 안 할 뿐이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어린 강문수가 납치됐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지만, 미래가 바뀌면서 무언가가 꼬였다는 사실은 인지한 것 같았다.

꼬여도 제대로 꼬였지.

라누벨 환자의 꿈속에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같은 기간 동안 현실에선 5명이나 상대했다.

여자친구 송선영, 마법소년 최강훈, 백작영애 김은정, 수영황제 남해수, 협객 마오짜이.

지금은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에서 주인공 ‘덕춘이’를 환자로 착각해서 삽질하고 있을 시기다.

“이젠 능숙하네요.”

“저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라서 수시로 연습했습니다.”

“역시, 위험하긴 해도 꿈속에 직접 난입하는 방식이 훈련에 훨씬 도움이 되는 것 같네요.”

“궁금하네요. 간접과 직접의 차이가.”

“후후! 나중에 한 번 해봐요. 체감이 확 들 거예요.”

“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나는 송선영을 응원하기 위해 올림픽 개막식을 직접 관람, 그녀의 건승을 기원하며 스포츠 토토에도 상당한 액수를 걸었다.

그 사이, 어린 강문수의 실종은 여자친구 이나연보다 동업자가 훨씬 빨리 눈치챘는데...

(납치된 게 틀림없어!)

유일암의 감은 굉장히 좋았다.

(내 제자의 홍보 효과를 눈치챈 사기꾼 새끼들의 짓이 틀림없어!)

좋다가 말았다.

(유일암 씨, 제자 분은 여행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이 됐습니다. 감시카메라에 여행 가방을 끌며 나가는 모습도 포착됐고요.)

(출국한 기록이 없다면서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마지막으로 파악된 장소가 공항이었습니다.)

(하아! 미치겠네!)

여권 조회도 필요 없는 라누벨라 13세의 출입국 방식 탓이다.

항공사에 금전적인 손해를 안 주고 기내식과 좌석도 필요해서 비행기표는 끊지만, 이번에는 전용기를 활용했기에 이마저도 알 수 없다.

전용기.

내가 당사자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라누벨라 13세는 ‘황녀’로서 대외적인 활동이나 정말 급할 때가 아니면 전용기를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조금 믿기지 않지만, 순수한 서민의 아이들을 구경하는 게 즐겁다고 한다. 보고 있으면 부럽기도 하고.

이건 아이를 낳고 싶어도 쉽지 않은 모든 라누벨라의 공통점이라나? 젊은 여성들에게 제발 애 좀 낳으라고 노래를 부르는 고령화 사회에 흔치 않은 정서.

아무튼,

“오빠~!”

“응. 보고 있어.”

훈련 내내 오빠를 외쳐댔음에도 불구하고, 송선영은 첫날부터 2군 선수들보다 확실히 빨랐다.

그녀의 재능이 특출나서?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순 없지만, 이 수영장에는 적성이 ‘수영선수’인 인간 돌고래들만 모아놨다.

재능의 차이는 미세하다는 얘기.

그런데도 우세한 이유는?

시작 시기다. 다른 선수들은 19살에 P의 적성검사 결과를 본 후에 수영을 시작했지만, 송선영은 모친의 영향으로 아주 어릴 적부터 수영했으니까. 꾸준히 오랫동안.

첨벙첨벙!

‘1군으로 금방 올라가겠는데?’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계 올림픽 국가대표 명단이 확정되기 전에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수영황제 남해수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호화유람선.

모든 경쟁을 뚫고 바늘구멍보다 좁은 1군에 도달해야 탈 수 있는 이 배를 내가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오빠~!”

“...응. 보고 있어.”

이 호화유람선은 기본적으로 1군 선수들만 이용할 수 있지만, 그들만으로는 유지비가 감당이 안 돼서 일반 관광객도 받고 있다. 바로 나 같은.

풍덩! 풍덩!

한 나라를 대표하는 수영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의외의 관광 효과가 있다는 것 같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바다를 포함한 모든 훈련 장소가 실내가 아닌 실외라서 선수들의 피부가 잘 탄다는 점이다.

“시커먼 송선영이라...”

이것도 귀하군.

새로운 볼거리이긴 했지만, 나는 여자친구의 허벅지가 우윳빛일 때가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여기서 대략 10km 떨어진 섬의 호텔에 가면 로맨스 판타지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소설책을 꽉 끌어안은 환자와 보호자를 만날 수 있겠지.

그러나 그건 내가 아닌 ‘어린 강문수’가 해야 할 일이다.

“아들. 아무것도 안 하니 어때요?”

이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머니도 익숙해졌다.

“뭐... 제가 아무것도 안 했어도 세상이 잘 굴러간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정신이 드디어 어른이 됐다는 증거네요.”

“뭐... 그런 셈이죠.”

최강훈, 마오짜이, 남해수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못 깨어나면서 정세의 판도가 살짝 바뀌긴 했지만, 지구와 인류가 망하지 않는다는 건 똑같았다.

어린 강문수는?

유명한 여가수의 남자친구이면서 천재 무당의 제자로 반짝했던 20살 사회초년생은 실종자로 처리됐다.

