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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192화 (193/232)
  • 192화

    가족이랑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그냥 좋다고 할까.

    “...엄마.”

    “왜요?”

    “흠... 아닙니다.”

    송선영이랑 큰 진전을 이뤘을 때도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이건 조금 애잔하면서도 다른 잔잔한 행복...

    잃어버린 것을 찾은 기분이다.

    “똑같죠?”

    “네.”

    꿈이 현실이랑 똑같은 세계란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꿈속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가장 먼저 모습을 감추는 기술부터 익힐 거예요.”

    “어째서입니까?”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공상과학 작품을 보면 현재와 과거의 자신이 만나면 안 된다는 설정이 있잖아요?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흠... 만나면 싸웁니까?”

    “아뇨. 만약에 싸우게 되면 현실의 우리가 필승이죠. 하지만 꿈속의 강문수가 자신과 세계가 가짜란 사실을 깨닫고 정신이 붕괴할 거예요. 아들, 반대로 한 번 생각해봐요.”

    “...그렇겠네요.”

    지금의 행복이 전부 누군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거짓이라면, 나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현실은 잘 만들어진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게임이란 음모론처럼. 그러나 의혹과 확증은 다른 문제.

    이 세계의 강문수가 나를 본다면 그건 확증이다.

    “모습을 감추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나뉘어요. 남들이 나를 봐도 모르게 간섭하거나, 내가 안 보이게 숨거나.”

    “간섭은 최면술이군요.”

    “비슷해요. 나의 영역에 들어온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머리에 간섭하는 거예요.”

    “그게 현실에서 돼요?”

    “그럼요. 라누벨라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영역인걸요.”

    “......”

    “대신에 조건이 있어요. 아들처럼 몸에 이것저것 추가하면 방해가 돼서 영역을 넓게 확장할 수 없어요.”

    “아하!”

    즉, 내가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꿈속에서만 가능해요. 이건 매우 쉽죠.”

    “뭔데요?”

    “내 영역 안에선 빛이 모든 물체를 무시하고 통과한다.”

    “...아!”

    “투명인간의 원리죠. 이걸 응용해서, 영역 안에서 생성된 음파는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러면 방음이 되고요.”

    “원리는 이해했습니다.”

    “이제 해보세요.”

    “......”

    과학적인 머리로 원리만 이해했다.

    “그러면 시범을 보여줄게요.”

    “네.”

    “이런 식으로...”

    “...아!”

    어머니의 시범을 보자마자 바로 흉내 낼 수 있었다.

    * * *

    꿈속의 강문수랑 마주치지 않는 대비책을 마련한 뒤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짤랑! 짤랑! 짤랑!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돈을 던져주며 지나갔다.

    “이것도 최면술이에요. 나를 매우 불쌍하게 여기도록 만들어서 후원금을 걷는 거죠.”

    “좀... 그렇네요.”

    내가 돈을 좋아하긴 하지만, 일해서 벌지 않고 구걸하는 건 꺼림칙했다.

    “저도 엄마에게 배웠어요.”

    “아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이상한 걸 가르치셨군.

    “돈을 안 내고 활동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누군가가 피해를 봐요. 제가 고귀한 라누벨라의 방식을 보여줄게요.”

    “네.”

    우리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엄마 탓에 고생이 많았네요.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라니.”

    “익숙해지면 할 만합니다.”

    딸랑~♪

    나보다 조금 앳된 고등학교 2학년의 강문수가 편의점 계산대에서 인사했다.

    이건 어머니의 작품.

    우리를 보고는 있지만, 평범한 손님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고급 기술이다.

    “이걸로 쭉 생활했어요. 그래서 남편을 제외한 모두가 저를 평범한 외모의 아줌마라고 생각했죠.”

    “아빠는 왜 뺐습니까?”

    “내가 아무리 대단한 마녀라도 아들을 만들면서 집중하진 못한다고요.”

    “험험!”

    그런 이유라면 이해했다.

    “감시카메라에 안 찍히도록 빛을 투과시키면서, 주변인들은 내가 이 자리에 있다고 인식하도록 하는 거죠.”

    “워...”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내가 잘 따라 하긴 하지만, 동시에 여러 작업을 하는 건 아직 무리.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나랑 비슷한 나이에 이걸 해낸 라누벨라 13세가 대단해 보였다.

    “물건을 집고 그냥 가요.”

    “...예?”

    “어린 아들은 우리가 구경만 하다가 떠났다고 생각할 거예요.”

