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11장-2절] 이럴 수가?
“이 맛에 회귀하는구나!”
동갑과 연하 중에 어떤 송선영이 더 좋은지는 죽어도 말할 수 없지만, 잊기 힘든 경험이란 건 확실했다.
단 하루 만에 정답게 팔짱을 끼고, 여자친구가 좋아했던 수족관과 빠르나루 레스토랑으로 마침표!
우리는 다시 사귀게 됐다.
“아들, 스키는요?”
“선영이가 또 꿈속에 빠지는지만 확인하고요.”
평일에는 자유수영 후에 카페로, 주말에는 데이트 후에 레스토랑으로 가는 게 일상이 됐다.
그 사이, 어린 강문수는 라누벨 환자의 끈질긴 구애에 함락되고 말았다. 같이 편의점 근처의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고 라면과 김밥...
저렴한 연애 중이었다.
“오빠.”
“왜?”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두 번째 보고 일어서는 나를 붙잡은 송선영이 가녀린 영혼처럼 몸을 기댔다.
이게 동갑과 연하의 차이일까? 어린 송선영은 나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게 원래 성격이던가.’
동갑보다 연상의 강문수가 믿음직했을 수도 있지만, 꿈속에서 30번 넘게 자살하며 성격이나 가치관이 크게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내일, 결과가 나와요.”
“벌써 그렇게 됐네.”
송선영이 꿈속에 빠져들 날도 멀지 않았다는 의미.
“어제부터 걱정돼서 잠이 안 와요.”
“괜찮아.”
“오빠가 내 적성을 보고 싫어하게 될 것 같아서...”
“내가 싫어하는 적성이 뭔지도 모르면서 걱정하는 거야?”
“...싫어하는 적성이 뭐예요?”
“선영이가 싫어하는 적성.”
내 대답에 놀란 송선영의 두 눈이 크게 떠지더니, 그 의미를 깨닫고 뺨을 붉게 물들였다.
“거짓말이면 안 돼요.”
“물론이지.”
“두고 볼 거예요.”
“내 얼굴은 안 닳으니 많이 봐도 돼.”
“오빠. 내일은 학교 앞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어요?”
“휴가 중이라서 괜찮아. 학교가 몇 시에 끝나는데?”
모교가 끝나는 시간쯤은 잘 알지만, 그래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4시쯤이요. 내일 지각해서 청소 당번에 걸리지 않는다면요.”
“그러면 내가 아침에 전화로 깨워줘야 하나?”
“아, 아뇨! 괜찮아요! 혼자서 일어날 수 있어요...!”
송선영은 우리의 연애를 가족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확실히 달랐다. 꿈을 겪은 이후의 송선영은 남의 시선을 거의 신경 쓰지 않으니까. 가족도 포함해서.
“내일 보자.”
“네, 오빠!”
“......”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백작가의 막내딸이 되었다.>의 세계에서 소맥 공작의 막내아들이 ‘오빠’란 호칭에 집착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오빠, 아몰랑 오빠.
이젠 익숙해져서 처음 같은 충격은 없지만,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자... 이제...’
송선영이 예정된 운명대로 꿈속에 빠져드는지 살펴보자.
* * *
송선영에게는 하교 시간에 맞춰서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지만, 나는 아침부터 학교 내의 복도를 산책하듯 걷고 있었다.
“여기가 아들의 고등학교구나~”
내 과거가 궁금했던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오셨다.
“저쪽에 대머리 남성이 과학 선생님이에요. 시험이랑 관련 없는 과학 상식을 설명하길 좋아하시죠. 그래서 싫어하는 애들도 있는데, 저는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헤에~”
“그리고 오른편에 젊은 여성이 저의 3학년 담임선생님입니다. 모든 선생이 열정이 있지만, 혼자 사는 저를 정말 많이 신경 써주셨습니다.”
“고마운 분이네.”
“그렇죠.”
너무 신경 써주셔서 ‘가짜 무당’을 학교로 초대하셨다.
‘아... 그러고 보니...’
