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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93화 (194/232)
  • 193화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요. 송선영 양은 8시 자유수영입니다.”

    “감사합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산으로, 참치를 잡으려면 바다로, 여자친구를 잡으려면 취미를 공략해야 하는 법.

    판타지든 로맨스 판타지 작품이든 미녀가 그냥 만들어지는 줄 착각하는데, 몸매 관리를 위한 운동은 필수다.

    내 여자친구 송선영도 마찬가지로 꾸준히 수영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늘씬하면서도 매끈한 다리가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란 의미!

    “이젠 잘하네요.”

    “이쯤이야...”

    “흐응~ 여자친구 때문에 집중한 건 아니고요?”

    “그것도 맞습니다.”

    물리적인 접촉 없이 꿈의 세계 원주민에게 최면술을 걸었다. 내 영역 안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못 하는 게 없으리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부자에게 돈을 기부받고, 최고의 미녀랑 잠을 자고, 거슬리는 인간을 죽이거나 노예로 부리는 것도 간단하다.

    ‘마녀들이 대단하네.’

    이런 능력이 있는데도 ‘고작’ 황족으로 만족하는 마녀들은 대체?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P는 나랑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왜요?”

    “갑자기 엄마가 존경스러워서요.”

    “어머! 아들이 칭찬해주니 기분이 좋은걸요? 수영장 안에서 만나요~”

    “네.”

    어머니가 수영장에 같이 들어갈 줄은 몰랐지만, 싫진 않았다.

    ‘여기도 오랜만인걸.’

    송선영의 꿈속에서 지겹도록 다녔던 체육대학교 수영장. 이곳에서 모든 게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영은 좋지만, 수영선수는 싫은...

    그녀는 마음 편히 즐기던 취미가 일로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다.

    첨벙~!

    가벼운 준비운동을 마친 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엄청나게 혼났었지.’

    꿈속이고, 내가 무당이 아니었다면 수영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송선영을 절대 이길 수 없었으리라.

    촤아아-

    수영장의 물살을 가르면서 미친 속도로 헤엄쳤다. 내가 맨 처음에 달성한 업적이기 때문일까. 숙성된 치즈를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깊은 안정감이 들었다.

    ‘예상대로네.’

    바로 옆줄에서 송선영이 돌고래처럼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나에게 호감이 생겨서 경주하듯 따라붙은 건 아니다. 누가 더 빠르냐는 단순한 호기심.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만으로 만족했다.

    “푸하!”

    “후하하!”

    탁, 톡.

    봐준 건 아니지만, 단거리는 원래 내 전공이 아니었던 탓에 근소한 차이로 이길 수 있었다.

    근육에서 나오는 힘은 내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지만, 체형과 기술에서 한참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다.

    반면,

    “후우후우!”

    단거리는 송선영의 특기다. 지구력이 약해서 오래 헤엄치진 못하지만, 속도는 당장 올림픽에 출전해도 최상위권에 들 만큼 빠르다.

    ‘체력이 문제지...’

    선수는 필연적으로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그러나 송선영은 금방 지치는 탓에 조금만 연습이 길어져도 괴롭다.

    최상위권?

    올림픽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로 3위까지만 의미가 있다. 4위부터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 아픔을 모친이 겪었기에 송선영은 ‘수영선수’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연습해도 안 될 걸 알기에.

    “......”

    “후우...”

    우리는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들~”

    “...해수욕장인 줄 아시나.”

    비키니를 입고 신성한 수영장에 들어오는 여자가 어디 있는가? 나는 딱 한 명밖에 모른다.

    풍덩!

    송선영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기다리지 않고 수영장의 끝에서 끝까지 연속해서 왕복했다.

    수영 장거리 종목의 거리는 남자가 여자보다 길다. 그건 타고난 체력과 근력이 다르기 때문인데, 나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체력으로 쉬지 않고 헤엄쳤다.

    “푸하!”

    “후하하!”

    탁, 톡.

    휴식 후에 말없이 재도전한 송선영이지만, 나의 승리는 바뀌지 않았다. 조금도 지치지 않았으니까.

    “......”

    “후우...”

    그리고 또 반복. 나는 기계적으로 헤엄치고, 송선영은 휴식을 취하면서 멍하니 구경했다.

    언제까지?

    “실례합니다!”

    “아, 네.”

    “수영선수이십니까?”