    “자, 잠깐만요! 나중에 수량 조사를 하면 들통날 거예요!”

    “하지만 저희의 짓인지는 절대 모르죠. 감시카메라에도 안 찍혔으니까요.”

    “범인을 못 찾으면 제 월급으로 그 구멍을 메꿔야 합니다...”

    “그게 구걸하지 않는 고귀한 라누벨라의 방식이에요.”

    “......”

    어머니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짤랑!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힘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구걸해서 모은 돈으로 계산을 마친 어머니가 음료수를 나에게 건넸다.

    “이해했나요?”

    “네. 제 생각이 짧았네요.”

    구걸하긴 싫지만, 돈을 안 내고 도망치는 건 더욱 싫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피해를 떠안을 테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무당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 없이도 바르게 살았네요.”

    “뭐... 말 그대로 살기 바빴으니까요.”

    “돈이 필요해서 편의점 사장을 속일 수도 있었잖아요?”

    “천성(天性)이 도둑질은 안 맞는 모양입니다.”

    “조상님을 닮았다는 증거죠. 라누벨라 6세는 다리가 정말 예쁘셨거든요.”

    “콜록콜록!”

    음료수를 마시다가 뿜을 뻔했다.

    “저기, 오네요.”

    “아...”

    편의점 근처에 앉아서 대화 중인 우리 앞으로 환자가 걸어갔다.

    현실보다 조금 앳된 외모.

    그리고 교복.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낸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고, 연한 향수를 온몸에 뿌렸다.

    칙칙!

    “...아, 맞다.”

    마지막으로 교복 치마를 올려 입으며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했다.

    “아들의 취향을 잘 아네요.”

    “제가 얼마나 쉬운 인간인지 실시간으로 깨닫는 중이에요.”

    “그게 아들의 장점이라고요.”

    “하아...”

    내가 자괴감에 빠진 사이, 이나연은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어린 강문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대화를 엿들어보니...

    ‘또 오셨네요.’

    ‘문수가 보고 싶어서.’

    여자의 손도 못 잡아본 순진한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에게 굉장히 노골적으로 접근했다.

    ‘어... 네. 감사합니다.’

    ‘고민은 해봤어?’

    ‘죄송합니다. 장난인 줄 알고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습니다.’

    ‘어머! 나는 진심인데.’

    ‘배우를 해도 될 만큼 예쁘신 분이 뭐가 아쉬워서 저에게 사귀자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귀면 가르쳐줄게.’

    어머니의 말씀처럼 어린 강문수의 순결이 위협받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어요. 같이 놀러 갈 돈도 없고요.’

    ‘데이트 비용은 내가 낼게.’

    ‘그래도 안 돼요. 아르바이트가 주말까지 꽉 채워져 있어요.’

    ‘...안 힘들어?’

    ‘이젠 익숙합니다.’

    그 뒤에도 이나연이 포기하지 않고 설득을 시도했지만, 어린 강문수는 넘어가지 않았다.

    “훌쩍!”

    “...엄마는 갑자기 왜 우세요?”

    “숟가락으로 퍼서 입에 넣어주는 연애도 못 하는 아들이 불쌍하고, 엄마가 너무 미안해서요.”

    “아, 네.”

    딸랑~♪

    당장은 실패했지만,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꼭 사귄다는 약속을 받아낸 이나연은 만족하고 떠났다.

    반면에 어린 강문수는?

    ‘나에게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나연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모가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외모도 변변찮고...

    장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신에게 예쁜 여자애가 사귀자고 먼저 달려들면 누구라도 의심부터 하리라.

    “그건 아들 생각이고요.”

    “왜요?”

    “예쁜 여자가 다가오면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무는 남자도 많아요. 엄마가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흠...”

    하여간 어린 강문수가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고 믿어볼 수밖에.

    물론, 아무리 꿈이라도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랑 사귀는 건 싫으므로 간섭하게 될 것 같다.

    ‘남해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꿈이란 사실을 몰랐던 그는 집착이 더욱 심했으리라.

    “아들~”

    “네. 갑니다.”

    어머니에게 틈틈이 기술을 배우면서 올림픽 준비에 들어갔다.

    * * *

    현실보다 꿈속의 내 육체가 성능 면에서 더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능 하향! 현실에 맞췄다.

    “이 기록은...”

    “괴물...”

    “사람인가...?”

    하지만 줄여도 압도적인 육체 능력으로 전문선수들의 기량을 찍어 눌렀다.