라누벨 환자의 간섭을 받은 어린 강문수의 적성이 바뀌는지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조금 전에 담임 선생이 P의 적성검사 결과표를 들고 교실로 향했다. 곧 있으면 내가 절규를-
“이건 말도 안 돼!”
“문수야. 알려줘.”
“문수는 무슨 적성일까?”
“야. 얼른 펼쳐봐.”
결과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3년 전의 나.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런데,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 좀 한심했다.
“내 직업은….”
“말하기 힘드니?”
“...아뇨. 무당.”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적성을 공개하는 나를 보고 있으려니... 정신적인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당시에는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적성이라고.
“충격이 컸던 모양이네요.”
어머니가 어린 강문수를 멍하니 구경하며 말했다.
“네. 무당 행세하는 사기꾼들이 평판을 다 망쳐놨으니까요.”
내가 이 적성을 들고 면접에서만 100번 떨어져 봤기에 확신할 수 있다.
“번역의 문제네요.”
“제사장은 서아시아의 종교 국가에서만 쓰였던 용어니까요.”
제사장(chief priest).
충성과 효도 등의 덕목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유교(儒敎)가 동아시아 국가들을 지배했지만, 충의(忠義) 사상 탓에 종교가 왕권(王權)을 넘어서진 못했다.
“이 나라에서 그나마 비슷한 단어가 무당이었다는 거군요?”
“네.”
어린 강문수랑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송선영의 교실로 가봤다.
“흐응~ 예상대로네~”
내 앞에서는 두 다리를 딱 붙인 얌전한 자세를 고수했지만, 교실에서는 고개를 숙이면 속옷이 보일 정도로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적성: 수영선수」
결과표에는 어째서 이 적성이 나왔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있고, 인터넷의 정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적성의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송선영의 적성은 수영선수.
변수는 없었고, 체력이 너무 약해서 자유형 100m만 가능했다. 일반인이 상대라면 마라톤도 할 수 있지만, 괴물들끼리 경쟁하는 올림픽에서 그녀는 체력이 매우 약한 축에 속했다.
“실망한 눈치가 아니네요?”
“흠...”
P의 적성검사 결과표를 확인한 송선영을 보면서 어머니랑 같은 인상을 받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그녀가 자살을 결심하는 건 며칠 뒤니까.
“엄마랑 새로운 기술을 익히면서 기다릴까요?”
“네.”
필요한 기술은 대부분 익혔다. 한 번 보면 습득하는 나를 보면서 어머니는 천재라고 했지만,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은 0점을 주셨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는데...
“공간이동이에요. 자신의 영역 안이라면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어요.”
나에게 필요한 기술을 어머니가 개발하면 베끼는 방식으로.
“영역 밖은 안 돼요?”
“아들이 말한 익귀도 그렇고, 검귀는 우리랑 영혼을 사용하는 방식이 미묘하게 달라요. 검귀와 환자의 동질감이라고 할까요? 반면에 우리는 명백한 침입자라고 할 수 있죠.”
“흠...”
역시, 나는 이론에 약했다.
“우리의 관계는 경찰과 도둑이랑 비슷해요. 아들이 도망친 도둑을 잡기 위해 행인에게 물어보면 그가 가르쳐줄까요? 아니면 못 봤다고 거짓말할까요?”
“어... 가르쳐주지 않을까요?”
“한통속이라면?”
“아!”
“그런 거예요.”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고유영역을 한 방향으로 길게 잡을 수 있을까요?”
“아들은 영역의 형태를 바꾸고 싶다는 거군요?”
“네. 정확합니다.”
“음... 가능은 하지만, 그만큼 다른 방향을 희생해야 해서 위험할 텐데요? 익귀란 놈들이 순식간에 옆구리로 이동해서 공격하면 어쩌려고요?”
“그러면...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확보하면서 영역을 확장해야겠네요. 숟가락 같은 모양으로.”
“아들이 원하니 한 번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익귀를 상대할 방법을 고안하는 사이에 학교가 끝나고, 고등학생들이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문수야~! 어?”