    내 훈련비를 횡령해서 도박과 유흥에 쓰고 쫓겨난 감독.

    선수가 없어서 수영장 안전요원으로 일하던 그가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게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헉! 정말로 아닙니까?!”

    “네. 제 적성은 다른 겁니다. 수영은 취미고요.”

    “취미로 수영을 이렇게나... 혹시, 저랑 올림픽의 꿈을 키워보실 의향이 없으십니까?”

    “관심 없습니다. 취미는 취미로 남았을 때가 즐거운 법이니까요.”

    나는 옆에 송선영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제법 큰 목소리로 답했다.

    “하, 하지만 재능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건 누구를 위한 재능입니까?”

    “예?”

    “재능이 있는 저입니까, 아니면 저의 감독이 되고 싶은 당신입니까?”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그만큼 생각이 없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나의 단호한 거절에 감독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물러났다.

    우수한 선수를 영입하려는 노력은 감독의 소임이긴 하지만, 그가 나를 배신하고 이용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퐁당!

    “아들~”

    “...사람들이 봐요.”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고, 다 자란 아들을 등 뒤에서 껴안는 유부녀는 어머니밖에 보지 못했다.

    “못 보도록 해놨어요.”

    “아, 네.”

    “누구만 빼고요.”

    송선영이 우리를 힐끔힐끔 훔쳐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해하면 어쩌려고요.”

    “무슨 오해요~?”

    “......”

    짓궂으시다.

    미모가 퇴색되거나 늙지도 않는 마녀를 부모로 둔 자식들은 나처럼 오해받기 쉬워서 힘들지 않을까.

    ‘설마 나도?’

    미남(美男)도 아닌 내가 이 얼굴로 늙지 않고 풋내기, 애송이로 오해받으며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좀 끔찍하다.

    “수영은... 어렵겠네요.”

    수영하다가 비키니가 벗겨지는 대형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 그게 남도 아니고 내 어머니라면...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리고 알잖아요. 엄마는 수영을 잘하지 못해요~”

    “선수랑 비교하면 그렇죠. 슬슬 놔주세요.”

    “잘 다녀와요~”

    풍덩!

    나는 자유수영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수영만 했다.

    “오랜만에 수영하니 좋네요.”

    “선영이에게 말을 안 걸어도 돼요?”

    “네. 선영이는 남자가 먼저 말을 거는 걸 싫어하거든요.”

    “학교에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네요~”

    “매우 많았죠.”

    매사에 무관심한 성격을 무시해도 될 만큼 예뻐서 인기가 많았었다. 인기에 비해 친구는 별로 없었지만.

    “아들은 능력도 좋네요.”

    “그건... 글쎄요.”

    내가 학교 옥상에 쓰러져 있던 그녀를 만나지 못했어도 지금처럼 이어질 수 있었을까?

    나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다.

    송선영의 다리가 안 예뻤다면? 사극 <궁녀 덕춘이>의 세계로 인연이 닿은 윤소라나, 무당 가문의 증손녀 전지은 정도로만 알고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아예 안 예뻤다면, 치료하고 끝난 일반적인 여성 환자들처럼 금방 잊어버렸으리라.

    “아들은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해요.”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요?”

    “선영이가 저를 남자로서 좋아하는 이유는 같은 시간과 추억을 공유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머! 또 뭐가 있나요?”

    “체력이요.”

    술을 마시고 용감해진 송선영이 침실의 불을 끄며 했던 고백.

    그러니 확실하다.

    * * *

    다른 애들은 공부만으로도 힘들다고 칭얼댈 때, 나는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면서 높은 성적을 유지했다.

    체력이 약했다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 병원비로 전부 빠져나가는 비극만은 절대 용납될 수 없기에 악착같이 버텼다.

    즉, 무당이 되기 전부터 나는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저기요.”

    스키장은 잠시 내려놓고 수영장과 사격장을 왕복하며 2개월쯤 보냈을 때, 드디어 송선영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네.”

    “안 힘드세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체력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마라톤도 우스울 만큼 체력에 자신 있죠.”

    “좋으시겠네요.”

    그동안 나를 쭉 관찰해온 송선영은 허세로 듣지 않았다.

    “하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하나라도 잘해야죠.”

    “경쟁... 그렇죠.”

    여기서 대화를 흐지부지 끝내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수영을 잘하시던데요.”

    “맨날 졌는데요.”

