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단점이 적은 사람은 있어도,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다면 그 인간은 신(神)이리라.
그래서 인간도 다른 포유동물처럼 자신의 단점을 메꿔줄 훌륭한 유전자의 이성을 찾는다.
‘사랑도 과학이지!’
내가 지금까지 마주친 수많은 미녀를 놔두고 송선영의 길고 예쁜 다리에 끌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내 다리가 짧아서?
그건 아니지만, 거금을 들여서 산 바지의 기장이 길어서 잘라야 할 때마다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영이는 어떠려나?’
현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꿈속의 어린 송선영은 자신에게 부족한 체력이 특출난 나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오빠~”
살랑살랑~
나날이 예뻐지는 그녀를 볼 때마다 현실의 여자친구가 떠올라서 정신을 꽉 잡고 있었다.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꼴을 보기 싫어서 또 연인 사이가 됐지만, 진짜로 체력 좋은 아기라도 생기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으니까. 새로운 생명을 버리고 현실로 떠날 자신이 없다.
“오늘은 학교를 좀 걸을까?”
“네! 학교 뒤편에 걷기 좋은 숲이 있어요. 숲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긴 하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나도 이 고등학교에서 3년을 보냈는데. 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장소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오컬트’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결정했으니까.
여기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지금까지도 꿈속에 갇혔을 수도 있다. 막대한 입원비는 덤.
물론,
‘무당 유일암. 예정대로 왔네.’
학교 옥상에서 나를 밀친 그가 입원비를 대신 내줬겠지만!
학교 운동장에 ‘천재 무당’ 유일암의 검은색 차량이 보였다. 촬영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제자도 함께.
성실한 담임 선생이 그를 학교로 초청했기 때문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치가 괜찮네. 하교하는 학생들도 보이고.”
나무 그늘 밑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서 모교를 내려다봤다.
스윽-
송선영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팔짱을 끼었다. 남의 시선을 무시하겠다는 듯이 눈까지 감으면서.
현실과 꿈의 송선영은 여러 부분에서 다르지만, 이럴 때는 정말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
“......”
우리는 조용히 이 침묵을 즐겼다. 나도 학교 옥상을 가만히 바라보며 강문수와 유일암이 오길 기다렸다.
‘...설마?’
꿈속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
나는 너무 조용한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러봤다.
“선영아?”
“네, 오빠. 너무 편해서 졸음이 몰려와요...”
스윽-
대답하는 그녀의 말투가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실의 송선영은 동갑이라서 한 번도 못 했던 애정 표현. 반면에 이쪽은 연하인 탓인지 거부감 없이 내 손길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네.’
옥상까지 확인한 어린 강문수와 유일암이 사소한 사건조차 없이 무난하게 탐색을 마치고 밑으로 내려갔다.
최근에 어머니의 도움으로 익힌 ‘영역 거리 확장’을 통해서 그들의 대화를 도청해보기로 했다.
(제자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천재 무당 유일암의 제자가 될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걸?)
(절대 안 후회합니다.)
(선심 썼다. 수업료는 안 받으마!)
(돈을 줘도 무당의 제자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아르바이트 가야 하니 이젠 방해하지 마세요.)
유일암이 ‘진짜 무당’을 자신의 방송에 끌어들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일의 중요도를 전혀 모르네.)
(생계보다 중요한 게 있나요? 이만 가세요.)
(강문수 학생이 이 시장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몇 번만 출연해도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많이 벌어.)
(제가 버는 건 아니죠.)
(끙...)
나도 ‘무당’을 안 좋게 보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방송 조회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유일암을 사기꾼의 사촌쯤으로 생각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네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버는 월급에 방송 수익 15%를 얹어주마. 적은 것 같아도 이 정도면 지금의 내 제자보다 훨씬 많이 주는 거야.)
(...진짜요?)
나는 돈에 너무 약했다.
(지나가는 사람 10명을 붙잡고 한번 물어봐라. 천재 무당 유일암을 아냐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1명은 알걸? 그런 내가 고등학생에게 사기 쳤다는 소문이 돌아봐라. 얼굴을 못 들고 다녀.)