    스케이트, 역도, 검도.

    남들보다 2배 빠르고 강하면 유리한 종목은 빠르게 완료. 양궁과 사격도 로맨스 판타지 <아낌없이 받는 공녀님>의 세계에서 미남들 머리통으로 실습한 덕분에 무난하게 넘겼다.

    “아들, 외계인 취급 안 받으려면 역도는 조절해야겠는데요?”

    “뭐...”

    한 손으로 200kg을 가볍게 든 시점에 더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반칙으로 취급되는 자세만 살짝 교정하는 수준?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에이~ 단체전도 걱정할 것 없어요. 엄마를 믿어봐요~”

    “흠... 그러면 한 번 해볼게요.”

    그리고 엄마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 * *

    최면술을 활용해서 국가대표 연습 경기에 불쑥 끼어든 나는 혼자서 모든 시합을 지배했다.

    “막아- 으악?!”

    “몸으로- 꾸엑~?!”

    하키.

    몸싸움으로 여럿이 덤벼도 흔들리지 않는 나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하키채로 사람이나 얼음판을 깨지 않도록 주의하면 될 것 같다.

    “히익?!”

    “커윽...!”

    피구.

    힘을 조절하지 않으면 살인 날 위력에 모든 선수가 벌벌 떨었다. 총알보다 느린 공을 잡는 것은 나에게 간단했기에 일방적인 양민학살이었다.

    “저걸 어떻게?!”

    “반응속도가...”

    배구.

    총알보다 느린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실책을 남발하는 동료 없이 혼자 경기하는 편이 낫다고 여겨질 정도.

    “엄마의 말이 맞죠?”

    “그러게요.”

    이걸 단체전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문이지만,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남은 동계 올림픽 종목은?

    스키, 승마, 눈썰매.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였다.

    “좋은 말과 개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걱정이 저랑 다르시네요. 저는 동물이랑 안 친해서 힘들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할 것 없어요. 최면술을 활용하면 충실한 말과 개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효과가 일시적이긴 하지만, 경기가 끝날 때까지는 채찍질 한 번 필요 없을 거예요.”

    “허...”

    그건 반칙 수준인데?!

    “제국에도 국가대표가 있기에 말과 개를 지원받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것만은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데... 아들도 알다시피 이 나라는 경마와 눈썰매에서 동메달을 딴 이력조차 없어요.”

    “뭐... 안 되면 포기해야죠.”

    “포기하면 피메달이 간당간당해요. 아들이 하계 올림픽에서 욕심을 너무 안 내서요.”

    “왜요? 제가 금메달을 싹쓸이하면 여유로울 것 같은데.”

    “남자만 생각하면 그렇죠. 여자 선수의 금메달은 어떻게 막을 건데요?”

    “아...”

    피메달은 남녀 구분 없이 단 하나.

    내가 금메달을 싹쓸이해도 여자 쪽은 견제할 방법이 없다.

    “이제 이해했죠?”

    “네.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하계 올림픽 때는 피메달에 관심이 없었으니...”

    “그러면 경마와 눈썰매는 욕심을 내려놓고, 남는 시간 동안 스키에 열중해보도록 할까요?”

    스키.

    근육이 아닌 중력으로 내려가는 탓에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는 나에게는 쥐약이었다.

    그나저나...

    “즐거워 보이시네요.”

    “그럼요. 사랑하는 아들이랑 오랜만에 함께하는걸요? 아들은 어때요?”

    “...저도요.”

    낯간지러웠던 나는 고개를 돌린 채 작게 대답했다.

    “스키장으로 갈까요?”

    “잠시만요.”

    내가 11가지 동계 올림픽 종목을 맛보고 연습하는 사이에 어린 강문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 얘기는?

    몇 개월 뒤에 내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P의 적성검사를 보게 된다.

    ‘송선영이 마음에 걸려.’

    이나연의 간섭으로 미래가 바뀌었다. 어린 강문수가 나처럼 송선영이랑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다는 의미.

    그렇다면?

    “수영장으로 가죠.”

    “흐응~ 아들이 무슨 생각 중인지 엄마는 알 것 같아요.”

    “스키보다 중요합니다.”

    어린 송선영이 다른 남자랑 사귀는 꼴은 절대 못 본다.

    “엄마는 아들을 응원해요. 그런데 자신 있어요?”

    “물론이죠!”

    이 세상에 나보다 송선영을 잘 아는 남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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