“거참...”

신성로마제국에선 나를 납치해서 어떻게 처리한 거야?

하계 올림픽이 끝나면 여행이란 핑계로 송선영이랑 한번 찾아봐야겠다.

* * *

만약에.

내가 가장 궁금했던 2가지 중 하나가 드디어 개봉 직전에 왔다.

“오빠~!”

피부가 시커멓게 그을리긴 했지만, 올림픽 자유형 여성 100m를 나가는 송선영은 오늘도 예뻤다.

다른 선수들의 팔다리가 운동을 잘하게 생겼다면, 송선영은 상대적으로 가녀리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들이 범고래라면 그녀는 돌고래.

현실에서 수영복 모델로도 성공한 그녀답게,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띵-!

풍덩, 풍덩, 풍덩, 풍덩...!

출발 신호에 맞춰서 송선영을 포함한 선수들이 빠르게 헤엄쳤다.

수영 종목 중에서 가장 짧은 100m.

그렇기에 그 짧은 거리와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힘을 폭발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역시, 자유형 100m다운 박력!

육상 올림픽은 가장 짧은 300m부터 1000m, 3000m, 10km, 30km, 마라톤 100km까지 전부 석권했지만, 수영 단거리는 지금도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근육으로 헤엄칠 수 있다면 수영장 대신 헬스장을 다녔겠지!

그런 이유다.

“와아아!”

“오오!”

“이겨라~!”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일반 시청자들은 선수의 이름과 얼굴을 처음 보지만, 비행기표와 숙박을 잡고 올림픽 수영장까지 몸소 찾아온 사람들은 다르다.

선수의 가족 혹은 관계자.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기사도는 예외지만, 대체로 그렇다. 나도 여자친구를 응원하러 온 관계자니까.

‘이런.’

일반인들의 눈에는 모든 선수의 기량이 비슷해 보이지만, 선수 경험이 있고 눈썰미까지 좋은 나에게는 확연히 보였다.

금메달은 이미 무리.

출발할 때만 해도 노려볼 만했는데, 절반쯤 왔을 때부터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이젠 동메달도 아슬아슬...

수영황제 남해수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수영 강국이 됐지만, 다른 나라의 국가대표선수들도 만만치 않았다.

탁, 탁, 탁, 탁...!

모든 선수가 거의 동시에 결승점에 도달하면서 경기 종료.

여기서부터는 손끝까지 정밀한 관측이 가능한 고성능 카메라와 벽에 부착된 센서로 판독해야 한다.

“역시나...”

안타깝게도 4등이었다. 동메달인 3등하고는 0.04초 차이.

수영은 재경기가 없기에 이대로 끝났다고 봐야 했다. 현역 시절의 장서연 감독님처럼 딸도 같은 실패를.

둘의 차이라면?

송선영은 P의 적성검사가 끝나자마자 올림픽에 출전하는 희소한 경우로,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란 말이 나올 정도로 매우 젊기에 열심히 노력하면 2년 뒤에 동메달은 노려볼 수 있다.

...은메달은?

그녀의 체력을 극단적으로 올려주는 훈련이나 의학 기술이라도 등장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는 무리일 것 같다.

“오빠...”

“괜찮아, 괜찮아.”

불안한 표정으로 죄인처럼 내 눈치를 보는 송선영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줬다.

메달? 따면 좋지. 노후까지 보장된 연금이 나오고, 선수용 수영복 모델 광고 같은 짭짤한 부수입도 생기니까.

하지만 나는 올림픽 메달보다 송선영의 예쁜 다리가 100배 좋다!

그때,

(시상식 전에 순위 정정이 있겠습니다.)

“음?”

심각한 어조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어? 잠깐.’

내가 선수이긴 해도 남성이고 장거리라서 이쪽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여성 쪽에서 큰 사건이 있었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었던 게 떠올랐다.

(약물이 검출되었습니다.)

“아!”

내 체력이 너무 깡패라서 약물 복용이란 오해를 달고 살았는데, 그만큼 부정행위가 흔한 탓이다.

어떤 원리냐?

시중에 ‘안 들키는 약물’이 등장하면 곧바로 ‘안 들키는 약물을 잡는 검사’가 등장하고, 그러면 ‘안 들키는 약물을 잡는 검사를 피하는 약물’이 또 나오고, 폐해가 커지기 전에 ‘안 들키는 약물을 잡는 검사를 피하는 약물을 검출하는 검사’가 또 개발되는 식이다.

끝없는 반복이라고 할까!

재능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는 천재들만 모아놓는 바람에 다른 것에 의존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탓이다.

“오빠! 설마...?”

“그 설마 같은데?”

(17번, 송선영 선수는 시상식장으로 와주십시오.)

“해냈다~!”

송선영이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선영아, 축하해.”

“꺅!”

나는 그녀의 허리를 양팔로 번쩍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며 축하해줬다.

덤으로,

‘어쩌면 되겠는데...?’

현실의 동갑내기 여자친구에게 올림픽 참가를 제안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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