(흠...)
(매일 보자는 게 아니야.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다른 날에는 네가 아르바이트하든 여자랑 술집을 가든 전혀 간섭하지 않으마.)
굉장히 파격적이잖아? 그건 어린 강문수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간단해. 진짜 무당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 P의 적성검사 결과표를 생방송에서 공개하고, 내 제자로 활동하면 돼.)
(무슨 활동이요?)
(스승인 내가 뭔가를 하면 맞장구치거나 호응하면 돼. 편집이나 촬영은 첫 번째 제자가 할 거야. 너에게는 사형(師兄)이 되겠군.)
(생각해볼게요.)
(하하! 앞으로 잘 해보자!)
(아직은 생각해본다고 했는데요...)
(여기, 내 명함. 혹여나 다른 무당이 찾아오면 절대 말도 섞지 마라. 전부 사기꾼이니까.)
(생각해볼게요.)
일단은 그 정도로 대화가 마무리되고 어린 강문수와 유일암은 작별했다.
‘일이 웃기게 돌아가네.’
만약에.
부질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내가 송선영을 만나지 못했으면 이 꿈이랑 비슷하게 흘러갔을 것 같다.
(문수야~!)
(누나, 안녕하세요.)
(오늘은 늦었네?)
(학교에 무당이 찾아와서요.)
(그랬구나~)
현실의 경험을 활용해서 ‘가수’로 빠르게 자리를 잡은 라누벨 환자가 어린 강문수를 살갑게 맞이했다.
그녀의 목적은 나의 혈통과 능력.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압도적인 유명세와 권력이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내가 ‘무당’으로서 능력을 깨우치지 못하면 다른 것도 없다.
“오빠, 명상해요?”
“...슬슬 갈까?”
“네!”
학교 옥상에서 송선영을 만나지 못한 ‘어린 강문수’의 다음 행동과 판단을 쭉 구경하고 싶지만, 내가 이 꿈속에 들어온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스키, 눈썰매, 승마.
이 전부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나는 송선영에게 해외여행을 제안했다.
“시베리아요...?”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쯤 북쪽으로 쭉 날아간 곳이야.”
“그, 그건 알아요. 그런데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시베리아.
1년 내내 눈 덮인 산이 많은 그 동네에 우수한 스키장이 몰려 있고, 썰매견도 그쪽 혈통이 좋다.
말은 시베리아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식용부터 경주마까지 다양하게 키우는 마구간이 잔뜩!
여기서 내가 봐두면 현실에서 어머니가 대리로 구매한다는 전략이다.
“3년 뒤에 동계 올림픽에 출전해야 하거든. 신성로마제국의 국가대표로.”
“오빠가 왜요?”
“적성이 선수는 아니지만, 신의 영광을 알리기 위해 참가한다고 할까.”
거짓말은 아니다. 참가하는 동계 올림픽이 같으면서도 다를 뿐.
“아...”
“물론, 바로 가겠다는 건 아니야. 선영이의 하계 올림픽이 먼저니까.”
“올림픽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힘들지 않을까요?”
“왜? 국가대표셨던 어머님의 인맥이 있잖아.”
“제 실력이 부족해서요.”
“부담 갖지 마.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면 어때? 못 따도 예쁠 텐데.”
“바보...”
예쁜 다리를 비비 꼬면서 부끄러워하는 송선영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머릿속에 내 보물로 저장해둬야지. 현실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 이번 꿈은 들어온 보람이 있다.
‘이것도 궁금했지!’
그녀는 나의 설득으로 올림픽을 포기하고 수영복 모델이 됐으니까. 그 탓에 늘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성공을 내가 가로막은 것 같아서.
되돌릴 수 없는 ‘만약’이긴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궁금했다.
“바다나 갈까?”
“오빠, 차 있어요?”
“물론이지!”
대중교통이 갖춰지지 않은 장소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베리아 벌판을 돌아다니기 위해 운전면허도 따놨다.
돈은 어디서?