환자 이나연이 나를 ‘어린 강문수’로 착각하고 다가왔다. 하지만 3년이란 시간은 나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해줬다. 학창 시절의 나는 늘 피로에 찌들어 있었으니까.
덤으로, 여러 꿈을 돌아다니며 자연스럽게 쌓인 노련미와 자신감은 과거의 나에게 없었던 인상이다.
“사람을 착각하셨습니다.”
“어... 네. 죄송합니다.”
당황한 이나연이 내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떠났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긴 하겠지.’
하지만 그녀는 중학교 시절로 회귀하는 꿈속에서 7년 이상을 보냈다.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만 본 현실의 강문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리 없다.
“오빠!”
“뛰지 마. 안 도망가니까.”
현실에선 볼 수 없는 ‘귀여운 송선영’이 발랄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보실래요?”
그녀가 나에게 한 번 접힌 P의 적성검사 결과표를 건네며 물었다.
“그래.”
슥-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면서 종이를 펼쳤다.
「적성: 수영선수」
“잘됐네. 수영이 여성의 몸매 관리에 좋다고 하니까.”
“오빠, 변태 같아요.”
“하핫!”
나를 흘겨보는 송선영의 눈에는 안도와 기쁨의 빛으로 가득했다.
그녀에게 ‘수영’이란?
올림픽 메달을 반드시 따야 한다는 부담으로 가득한 취미. 하지만 나의 한마디에 180도 바뀐 듯했다.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뭐가?”
“어머니도 수영선수셨거든요. 하지만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못 내서 많이 후회하세요. 지금도...”
이건 내 장인어른이 될지도 모를 장서연 감독님의 남편이 잘못했다. 올림픽 메달을 못 딴 아내를 위로해주긴커녕 구박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자란 송선영에게 ‘수영선수’가 좋게 보일 리 없다.
“나는 선영이가 성적을 신경 쓰지 않고 수영했으면 좋겠어.”
“왜요?”
“몸매가 예뻐지니까. 지금도 예쁘긴 하지만.”
“변태.”
“하하핫!”
변태라는 소리는 현실에서도 많이 듣기에 타격이 전혀 없었다.
“...정말로 그거면 돼요?”
“당연하지!”
“그러면 저랑 결혼해줄 수 있어요?”
“...당연하지!”
너무 빠른 전개에 뇌가 한순간 따라가질 못했다.
“어째서 머뭇거린 건데요.”
“고백은 원래 남자가 하는 거야. 빼앗긴 게 분해서 그래.”
현실에서도 최근에 빼앗겼다. 내가 남자답지 못한 걸까?
살짝 자괴감이 든다.
“오빠.”
“왜?”
“저는 아몰랑 오빠가 정말 좋아요. 버리면 죽어버릴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나도 좋아해!”
저게 단순한 협박이 아닌 진심임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정말이죠? 믿어도 되죠?”
“물론!”
“못 믿겠어요.”
“......”
선영아, 꿈속에서까지 이러지 말자.
“그러니 가만히 계세요.”
“그래.”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거리를 좁혔다.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까지.
쪽.
그리고 가벼운 입맞춤.
우리 주위를 맴돌며 구경하던 여학생들이 ‘꺅꺅!’ 비명을 지르고, 남학생들은 탄식과 저주를 남겼다.
“처음이에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어린 송선영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고등학생의 풋사랑이란 걸까?
“그래.”
“오빠는요?”
“나도 처음이야.”
이 세계에서는 처음입니다.
“거짓말. 표정이 너무 담담하잖아요.”
“......”
현실에서 진도를 너무 빼놔서 이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믿어줄게요.”
“오빠를 놀리면 천벌 받아.”
“어떤 벌인데요?”
“그건 신(神)께서 정해주실 거야.”
우리의 결혼식에 P가 꼭 참석해서 축복해줬으면 좋겠다.
“합의해요.”
“음?”
“오빠를 닮은 체력 좋은 아이를 낳아줄게요. 좋죠?”
“거참...”
나는 반드시 그 미래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