    “그건 제가 남자라서 이긴 겁니다.”

    선수들끼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일반남성은 선수가 신체적으로 불리한 여성일지라도 절대 못 이기니까. 결투 종목까지 포함해서!

    P의 적성검사로 인정받은 ‘선수’는 아예 다른 생물이라고 보면 된다.

    “알고 계셨네요.”

    “하핫! 어떻게 모르겠어요, 계속 옆에서 헤엄치는 예쁜 아가씨를.”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예쁘다는 칭찬을 지겹도록 들은 송선영의 눈꼬리가 기분 좋다는 듯이 사르륵 내려갔다.

    “22살입니다.”

    “저는 19살이에요. 저...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적성을 여쭤봐도 될까요?”

    적성.

    친구끼리는 툭 던지듯 물어볼 수도 있지만, 친하지도 않은 이성(異性)에게 적성을 물어보는 건 다르다.

    짙은 관심 표현!

    적성이 마음에 들면 사귀고 싶다는 우회적인 고백이다. 적성은 ‘배우자의 직업’이랑 직결되니까.

    ‘와! 후퇴가 없네!’

    자기 적성이 싫다고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송선영답다.

    여기서 선택지는 셋.

    적성을 가르쳐주면 승낙이고, 되물으면 보류, 감추면 거절이다. 하지만 송선영이 P의 적성검사를 받지 않은 ‘19살’임을 스스로 밝혔으므로 선택지가 둘로 좁아진다.

    승낙 혹은 거절.

    나의 선택은 당연히 승낙이다. 하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어린 강문수’ 때문에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직자입니다.”

    “아...”

    상대의 고백을 받아줬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적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흐지부지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적성이 괜찮다고 생각되면 자신을 소개하는 게 일반적이다. 적성, 연락처, 학력, 직장 등등.

    나는 휴식을 취하듯 수영장의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녀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렸다.

    ‘솔직히 이건 나도 모르겠네.’

    신성로마제국에선 ‘성직자’가 매우 좋은 적성이지만, 이 나라는 종교가 몰락해서 이민 외에는 답이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무당보다 인식이 나쁘다.

    그러나,

    “살짝 놀랐어요. 체력이 좋으셔서 몸 쓰는 일을 하실 줄 알았는데, 종교 쪽에 계실 줄은.”

    “그래서 실망했나요?”

    “아, 아뇨!”

    당황한 송선영이 손사래 치며 부정하는 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귀한 경험이다.

    “제 이름은 아몰랑입니다.”

    “어? 외국인이셨나요?”

    “어머니가 제국 출신입니다. 동안이시라서 자주 오해받죠.”

    “제국... 아차!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송선영이고, 이 근방에서 부모님이랑 함께 살고 있어요. 적성은... 한 달쯤 뒤에 나오고요.”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송선영치고는 굉장히 적극적인 자세였다. 그래서 쉽다는 건 아니다. 첫마디를 꺼내기까지 무려 2개월이나 걸렸으니까.

    “적성이 한창 신경 쓰일 때군요. 저도 그랬습니다.”

    무당.

    P의 적성검사 결과표를 처음 받았을 때는 진짜로 눈앞이 캄캄했다.

    “아몰랑 씨는 적성이 성직자가 나올 줄 예상하셨어요?”

    “제가 성직자로 보입니까?”

    “어...”

    송선영이 내 눈치를 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아니죠?”

    “네.”

    귀한 경험을 많이 하는 날이다.

    “저도 그랬습니다. P의 적성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신(神)의 존재조차 믿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어엿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적성은 강요가 아닌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기요...”

    늘 혼나던 내가 여자친구에게 조언해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꿈이기에 가능한 경험이다.

    “송선영 양은 검사 결과에서 꼭 나왔으면 하는 적성이 있나요?”

    “...없어요.”

    그녀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대다수 고등학생이 없다. 내가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적성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얌전히 운명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적성이 나오더라도 실망할 것 없어요. 운명에 부딪혀본 후에 실망해도 늦지 않습니다.”

    “......”

    “하핫!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너무 아는 척했네요.”

    “...아뇨. 정말로 도움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내 간섭으로 송선영의 미래가 바뀌는지 솔직히 궁금했다.

    “저...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두둥!

    수줍은 얼굴로 묻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내 심장이 위태로웠다.

    “얼마든지요.”

    너무 강력해서 나의 세계로도 진정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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