어머니가 가르쳐준 구걸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도박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100전 100승!
단시간에 너무 빨아 먹어서 출입 금지를 당하고 말았지만, 이미 벌어놓은 활동비가 상당해서 아쉽진 않다.
“뭔데요?”
“내일 보여줄게.”
“네!”
현실의 송선영이 타는, 앞면이 개구리 얼굴처럼 생긴 노란색 스포츠카.
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영역에 차를 포함하면 초대형 교통사고도 피할 수 있어서 과감히 투자했다.
‘여기서 잔뜩 연수하고 현실로 돌아가서 운전면허를 따야지!’
이래저래 나쁘지 않은 꿈이다.
* * *
어려진 여자친구랑 연애할 만큼 한가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한가해져서 운전면허를 포함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저절로 바빠진 거다.
그 대표적인 예로,
“흠.”
스마트폰으로 시간 될 때마다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등을 틈틈이 보고 있다. 모든 라누벨 환자가 현시대 아니면 작품의 세계관을 참고하니까.
상상력이 특출나면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운 꿈의 세계가 창조될 순 있지만, 아직은 보지 못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지!’
인간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친 이 세상에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으니까.
판타지, 무협, 로맨스, 현대...
여기에 ‘고전 판타지’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종교까지 곁들어지면 완벽! 기독교의 천사는 ‘남성’뿐이란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건...”
나중에 환자를 설득하는 용도로 자주 써먹을 수 있겠는데?
남성향, 여성향 따지지 않고 판타지 소설에 요정만큼 자주 등장하는 종족이 천사니까. 주로 여성으로.
외계의 천사는 여성도 존재한다고 반론하면 할 말 없지만, 지구가 배경인 꿈에선 충분히 먹힐 것이다.
「점 치기 좋은 날! 116화」
「내 제자가 달라졌어요! 6화」
「미운 무당 새끼! 34화」
「유일암의 귀신 사냥! 45화」
“흠...”
그동안 어린 강문수는 가짜 무당 유일암의 제자가 되었다.
유일암에게 방송 출연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살림살이가 눈에 띄게 좋아지긴 했지만, 적성 ‘무당’을 활용하긴커녕 능력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훈이도 조용하고.’
사이는 그대로였지만, 이복형 최강민을 치료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바뀐 점이라면? 녀석은 어린 강문수를 만날 때마다 유일암을 모기 혹은 거머리에 비유해서 욕했다.
변수라면?
(문수야! 올림픽에 나가봐.)
내 혈통과 미래를 아는 라누벨 환자 ‘이나연’이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도 자세한 건 몰라서 신통치 않았다.
(누나, 갑자기 올림픽은 왜요?)
(무당이잖아!)
(그래서 묻는 건데요... 선수도 아닌 제가 왜 올림픽에 나가요?)
(그, 그건... 하여간 해봐!)
(네.)
가수로 성공해서 유명해진 연상의 여자친구 이나연의 재촉에 못 이긴 어린 강문수는 체육대학교에서 수영, 육상, 태권도에 도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
꿈속에서 기반을 다지지 못한 ‘무당’은 눈에 띄는 재능 하나 없는 일반인이나 다름없었다.
송선영은...
“오빠~!”
“응. 보고 있어.”
전직 국가대표였던 모친 장서연의 인맥과 적성, 현재 성적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2군에 들어갔다.
그러나 2군.
이제 막 훈련을 시작했고 젊기에 발전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체력이 약하니 연습량도 적고, 연습량이 적으니 몸의 완성도 또한 떨어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빠~!”
“...잘 보고 있어.”
수영 연습보다 관람석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나에게 더 시간을 할애해서 글렀다.
“아들~”
“오셨어요.”
“오긴 한참 전에 왔어요. 미래가 바뀌면서 제국의 방침도 달라졌더라고요. 그게 신기해서 구경하고 왔어요.”
“아...”
“지구 반대편까지 유일암의 제자 이야기가 들렸다는 거겠죠.”
“.......”
평소 같지 않은 어머니의 말투에서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